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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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날. 임시휴일이긴 하지만 엄연한 빨간날이었다. 나에게 빨간날은 늘상 늦잠을 자던 날이었고, 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서 아침겸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하고 마트로 장을 보러 가던 날이었다. 얼마 전 샐러리맨 생활을 접은 나에게 이제 더 이상 빨간날은 별 의미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도 않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일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날이었으며, 굳이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는 이유로 9시 10시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TV도 없고, 신문도 오지 않는 우리집에서는 오직 8시가 넘어도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아내를 통해서만 그날이 빨간날이라는 것을 느낄 수도 없었다.
한참 잠에 빠진 아내를 놔두고, 7시가 조금 못 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시휴일이었던 그 날은 나에게는 단지 조셉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과 만나는 날이었을 뿐이다. 그 외엔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무슨 심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평일 낮 시간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 다니는 다른 연구원들과 페어플레이를 하겠다는 생각에 대체로 직장인들이 근무하는 시간에는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은 임시휴일이기에 맘 편하게 하루 종일 조셉 캠벨에 올인 할 생각이었다.
그날 하루도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생각에 아침부터 서둘러 책을 집어 들었다. 변경연 2차 레이스가 끝나고 눈에 병이 났다. 치료를 하고 있으나, 쉽게 낫질 않는다. 책을 읽기 너무 힘들었다. 초점은 전혀 맞지 않고 약을 먹어 그런지 안 그래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을 몇 배 더 어렵게 만들었다. 원래도 남들보다 읽는 속도가 느린데다, 책이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 속도는 더 떨어지고, 거기다 눈까지 한 몫 해서 아주 제대로 정독을 해야만 했다. 30분이 넘어가면 이것도 힘들어, 아예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멀쩡한 눈으로 읽어야 했다. 제대로 읽힐 리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한 쪽은 멀쩡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내는 얼마 전 임신을 했다. 한 쪽방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해 아내가 방문을 빠끔히 열고는 머리를 들이민다. 그리고는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먹거리를 주문한다. 토스트는 반드시 동네 역 앞에서 파는 것이어야 하며, 두부는 기름에 지져 간장에 조려야 하는 등 구매 장소 및 조리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준다. 그러면 나는 또 책을 몇 페이지 읽다말고 주문받은 음식을 사다가 또는 만들어 대령한다. 임신을 하면 먹고 싶은 것이 많아지고, 뜬금없이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요청해 남편을 당황케 하는 장면은 TV에서 많이 본 장면이다. 나에게도 이제 그런 상황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 종일은 그렇게 책읽기와 임신한 몸으로 연구원 생활을 해야 하는 아내를 위한 먹거리 조달을 여러 번 반복한 날이었다.
이제 더 이상의 먹거리 요청은 없겠다 싶을 생각이 들 저녁에 다시 책상에 앉았다. 얼굴엔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내 인생이 참 많이 변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 모양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아닌, 이제야 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맞는 빨간날의 의미가 달라졌으며, 변경연의 연구원이 되어 쉬는 날을 몽땅 책읽기에 투자하고 있으며, TV에서만 보던 예비 아빠들의 즐거운 고난을 겪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기분 좋은 변화였다. 그리고 내가 만든 변화였다. 자신의 인생의 그 어떤 부분이 자신이 만든 것이 없겠냐마는, 눈 앞에 놓여진 몇 개의 객관식 답안을 선택해 만든 인생이 아닌 백지에 내가 새롭게 주관식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이 인생이 재미있었다. 앞으로 쓸 것이 얼마든지 더 있는데, 그러한 인생 속에서 살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더더욱 입이 벌어졌다.
