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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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46 - 7일간의 만남 - 프롤로그
4월은 잔인한 달, 바람이 세차게 부는 어느 날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의 입학식이 있었다. 그동안 치열하게 책을 읽고 글을 써내고 만만치 않게 심신을 단련시킨 후 드디어 연구원이 되었고 선배 연구원들과의 상견례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선배들 앞에서 나를 죽여 새로운 미래를 얻는 통과의례를 해야 했다. 매사에 지나치게 진지한 나는 아직 마음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죽기 싫다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선생님은 아직 우리가 만날 때가 되지 않은 것 같다며, 스스로 기뻐 이곳으로 춤추듯 걸어 들어온 나와의 인연을 모질게 끊으려 했다. 그날, 나는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다.
연구원 생활은 나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건지 스스로 묻고 또 물어 자기의 나아갈 곳을 찾는 것이 우리 수업의 목적이었다. 50권의 책을 리뷰하고 50 꼭지의 칼럼을 써 내려감으로써 생각과 말을 일치시키는 그 지점에 글다운 글이 있어야 했다. 선생님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글을 보는 것에서 보람을 찾는다. 다만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불꽃이 사그러들려고 하는 그 순간에 부지깽이로 한번 불씨를 뒤적여 준다. 다시 불꽃을 살려 활활 타오를 것인지 불씨가 힘을 잃어 영영 스러져버릴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때에는 우주의 인연이 작용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배경 위에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그림과 같다. 무사히 1년의 과정을 끝내고 이제 나의 책을 나의 힘으로 세상에 내 보내야 한다. 불꽃은 꽃을 불러 일으켜 활짝 피어나고 또 열매를 맺어 세상에 공헌하는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성과물과 함께 홀로 길을 떠나도 좋은 졸업장을 받고 정식 연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1년은 책에 살고 책에 우는 그런 시간이 되어야 한다. 어찌 목적이 책이겠는가? 단지 영혼을 담아 세상과 소통을 하는 도구로서의 책의 역할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두해 전 이맘 때 흥겨운 잔치가 끝날 무렵, 사람들을 배웅하러 일어서던 남편이 넋을 놓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내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그 일을 마음깊이 묻어놓고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홀로 나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씩씩하게 버티는 나를 칭찬하고 있을 여유도 없이 장례식의 모습으로 내게 밀려온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밀어내 한낮의 쨍쨍한 볕 아래 세웠다. 나는 장렬하게 죽었다. 아니 나답게 죽어갔다. 그렇게 나를 죽여 보니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던 기억들이 섬세하게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야 통로를 발견한 것처럼 모든 옛 이야기들이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달 밝은 밤에는 더 극성스럽게 나를 이끌어내 뒤흔들고 , 비오는 밤에는 애원하다시피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나는 질기고 질긴 동앗줄을 끊고 드디어 나를 해방시켰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존재 이유인 자유를 한껏 누리리라.
어릴 때 나의 별명은 울보였다. 한번 놀림을 받아 마음을 상하면 아침부터 밤까지 울었다. 고장난 수도꼭지 처럼 잘도잘도 울었다. 울면서 나는 점점 강해져 갔다. 어느날 사람들 앞에서 다시는 눈물을 보이지 않겠노라는 맹세를 하고 난 후로 악다구니가 되어 울음을 울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이 이상하게 변해 갔다. 달과 별을 노래하고 꽃과 풀을 아끼던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왜 이렇게 긴장하고 사는지 모르게 완벽주의자 처럼 기계인간 처럼 변화해 갔다.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았다. 사랑을 하고 결혼도 하고 여러 나라를 다니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제는 조금 일찍 평화로운 노후를 즐길 일만 남았을 때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았다.
