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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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서원에서 묻다
문인수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 이쯤에서 그만 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 저것 캐묻는다.
찔레 덤불이 겹겹 앞을 가로 막으며 못 들어가게 한다.
돌아서고 싶을까. 찔레 가시에 찔리며 억지로 들어선 마당, 그리고 뒤꼍.
풀대들, 풀떼며 잡목들이 불학무식하다. 공부하고 싶을까. 작은 마루에 방 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까.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줄을 쳐, 토종 강냉이 수십 다발을 주렁주렁 널어두었다.
산새 부리들, 들쥐 다람쥐 청설모… 잇자국들이 대를 이어 상세하다.
이 빠진 세월은 또 얼마나 길까. 누군가 버리고 간 한 무더기 세로쓰기 책들,
대강 넘겨보니 사법고시 준비를 한 것 같다. 그리고 취사도구 몇 잘살까.
거미줄이며 먼지가 이렇게 힘세다. 작파했을까.
이 방 저 방 마구 부서져 널려 있는 것들 중에 격자무늬문짝 몇 개가 그나마 그래도 쓸 만하다. 사방, 닫아걸고 싶을까.
마당을 다시 잘 살펴보니 풀숲에 작은 웅덩이 흔적이 두 군데, 이쪽저쪽 숨어있다.
썩은 꺾꽂이 같은 세월, 깜깜 눈감고 싶을까.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과거지사란 남몰래 버티는 것, 대답하지 않는다.
문인수 시집, 『배꼽』,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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