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종
- 조회 수 2160
- 댓글 수 5
- 추천 수 0
결정적이고 장기적인 곰탕의 효용에 관하여
2014년 12월 22일
강종희
4일간 집을 비운다. 남편은 4일간 자유부인이 되려는 마누라도 그렇고 아침부터 아이들 밥을 챙긴 후 회사에 가야 하는 일정이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밥, 아침밥은 먹을 거 있어? 그럼 점심꺼리는 있어?를 끊임없이 되묻는 그의 태도에 나의 준비는 밥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치밀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어떻게든 불만을 누그러뜨릴 한 방, 그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신토불이 한우 사골 곰탕!
출발 전날 도착하도록 ***마트에서 질 좋은 사골과 사태살을 주문했다. 그것마저 남편을 시켰다. 왜냐하면 남편은 대한민국 최대의 신토불이 유통업체인 ***마트를 계열사로 거느린 **의 본사에서 근무했던 지라, 좋은 농축산물을 역시 좋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루트가 있다. 그러고 보면 남편의 전 직장 **은 참, 좋은 곳이다. 퇴사한 직원도 할인가로 질 좋은 우리 농축산물을 구입할 수 있으니. 일단 도착한 사골은 참으로 기골이 장대한 우리 한우의 그것이었던지 제일 큰 냄비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기에 높이가 내 무릎을 넘는 뚜껑 달린 거대 양동이를 꺼냈다. 고기와 뼈를 한차례 물에 헹군 뒤 반나절을 찬물에 담궈 두었다. 찬물에 핏기를 제대로 빼지 않으면 사골은 끓어오르며 온갖 불순물을 피와 함께 끓여 올리기 때문에 볼썽이 사납고 맛도 탁해진다. 빨래며 설거지며 아이들 이불 정리를 마치고 볼거리로 학교에 가지 않은 둘째랑 좀 놀아주다 하교한 큰 놈에게 간식 먹이고 시장에 다녀오고 저녁을 해먹이고 식탁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밤 열한 시, 시간은 역시나 가차없는 놈이다.
이제 투명한 붉은 빛으로 변한 양동이의 물을 쏟아내고 사골을 한번 부르르 끓인다. 그리고 애벌 삶아내기를 한 뒤 사골을 고아야 국물이 맑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이번에는 잊지 않았다! 한번 끓여낸 뒤 그 물을 버리고 다시 찬물을 한 양동이 가득 부어 끓이기 시작한다. 처음엔 센 불로 시작한다. 그 센 불에 양동이 뚜껑이 들썩들썩, 와글와글 소리에 고양이 귀가 쫑긋거릴 때쯤 불을 중간불로 낮춘다. 새벽 한 시. 이제 사흘간 세 남자의 식탁을 채워줄 먹을만한 곰탕의 분량 확보까지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이때 잠이 들면 정성 들여 우려낸 사골 국물이 죄다 증발되고 뼈 속까지 스며든 탄 맛에 땅을 치게 된다. 가장 약한 불로 낮추고 졸음을 참을 수 있을 데까지 참아본다…고 했지만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알람을 맞춘다. 새벽 4시 반에는 한번 일어나 불을 보아야 한다. 나흘간의 자유인 놀이를 뒷받침해줄 곰국은, 새벽잠보다 소중하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요소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니 알람이 울리기 직전. 이 정성으로 공부를 했으면 사법고시도 붙었겠다 궁시렁대며 불을 보고, 뽀얗게 우러났지만 아직도 양동이 4/5의 지점에서 3/5 정도밖에 졸아들지 않는 국물을 그냥 불 위에 그냥 둔다. 이제 양동이의 절반 높이로 줄어야 입 안에서 둥글게 맴돌다 목을 타고 묵직하게 넘어가는 든든한 사골국물을 맛볼 수 있을 것이므로.
이제 와서 잠이 들면 끝장. 절대 제 시간에 깰 리가 없음을 알기에 코끼리와 벼룩을 손에 든다. 몇 장 읽다 보니 눈꺼풀이 묵직해져 온다. 할 수 없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추운 새벽 공기 가득한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는다. 이제 아이들이 일어나기까지는 한 시간 남짓, 서둘러 서울 갈 짐을 챙기고 밥상을 본다. 김치에 김, 계란말이를 놓고 밥을 퍼 담은 후 양동이의 뚜껑을 연다. 화악, 얼굴로 올라오는 뜨거운 훈기에 진한 사골 내음이 덮쳐온다. 대파를 썰어 국 그릇에 담고 국을 퍼 올린다. 굵은 소금과 후추로 간한 국물을 한 그릇, 밥 한 술을 말았다. 오늘은 서울서 오전 일정이 있어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 집을 나서야 기차시간에 댈 수 있다. 부시럭대는 소리에 남편이 깼다. 국은 잘 됐어? 잘 됐지. 탕반의 민족인 우리, 밥과 국으로 하루를 마감하거나 시작해야 제대로 하루를 살았다 싶은 동이의 후예답게 나는 국 한 그릇에 새벽잠을 설친 고단함을 보상받는다. 국은 입에 델 만큼 뜨겁고, 밥은 국밥에 적당하게 고슬하다. 여기에 친정엄마가 보내준 김장김치와 총각김치를 곁들이면 한 끼가 아니라 세 끼도 내리 먹을 수 있는 든든한 식사가 된다.