나는 눈먼 말처럼 운명이 이끄는데로 그냥 끌려갔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끌려갔다. 몸도 마음도 이런 일이 내게 닥쳐올 것이라는 예측을 전혀 못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서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다. 무슨 일을 어디서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사람대신 기계가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저녁 단 30분 허용된 면회시간에 겨우 닫혔던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남편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나는 그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아내일텐데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 그는 단지 중환자일 뿐이었고 나는 제 1 보호자일 따름이었다. 아쉬운 면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나를 위로한 단 한권의 책 “티벳 사자의 서” 를 읽고 또 읽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렀고 남편이 일반 병실로 옮겨 병원생활이 길어지자 나는 저녁시간에 잠시 음악회를 다녀왔다. 아들과 바톤을 텃치하는 시간을 조금 넘겨서 돌아왔을 때, 걱정이 되어서 살그머니 병실 문을 열었더니 그가 마치 봄에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연애를 할 때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황홀함이었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그런 장면이 연출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날, 남편은 정말 아름답게 웃어주었고 그의 얼굴은 봄날의 함박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지금은 그가 내게 최고의 선물을 남겨 주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알 것 같아서 행복하고 또 고맙다. 우리가 평생 맹렬하게 싸우면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맺음을 잘 한 것 같다. 착한 그의 덕이다.
글을 쓰면서 국회도서관 208호, 신간 서적을 비치해 둔 방에서 자료를 많이 구해 읽었다. 208호의 책들이 반은 삶을 이야기하고 반은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소설책은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넌픽션을 주로 읽었다. 철학서와 명상에 관한 책이 많았다. 구체적인 죽음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책도 있었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전해주는 책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어빈 얄롬의 “보다 냉정하게 보다 용기있게”라는 책이 조금 더 과감하게 나를 노출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집단 정신치료의 대가인 얄롬은 죽음을 주제로 한 워크샵에서 솔직하게 죽음을 마주하는 것을 가르친다. 죽음을 동등하게 마주 바라본다는 것은 마치 태양을 쳐다보는 것처럼 위험하지만 분명히 죽음은 공기처럼 가깝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불안감은 사실, 개인의 "살아지지 않은 인생"의 길이와 직접적으로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진정 자기의 인생을 풍요롭게 살았고 자기의 잠재능력과 운명을 충분히 실현한 사람들은 죽음에 직면할 때 덜 두려워하게 된다.
이 책은 오랜 친구가 죽어갈 때 7일 동안 정성껏 그 곁을 지켜준 선사의 이야기를 따라 “7일 동안의 만남”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만나고 헤어질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 인간사에 사랑하는 이의 무덤 앞에 와서 뼈저린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말자고 노래한 리스트의 “사랑의 꿈”에서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를 부제로 곁들였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 곧 이별이 닥쳐오리니 그의 무덤가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이미 그는 사랑하던 너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단다."
상실을 애도하는 작업과 사후 생에 대한 내용은 이 책에서는 다루지 못했다. 조금 아쉽지만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본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조각 인것을 우리는 이미 들어 알고 있지만 큰 슬픔이 지나간 뒤에야 겨우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성이 이해한 죽음을 감성이 받아들이는 그 길은 참 멀고도 먼 여행길이다. 세상이 온통 바쁘게 돌아가고 큰 톱니에 물린 작은 톱니처럼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내가 처한 자리이지만 부디 깨어나서 어제 죽은 사람이 가장 부러워하는 오늘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보자. 내가 나를 살펴 몸과 마음이 서로 돕지 않으면 어찌 온전한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생명의 환희을 노래하며 하루를 마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이 그 첫 운을 떼는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잠시나마 말씀나누게 되어서 반가왔습니다. 발표하시는데, 약간 눈물이 날것 같은거 표정관리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참, 한가지 책 추천 드릴려구요.
<How we die> 라는 책인데요, 국내 번역본도 나와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죽는가>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40여 년간 의사로서 활동한 저자가 수많은 환자와 가족들이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한 기록을 담은 책인데요, 죽음의 과정과 의미가 담겨 있으며, 죽음 앞에서 가져야 할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할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답니다. 제 미천한 경험에 의하면, 책을 지인들에게 추천해주면, 93%정도 성공율을 보이고 있습니다용^^ 선생님께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