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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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처방전 –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
지난 주 아내의 글에 이어 남편인 제가 글을 씁니다.
부모와 자녀가 정치적인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저의 정치적 의견 간극이 아주 많이 벌어졌던 때가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던 2014년입니다. 아버지는 박근혜 정부를 두루 칭찬하셨습니다. 특히 당시 박근혜 씨가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해 밝힌 통일 포부를 예로 들며 정치를 괜찮게 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내심 많이 놀랐습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되면 안된다고 걱정하던 아버지가 불과 2년 사이에 박근혜 씨 팬이 됐습니다. 18대 대선 이전, 전쟁을 겪고 군사정부로부터 강력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라 이른바 ‘빨갱이’는 막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친구들을 걱정하던 아버지였습니다. 동창모임에 나가면 모두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박근혜 씨를 뽑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답니다. 아버지는 그런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답답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아버지의 태도가 변한 겁니다.
종편 방송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증언하길, 아버지께서 하루 종일 TV 앞에서 앉거나 누워서 종편 방송만 보셨답니다. 정치에 별 관심 없는 어머니가 ‘그 놈의 정치 타령’ 좀 그만 보라고 잔소리를 해도 아버지의 종편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답니다. 종편 방송은 실버세대를 자극하는 내용으로 일관합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종편 방송은 노동조합과 진보세력 때문에 사회가 어지럽다고 방송했습니다. 세월호 때문에 국가경제가 어렵다고 논평을 내놓던 때입니다. 고향집에 다녀올 때 마다 씁쓸했습니다. 수 십 년째 고향집 식탁 위에는 <동아일보>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선택한 삶의 방식입니다. 저희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015년 가을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가 대대적으로 불거진 때였습니다. 아버지와 안부 통화를 하다가 국정교과서 의견을 여쭤보았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고 2002년 초 퇴직하셨는데, 그 즈음 예전 동료 국사선생님을 만나 국정교과서 이야기를 나누셨나 봅니다.
“아버지! TV에서 국정교과서 이야기 들어 보셨죠? 아버지는 어떻게 보세요?”
“내가 그렇지 않아도 국사선생 만났을 때 물어봤지. 나라에서 국정교과서를 쓰겠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이야. 국사선생이 그러더만. 지금 학생들은 장차 통일시대에 살아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국정교과서는 통일시대를 담을 수 없는 내용으로 편찬되고 있다고 하더만.”
솔직히 고백합니다. 아버지 대답을 듣고 가슴을 쓸며 천만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종편 방송과 동아일보를 통해 제 부모님은 세상을 봅니다. 제 아무리 종편 방송이 아버지의 눈과 귀를 막더라도 역사교과서 문제는 아버지에게도 또 다른 파장이었나 봅니다.
부모님 댁에 저희 가족이 구독하는 <경향신문>을 보내 드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종편 방송과 <경향신문> 논조 차이를 비교하여 취사선택하길 바랐습니다. 아내도 흔쾌히 찬성했습니다. 2015년 10월부터 지금껏 저희 부부는 대전 부모님 댁으로 <경향신문>을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이듬해 설 명절에 고향에 갔을 때, 그동안 수 십 년째 받아 보던 <동아일보>를 끊었다고 하시더군요. 참 감사하게도 매일 아침 아버지와 어머니는 돋보기를 끼고서 아들 내외가 보내는 <경향신문>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2016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전 국민이 들어 올린 촛불은 온 나라를 밝혔고 이후 대한민국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만 돌이켜 봅니다. 신문을 통해 촛불혁명을 지켜보신 부모님도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내외가 보낸 <경향신문>은 저희 대가족 변화의 기점이 됐습니다.
매일 아침 아내가 신문을 보다가 맘에 드는 기사를 만나면 시어머니를 생각했답니다. 특히 페미니즘 기획과 워킹맘 관련 기사를 마주할 때면 시어머니께서 꼭 읽어 보셨으면 좋겠다고 바랐답니다.
“세상이 점점 좋아지는구나. 너는 좋은 세상에 살아서 좋겠다.”
“아유, 어머니! 아직 멀었어요.”
“그래. 더 좋아져 야지.”
어느 제삿날, 부모님 댁 부엌에서 제사 관련 기사를 두고 아내와 시어머니가 나눈 대화입니다. 같은 기사를 읽으면서 한 해 한 해 시어머니와 조금씩 더 잘 소통하게 됐다고 아내는 말합니다.
“성평등한 명절을 보내게 된 비법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같은 신문 구독하기를 꼽습니다. 부모 세대와 소통하기 어렵다면 부모님 댁에 신문 보내 드리기를 권합니다. 부모님께 직접 의견을 말씀드리기보다 관련 기사를 보여드리면서,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라고 질문해 보십시오. 처음엔 호통을 동반한 잔소리를 들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심이 통하는 날은 꼭 올 겁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아내가 쓴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
격주 월요일에 발송하는 마음을 나누는 편지 '가족처방전'은 필자와 독자가 함께 쓰는 편지입니다. 가족 관계가 맘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계시다면 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세요. 마음을 다해 고민하고 작성한 가족처방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유형선 드림 (morningstar.yoo@gmail.com)
친정 부모님 모습이 떠오르네요. 종편의 특정채널을 보시는 아버지와 그걸 옆에서 흘려듣는 어머니.
이젠 신문도 읽지 않으시는 연세가 되셔서 선배님의 방법은 안 먹히고...
양쪽 두부모님 모두 변화보다는 지금처럼만이라도 계셔주시면 감사한 연세이시네요.
다행인건 작년부터 오빠가 제사를 모시고 있고 올해 오빠가 결단을 내서 명절을 안지내게 됐다는 것과 시댁은 큰집이 아닌 관계로 제사가 없다는 거네요. ㅎㅎㅎ 그리고 무엇보다 멀지 않은 곳에 계셔서 양쪽집을 다 다녀와서 충분히 쉴 시간이 확보된다는 것이지요.
명절과 제사 문화가 많이 변한 건 사실인 것 같아요~ 현명한 두 선배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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