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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7일 00시 42분 등록
초등학교 2학년.
달동네 삼양동을 뒤로하고, 새로운 ‘연희동’ 시대가 열렸다. ‘시대’라고 명명하는 것은 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주부들의 꿈이라는 부모님의 생애 첫 ‘내 집’이기도 했다. 10평 남루한 시민(?) 아파트였지만, 신촌과 홍대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달동네였다. 7월 태풍이 들이닥치는 시절이면, 우리 집은 물난리 걱정 없다며 웃으시는 아버님의 미소가 떠오른다. .

첫 연희동 입성(入城)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기득권을 소유하고 있던 기존의 아이들은 호락호락하게 자신들의 무리에 나를 끼어주지 않았다.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사무라이와 같이 그들만의 제례의식을 통과해야 했다. 그 첫 관문은 동년배 녀석들과의 맞장(!)이라는 통과의례였다.

내향적 성격인 나에게 누군가와 대적한다는 것은 두렵기 그지 없었다. 주먹에 소질이 없는 아이에게 맞장은 무릇 무림의 강호(江湖)와 대적해야 하는 스산함을 느꼈다. 어린 아이들 싸움에서 가장 빠르게 이기는 방법은 ‘피’를 보는 것이다. 코피를 내든, 입술을 터트리든지, 아니면 울게 하거나.

실전에서 내 주먹은 의외로 빨랐다. 행동은 민첩했다. 생존의 비장함을 느꼈던지, 예상을 벗어나는 속도를 보였다. 그러나 실망스럽게 주먹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았다. 바로 격투기 프라이드의 그라운드로 상태로 돌입했다. 설상가상으로 여름 소나기가 대지를 적셨다. 정말 진흙탕 속 개싸움이었다. 다행히 상대 동년배가 울어버리고 말았다. 연희동 무림파 입성에 성공한 것이다.

입성에 성공한 이후, 아이들과 함께 노는 공간은 주로 ‘산’(山)이었다. 동네 뒷산은 우리들에게 환상적인 디즈니랜드였으며, 비용이 들지 않는 무한놀이터였다. 공부는 뒷전이었으며, 코흘리개 몰골로 밤늦은 시간까지 싸돌아 다녔다.

지리적 여건은 서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 아이들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경험했다. 뒤로는 아담한 산이 있었고, 앞으로는 ‘들’이 있었다. 실제 ‘들’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호박을 비롯한 야채들을 기르는 비탈진 공간이 넓게 있었다. 아카시아 향이 산을 뒤덮을 때면, 아카시아 꽃잎들은 우리들의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매혹적인 음식이었다. 탐스러운 산딸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설탕과 함께 비벼 먹으면, 최상의 아이스크림이었다.

붉은 석양이 하늘을 물들일 때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마른 장작으로 불장난을 하였다. 가끔은 메뚜기, 참새와 같은 보양식과 서리한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먹었다. 자치기, 망까기, 연날리기, 딱지치기, 제기차기, 오징어, 짬뽕, 전쟁놀이, 숨바꼭질, 다방구, 쥐불놀이. 놀이의 종류도 다양했던 것 같다. 가진 것도 없고, 그 흔한 장난감 하나 없었지만, 하루 하루가 새로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아무튼 정말 열심히 놀았다.
그러나 동네 이웃집 사정은 열악했다. 아이들은 범죄와 비행에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었다. 부모들의 대부분은 저소득 계층이었으며, 결손 가정이 빈번했다. 으슥한 공간에는 일부 아이들이 사용했던 ‘본드’, ‘부탄가스’가 널려 있곤 했다. 돌아갈 따뜻한 가정이 없는 외로운 아이들에게 본드와 부탄가스는 값싼 유흥수단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놀이감들에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연희동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 중에 하나일 것이다. 우리나라를 이끄는 훌륭한(?) 왕을 그것도 두 번이나 배출한 명당(?)이기 때문이다. 연희동이라는 동네는 참 재미있는 곳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는 곳이 연희동이라고 하면 ‘우~와’하면서 탄성을 지르곤 한다. 내가 사는 곳은 ‘부유한 사람들의 왕국’으로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연희동이라는 동네는 빈부의 격차가 가장 큰 곳이다. 최고의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면서도, 권력으로부터 소외받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 하층 서민들이 사는 야누스적인 공간이었다.

