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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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30일,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친구인 수녀님으로부터 남편을 소개받던 날이었습니다. 소개팅(?)인지 모르고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 봤던 남편의 두꺼운 뿔테안경과 곱슬곱슬 머리카락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뭐 그때야 11년이나 알고 지내게 (?)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요.
어느덧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2년 연애 후 결혼도 하고, 지금은 아이도 키우고 있습니다. 혈연이 아닌 한 사람과 함께 살아온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는 단순히 공유된 시간이 아닌, 상대방과 함께 써 내려가는 '삶의 기록'이 아닌가 싶습니다. 낯설고 어색했던 첫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넘도록 함께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시기별로 조금 나눠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오랫동안 유학 생활을 했던 남편과 결혼하고서야 부모님에게서 독립한 저 사이의 생활 방식을 맞춰가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일로 토라져서 며칠 말을 안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다른 입맛 사이에서 저녁 메뉴를 타협해야 하는 것도 중대한 어젠다였습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저는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합니다.) 이는 서로에게 ‘적응’해 가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탐색’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서로의 성향을 알아가고, 관심사나 가치를 공유하게 되면서 점차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같이 세계의 여러 나라를 구경한 일, 서로가 졸업한 학교를 다녀온 일, 좋아하는 작가의 생가나 묘지를 방문한 일, 새로 나온 게임을 함께 끝까지 깬 일, 전 세계 디즈니랜드 중 세 군데를 함께 탐방했던 일, 갓 태어난 새끼 거북이를 바다에 돌려준 일 등은 함께 즐길만한 취미를 찾아 깊게 빠져들었던 즐거운 기억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이 자연스럽게 체득되었고, 대화의 깊이도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그 후로, 시간이 더 지나면서 ‘신뢰’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 보일 용기가 생기고, 그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사라집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배려하려는 노력이 생기며, 서로에 대한 의지와 신뢰가 강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갈등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해결하고 극복하려는 자세가 더 견고해집니다. 특히 삼십 대 초반이었던 이 시기에는 각자의 직장 생활과 문화를 이해해 줘야 했고, 또 제가 책을 쓴다고 과거의 힘들었던 일들을 다시 꺼내봐야 할 때에 용기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직을 할 때, 팀을 옮길 때, 가족 간의 대소사를 챙길 때 많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저희는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형제처럼, 그리고 때로는 부모처럼 서로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래도 저희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선택을 함께 정하면서 지금까지 온 것 같습니다.
결혼 전에는 이런 과정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노력과 상대의 노력을 인정하고 고마워하며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십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어진 관계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아주 길고, 깊은 관계를 체험해 본 것이 참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또 이 관계가 저에게 많은 의미와 가치를 주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 와하고 신뢰를 쌓으려고 노력하고, 또 그 노력을 되돌려주려고도 하면서 서로를 지지하고 성장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느끼기에, 결혼을 하고 나서 저는 몇 가지 그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점을 몇 가지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일단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되었다는 것이 느껴지고, 제 과거를 돌아볼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자신을 성장시킬 기반을 마련한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제가 남몰래 원했던 것들에 도전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으며, 저 이외의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법을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11년이란 시간은 정말 바쁘고, 다양한 색깔의 유리조각들을 모자이크로 만든 멋진 스테인드글라스같이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앞으로의 11년에는 무슨 일이 펼쳐질까요? 또 올해 태어난 아이와는 어떤 가족이 될까요?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남편, 아이와 함께 뒤섞이며 새로이 제가 있을 곳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제 앞에 놓인 새로운 십 년의 즐거운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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