남편에게 사골 국물의 보관 방법과 곁들여 먹을 사태 수육의 간 하는 법을 코치한 후 나는 짐을 싸들고 유유히 집을 빠져 나온다. 그는 이제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아내의 뒷모습에 조용히 끓어오르는 사골양동이가 오버랩되며 이제부터 엄마 없는 집안에서 두 아들을 깨워 학교로 보내야 하는 사흘 간의 아침 전투가 시작됐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제 뭔가 당한 듯한 느낌에 당혹할 남편을 뒤로 하고 최대한 후딱 아파트를 빠져 나와 ‘굿럭!’을 날리며 부산역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존재감 만빵인 사골 곰탕으로 인해 날아갈 듯 가벼웠다. 한 양동이로 나흘, 한 사흘 전부터 끓여서 두 양동이 정도 확보해두면 세 명이 며칠 간 먹을 수 있을까? 갑자기 곰탕 한 양동이에 남편두고 유럽여행도 간다는, 꽃꽂이 강좌에서 만난 오십 대의 초고수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사흘을 끓여도 맹탕만 나오는 수입 사골과 달리 반나절만 끓여내도 국물도 뽀얗게 맛나는 신토불이 한우 사골, 그의 역할은 세탁기와 청소기 따위의 하드웨어적 인프라를 넘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길을 가려는 주부에게 절대적이고도 장기적인 소프트웨어적 지지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이 글은 마감이 닥쳤으나 소재가 떠오르지 않는 절망적 상황에서 문득 가스렌지 위 부글대는 사골양동이가 눈에 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남편이 요새는 내 글을 읽지 않고 있다는 확신 하에 쓴... ^^;) 신토불이 우리축산물 한우사골에 대한 객관적이고 관찰적인 효용분석기...입니다...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452 | ....... [4] | 에움길~ | 2014.12.29 | 1977 |
4451 | #36 감수성 그리고 오만 [5] | 희동이 | 2014.12.29 | 2003 |
4450 | 창 너머 세상 [6] | 앨리스 | 2014.12.29 | 2125 |
4449 | 자신의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정도(正道)_찰나칼럼#36 [3] | 찰나 | 2014.12.29 | 2007 |
4448 | 당면한목적함수_구달칼럼#38 [8] | 구름에달가듯이 | 2014.12.29 | 1910 |
4447 | #36 기술의 발전은 진보인가_정수일 [6] | 정수일 | 2014.12.28 | 2138 |
4446 | 아이가 없어졌어, 으헝, 으헝엉, 엉엉엉! | 타오 한정화 | 2014.12.23 | 1958 |
4445 | 나만의 개성넘치는 삶이란 [2] | 녕이~ | 2014.12.22 | 1952 |
4444 | '잘될거야'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까지 [4] | 어니언 | 2014.12.22 | 1939 |
4443 | 포트폴리오 인생이려나 [2] | 에움길~ | 2014.12.22 | 1905 |
» | 결정적이고 장기적인 곰탕의 효용에 관하여 [5] | 종종 | 2014.12.22 | 2160 |
4441 | 엄마가 필요해 [4] | 왕참치 | 2014.12.22 | 1864 |
4440 | 내 것이 소중함을 깨닫기까지 [2] | 앨리스 | 2014.12.22 | 1955 |
4439 | #35 - 황금의 씨앗 [1] | 희동이 | 2014.12.22 | 1975 |
4438 | 꿈속에서도컨셉_구달칼럼#37 [2] | 구름에달가듯이 | 2014.12.21 | 1986 |
4437 | #35 준비없는 이별_정수일 [2] | 정수일 | 2014.12.21 | 1943 |
4436 | 남들보다 낫기보다는 남들과 다르게_찰나칼럼#35 [2] | 찰나 | 2014.12.21 | 2023 |
4435 | 3-32. 헤라클레스는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가? | 콩두 | 2014.12.21 | 2808 |
4434 | 3-31. 거절이 진실이다 [3] | 콩두 | 2014.12.21 | 2160 |
4433 | 3-30. 아이들의 고향집이 될 새 집 | 콩두 | 2014.12.21 | 20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