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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일 11시 59분 등록

*이 글에서 주제어가 되는 pokerface란 단어가 올릴 수 없는 금지단어로 되어 있어 업뎃이 원춴 봉쇄 되기에... 할 수 없이 영어로 적습니다....ㅜㅠ;

 

미생, 조직의 음모

2014 12 1

 

피터 드러커와 미생이 만나는 미묘한 접점에서, pokerface를 구사할 수 없는 자의 슬픔을 되짚는다. 아직 연옥에 입성할 자격도 갖지 못한 자와 그 연옥에서 아직은 제대로 살아봤다 말할 수 없는 자와 이제 연옥을 벗어났으나 여전히 살아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회사인과 비회사인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이되 조직 안에서는 마치 이단의 표식인 듯 금기시되는 감정의 구사에 대해 고민해본다.

 

드러커에 따르면 회사인간, 조직인간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세상이 된 지는 얼마 안 됐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문화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조직과 인간의 관계는 아직 발전의 초기 단계에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수십 년이란 시간이 내가 알아온 세상의 전부인 동시대의 회사인들에게, 그런 인류학적인 분석은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다이아몬드 광산 만큼이나 의미 없다.

 

지금 이 사회의 배운 사람들, 숫적으로도 분명 주류에 속하는 이 세계는 놀랍도록 일방적이고 일차원적이다. 언어, 태도, 행동, 모든 것이 사무적이라는 틀에 갇힌 이 블랙홀 같은 공간은 대체 뭔가. 조직은 성과와 프로세스 외에 다른 것을 거론해서는 안 되는 곳인가? 지금 이 수많은 성인들의 거의 모든 것인 이 공간에 대해, 이 관계에 대해, 경영론과 성공학개론 외에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못해 기이하지 않은가.

 

회사란 곳에서 지금도 모든 것을 걸고 울고 웃는 나의 친구들을 생각한다. 이게 다여서는 안 된다고 고민하면서도 그것을 대체할 다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또 괴로운 그들. ‘나 괜찮아를 연기하느라 수없이 갈아 쓴 pokerface가 닳고 닳아 더 이상 괜찮음을 가장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 그게 뭘까. 역시나 회사가 아닌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는 그 자기개발인가! 아 놔.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다고. 머리로도 이해하고 무엇보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싶다고. 화해하고 싶다고. 같이 잘 살아보고 싶다고. 그러니까 조직인 너와 개인인 나의 아름다운 화해로 이르는 길도 결국은 자기개발인 거라고? ? 그래, 자기개발 다 좋은데, 왜 이렇게 공부 안 하면 너만 손해라는 하나 마나한 엄마 잔소리 같이 들리는 거냐고.

 

이 모든 불통과 절망의 저편에, 수많은 이들의 감정이 격돌하는 이 곳에서 감정을 들어내려는 어이없지만 고집스런 시도가 존재한다. 이대리, 왜 이렇게 감정적이야? 프로답게 행동하라구. 결국 감정의 구사는 조직생활에 필요 없는 잉여기능인가? 여러 사람이 이해관계를 갖고 엉키는 공간에서 누군가의 지나친 감정노출은 서로 부담일 수 있고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느낀다는 것은 통제의 대상일 수도 없고 판단의 대상일 수도 없다. 그것은 무조건반사다. 자연현상이다. 나의 감정에 자꾸 칼을 덧씌우려 하는 이 부자연스런 통제의 기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조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일에 연관되었거나 영향을 받거나 관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하고도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니까 감정의 자제를 주문하는 조직의 요구는 몇천 년을 통해 내려온 권력의지의 발현일 뿐이고, 인간을 물건처럼 움직이기 쉽게 소처럼 말없이 일하기를 바란 노예주들의 술책인거다. , 오늘 아침에 읽은 르귄의 책 때문에 나 또 영향 받았나 보다.

르귄 여사는 왜 또 수십억 년 떨어진 헤인 우주의 혹성까지 가서도 노예와 여성의 문제를 들이 파고 있는 건가. 그리고 그 의미심장한 책[1]의 의미심장한 제목에는 왜 또 용서란 말이 들어가느냔 말이다.


그러니까 감정마저 통제하려는 조직의 음흉한 술책에 넘어가지 말자. pokerface가 안 되어 슬펐던 오차장, 그와 비슷한 수많은 동지들이 자연스러운 그들의 모습대로 살아 움직이는 조직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가? 살고 싶지 않은가?       

 

드러커의 주된 관심은 언제나개인이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사는 개인의 위상과 존엄성 그리고 기능과 책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드러커는 조직을 개인으로 하여금 성과를 달성하고, 공헌하고 그리고 성취감을 느끼도록 하는 사회적 기관이자 도구로 간주하고 있다. (프로페셔널의 조건, 옮긴이의 글 중)

 

드러커 당신의 말 중 가장 맘에 드는 말이었다.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도구인 너, 조직! 너는 그러니까 그냥 도구다. 도구가 주인을 지배하면 안 된다 말이다. 그리고 같이 가자고. 조직아, 니가 주인인양 행세해도 되는 시절은 갔어. 우리는 이제 너만큼 안다고. 







[1] 어슐러 K. 르귄, ‘용서로 이르는 네 가지 길’, 시공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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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1 13:52:10 *.104.9.216
으와~~~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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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1 19:19:24 *.103.151.38

이 막가파 칼럼을 이해해준 피울님께 감사! 그러고보니 이번 주 피울님과 제 칼럼은 비슷한 기류가 흐르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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