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한 명석
  • 조회 수 148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6년 8월 17일 10시 43분 등록

심재천, 나의 토익만점 수기, 웅진지식하우스, 2012

 

 

미안하지만 거기에 있으면 내 영어가 늘지 않아.”

내가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 너처럼 영어를 잘하는 어학연수생을 본 적이 없어.”

아냐. 부족해. 많이 부족해.”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궁금하군.”

스티브는 말했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의 토익만점 수기중에서)

 

 

잘 쓰여 진 소설을 보면 굉장히 쉽게 쓴 것 같이 느껴진다. 편한 친구를 앞에 두고 주저리주저리 수다 떤 것처럼 어려운 데가 없고 막히는 곳도 없다. 대화는 농담처럼 짧고 웃기고, 인물은 루저의 사촌처럼 엉뚱하다. 책을 읽는다는 부담이라곤 없이 줄줄 읽어 제낄 수 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무언가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어 편치가 않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결코 쉽게 쓰여 진 것이 아닐 것이다. 한 나라의 일등국민이 되기 위해서 남의 나라 말-영어에 능통해야 하는  현실, 너무나 익숙해서 아무도 반문조차 하지 않는 영어망국병에 제대로 메스를 갖다 댄 낯설게 보기, 수다 같고 농담 같은 글발, 간간히 숨겨놓은 수치심을 유발하는 장치들을 일컬어 문학적 재능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 해도 잘 읽어지지 않으면 끝내 못 읽고 마는 내게, 가독성은 책이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거기에 한 줄기 문제의식을 겸하고 있으면 소설 한 권의 의미로 충분하지 않을까. 리드미컬한 문체와 깜찍한 문제제기가 찜통 더위를 잠시라도 날려줄 것이다. 저자가 말 거는 방식을 몇 대목 맛보시라.

 

-------------------------------------------------------------------

나는 산책을 나갔다. 비가 쏟아지고 있다. 우산은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왜 우리는 우산을 써야 하는가, 그런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빗속으로 나갔다.

비를 맞으며 농장 주변을 걷는다.

빗줄기 하나에 넌 영수”, 다른 빗줄기에 넌 찰리”, 또 다른 빗줄기에 넌 메리라고 이름 붙였다. 정신 나간 짓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무척 창의적인 행위로 생각되었다. 빗방울 하나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 반갑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난 그 녀석을 안다. 빗물에서 닭고기덮밥 맛이 났다. 그 빗방울의 전신은 내가 1년 전 잠원동 분식집 앞에서 뱉은 침이다.

그날은 토익시험을 본 일요일이었다. 시험을 망쳤기 때문에 밖에 나오자마자 침을 퉤 뱉었다. 그 침이 증발되고, 수증기로 떠돌다가 이곳에서 비가 되어 내게 떨어졌다. 틀림없다. 빗물에 그런 맛이 난다. 영어 스트레스 때문에 위염을 앓는 젊은이의 침 맛이다. 그날 토익 점수는 535점이라고 기억한다.

 

다른 빗방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짠맛이 난다. 보나마나 이건 아버지의 눈물.

2년 전, 앞마당에서 기도하며 흘린 눈물이라고 추정된다. 아버지가 남몰래 우셨구나, 나는 깨닫는다. 아버지의 눈물은 구름이 되어 지구를 열세 바퀴 돌다가 지금 내게 떨어졌다. 그 빗물 맛을 좀 더 음미해본다. 아버지에겐 식도염이 있구나, 나는 분석했다.

나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빗방울은 저마다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건 신기했지만, 각 빗방울들이 자신의 과거를 떠들어대니 조금 피곤했다.

 

덜컥 겁이 났다. 곧 엄청난 고통이 닥쳐올 거란 예감이 들었다.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 고통이 오기 전에 기절하고 싶었다. 몇 번인가 졸도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게 실신이 되지 않았다.

그때 오른쪽 눈에서 뭔가 쾅, 하고 터졌다. 분명 쾅, 소리였다. 얼굴 반쪽이 날아간 느낌이었다.

아버지.”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나의 마지막 말 아버지는 한국어였다.



IP *.153.200.10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여름독서2> 너무 잘 읽히고 깜찍하고 야무진- 나의 토익만점 수기 한 명석 2016.08.17 1489
2516 인공지능의 시대, 창의성이란?(1편) 차칸양(양재우) 2016.08.16 1680
2515 마흔아홉, 출발의 설렘 [1] 書元 2016.08.15 1405
2514 예순여섯번째 편지 - 1인 기업가 재키의 프로그램 재키제동 2016.08.12 1752
2513 저항해야 할 대상은 그것이 아니다 김용규 2016.08.11 1412
2512 <여름독서1> 김현정의 내숭 file 한 명석 2016.08.10 1730
2511 아날로그 소금의 맛 차칸양(양재우) 2016.08.09 2015
2510 예순다섯번째 편지 - 1인 기업가 재키의 휴가단상 file 재키제동 2016.08.05 1673
2509 그대와 내가 만나 숲이 되지 않는 이유 김용규 2016.08.04 1746
2508 위대한 선물 한 명석 2016.08.03 1436
2507 마흔아홉, 오늘과의 동행 [1] 書元 2016.08.03 1333
2506 자가용에 대한 여러 생각들 [1] 차칸양(양재우) 2016.08.02 1520
2505 고대 올림픽의 부침을 생각하며 연지원 2016.08.01 1546
2504 순정 유감 김용규 2016.07.28 1543
2503 별미만두를 먹는 일요일 file 한 명석 2016.07.27 1564
2502 '자두'는 유년 시절의 추억이다 file 차칸양(양재우) 2016.07.26 2592
2501 좋은 글은 객관성을 포착한다 file 연지원 2016.07.25 1528
2500 마흔아홉, 삶은 수련입니다 書元 2016.07.23 1485
2499 예순네번째 편지 - 1인 기업가 재키의 서른 즈음 재키제동 2016.07.22 1618
2498 불혹과 지천명에 도달하기까지 김용규 2016.07.22 3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