나는 다행스럽게(?) 후자의 입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반 아이들 사이에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경제적 수준의 차이를 보였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슬프고도 재밌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같은 반 여자아이 생일에 초대받았다. 그 여자아이는 반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였다. 여느 아이들하고는 다른 외모와 태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부르주아가 가지고 있는 부유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일파티에 초대된 나는 선물을 사기 위해 고심고심 했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어머님께서는 쌈지돈을 꺼내 주셨다. 선물 종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쁘게 포장까지 해서 가져갔던 것으로 안다.

초대받은 집은 거대한 궁궐 같았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담장은 거대한 성벽 같았다. 그 당시 내가 동네 친구들을 불러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문 앞에서 가서 “개똥아~ 놀자!”라고 부르면, 함께 놀 수 있을지 없을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를 필요도 없었다. 아니 초인종 누르는 것을 몰랐다. 당연히 내 방식으로 그 여자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빨리 나오라고. 그러나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문과 집 안채 사이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들릴 턱이 없었다. 한참을 “OO야~, OO야~”를 외치다가, 힘없이 고개 떨구고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바보처럼 말이다. 30여 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 무척 서운했던 잔상으로 남아있다.

다음 날, 생일파티에 초대된 아이들은 왁자지껄 어제 탐식햇던 진기한 음식과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제 왜 안왔니?”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밖에서 수없이 네 이름을 외치고 돌아갔다고. 그냥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난 그 이후로 부잣집 아이들 생일파티에 가지 않았다.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에 어린 나이였지만, 부모의 직업과 재산에 따라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함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무튼 유년시절은 연희동 시대와 함께 흘러갔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유년시절의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작업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지나온 과거가 행복하게 채색되어 나타난다. 시간은 과거를 아름답게 덧칠하는 습관이 있다. 누구나 이런 행복한 수채화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유년시절 그림은 어떠한가?

IP *.179.6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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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27 20:50:12 *.36.210.11
ㅎㅎㅎ 연희동 시대라. 영화 제목 같네.

님이 가깝고도 먼 곳에 있었구먼. 그러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그랬어.

왕이 되어 깜짝 나타나려고 했었을까? 나, 거암이거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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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7.28 11:30:50 *.244.220.254
큰일 났네요!
누님께서 '님은 먼곳에'에 단단히 필(!) 받으신 것 같은데.........
혹시 님(!) 찾아 어디론가 멀리 떠나시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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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07.28 11:34:03 *.117.68.202
ㅎㅎㅎ 어울린다.^^

내 유년시절과 비슷하군.
다만 좀 다른 것은 난 온통 산으로 둘러쌓였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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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8 12:41:47 *.64.21.2
저 옆집에서 짬밥 운운하던 게 이 인간이군.
주먹좀 썼다 이거지.
일단 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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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칸양
2008.07.28 14:04:11 *.122.143.151
너무 가슴아파서 눈물이 핑 돈다...

그 어린 것이,
부푼 가슴을 안고 선물까지 이쁘게 포장해서 찾아갔건만,
목이 터져라하고 불러도 대답없는 메아리에 힘이 빠져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서는 그 공허한 어깨에
자본주의에 적응치 못한 설움이 북받친다...

얼마나 서러웠겠니,
얼마나 아팠겠니,
두 눈 위를 덮고 쏟아져 내리는 눈물 속에,
얼마나 서운했겠니...

이해한다..
그리고 세월의 잔상 속에 아직도 그 기억이 남아 있음을,
이해한다.. 아프지만 더욱 더 이해된다..

하지만
이제는 훌훌 털어버려라...
더 이상의 발목잡힘은 거암에게 득이 될 게 없다..
거암에겐 거암의 길이 있는 법,
스스로 솟구쳐 과감히 일어나라.
너의 앞에 펼쳐친 길을 뛰어라, 죽자사자 뛰어라...
거암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믿는다..
거암이니까...

덧붙임)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정말 초인종이 있는 걸 몰랐니?
초인종이 뭔지를 몰랐니? 정말? 정말루?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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