나는 믿는 구석이 있다. 진짜 진짜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늘이 돕는다는 것. 그래서 난 이거 하나 믿고 매일매일 크고 작은 사고를 친다. 정말 하늘이 제대로 돕는지 안 그런지 잘 지켜보고 있다. 다행이 아직 성공률이 매우 높다. 조셉 캠벨이 말하기를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다시 만들어가고 있는 나의 삶이 천복을 따르는 삶인지 아닌지 한 번 지켜볼만 하다. 그저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잘 살 수 있는지 없는지 난 오늘도 실험중이다. 나는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일까?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에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중, 96p
IP *.34.17.31
한참 잠에 빠진 아내를 놔두고, 7시가 조금 못 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시휴일이었던 그 날은 나에게는 단지 조셉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과 만나는 날이었을 뿐이다. 그 외엔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무슨 심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평일 낮 시간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 다니는 다른 연구원들과 페어플레이를 하겠다는 생각에 대체로 직장인들이 근무하는 시간에는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은 임시휴일이기에 맘 편하게 하루 종일 조셉 캠벨에 올인 할 생각이었다.
그날 하루도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생각에 아침부터 서둘러 책을 집어 들었다. 변경연 2차 레이스가 끝나고 눈에 병이 났다. 치료를 하고 있으나, 쉽게 낫질 않는다. 책을 읽기 너무 힘들었다. 초점은 전혀 맞지 않고 약을 먹어 그런지 안 그래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을 몇 배 더 어렵게 만들었다. 원래도 남들보다 읽는 속도가 느린데다, 책이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 속도는 더 떨어지고, 거기다 눈까지 한 몫 해서 아주 제대로 정독을 해야만 했다. 30분이 넘어가면 이것도 힘들어, 아예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멀쩡한 눈으로 읽어야 했다. 제대로 읽힐 리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한 쪽은 멀쩡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내는 얼마 전 임신을 했다. 한 쪽방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해 아내가 방문을 빠끔히 열고는 머리를 들이민다. 그리고는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먹거리를 주문한다. 토스트는 반드시 동네 역 앞에서 파는 것이어야 하며, 두부는 기름에 지져 간장에 조려야 하는 등 구매 장소 및 조리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준다. 그러면 나는 또 책을 몇 페이지 읽다말고 주문받은 음식을 사다가 또는 만들어 대령한다. 임신을 하면 먹고 싶은 것이 많아지고, 뜬금없이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요청해 남편을 당황케 하는 장면은 TV에서 많이 본 장면이다. 나에게도 이제 그런 상황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 종일은 그렇게 책읽기와 임신한 몸으로 연구원 생활을 해야 하는 아내를 위한 먹거리 조달을 여러 번 반복한 날이었다.
이제 더 이상의 먹거리 요청은 없겠다 싶을 생각이 들 저녁에 다시 책상에 앉았다. 얼굴엔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내 인생이 참 많이 변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 모양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아닌, 이제야 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맞는 빨간날의 의미가 달라졌으며, 변경연의 연구원이 되어 쉬는 날을 몽땅 책읽기에 투자하고 있으며, TV에서만 보던 예비 아빠들의 즐거운 고난을 겪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기분 좋은 변화였다. 그리고 내가 만든 변화였다. 자신의 인생의 그 어떤 부분이 자신이 만든 것이 없겠냐마는, 눈 앞에 놓여진 몇 개의 객관식 답안을 선택해 만든 인생이 아닌 백지에 내가 새롭게 주관식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이 인생이 재미있었다. 앞으로 쓸 것이 얼마든지 더 있는데, 그러한 인생 속에서 살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더더욱 입이 벌어졌다.
나는 믿는 구석이 있다. 진짜 진짜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늘이 돕는다는 것. 그래서 난 이거 하나 믿고 매일매일 크고 작은 사고를 친다. 정말 하늘이 제대로 돕는지 안 그런지 잘 지켜보고 있다. 다행이 아직 성공률이 매우 높다. 조셉 캠벨이 말하기를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다시 만들어가고 있는 나의 삶이 천복을 따르는 삶인지 아닌지 한 번 지켜볼만 하다. 그저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잘 살 수 있는지 없는지 난 오늘도 실험중이다. 나는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일까?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에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중, 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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