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 조회 수 3152
- 댓글 수 10
- 추천 수 0
동청冬靑이라는 나무가 있다.
동청(冬靑, 겨우살이)이라는 나무가 있다. 겨울에도 푸른 빛을 지니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계절 푸르고 사계절 있지만, 사람들 눈에는 겨울에만 푸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이 나무에 관심을 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가지를 우려 차로 내려 마시면 항암효과가 있다는 ‘동의보감’의 한 구절이 무슨 성경구절이나 되듯이 하고, 제법 사람발길 닿는 등산로 입구면 빼놓지 않고 파는 약재가 되어버렸다. 그 덕분에 ‘겨우살이’ 이야기를 하면 이제 제법 알아듣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겨우살이의 비밀이 있다.
모든 나무가 그렇지만 겨우살이 또한 뿌리도 있고, 가지도 있고,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다만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땅 속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다른 나무의 줄기 속에다 뿌리를 박는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기생식물’이다. 물론 제 힘으로 광합성을 하기도 하지만, 영양분의 대부분을 숙주가 되는 나무에게 의존하고 산다. 겨울산을 좋아하는 이들이 참나무 높은 가지 위에 마치 까치집처럼 자리하고 있는 그를 기억하는 이유다. 그런데 이 흔한 겨우살이에 무슨 비밀이라니.
겨우살이가 자식을 번식시키는 방법이 남다르다. 흔히 씨앗을 바람에 날리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나 동물의 깃털에 묻어 멀리까지 떠나보내는 것도 아니다. 통째로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잘 익은 겨우살이의 열매는 새들이 좋아하는 노오란 빛깔로 화려한 변신을 한다.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배가 고픈 겨울새들에게 달착지근한 그맛만한 유혹이 없을 것이다. 성찬을 치루고 나면, 새는 기운을 얻고 창공을 날아 다른 나무로 옮겨 간다. 먹었으면 싸는 것이 이치다. 또한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먹었으면 값을 치러야 한다. 새가 응가를 한다. 그 응가 속에 소화되지 않은 겨우살이의 씨앗이 묻어 나온다. 끈적한 새의 응가가 묻은 씨앗은 다른 나무의 빈틈에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기 시작한다. 겨우살이의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뺏고, 당한 것도 아닌 공평한 거래다. 서로가 필요한 것을 얻었고, 서로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었다. 이 합리적인 거래는 아주 오랜 세월을 계속되어 왔다. 거래장부가 없이도 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고객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았고, 또한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잘 알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보는 눈이 있고, 먹는 입이 있고, 나는 날개가 있고, 기억을 하는 뇌를 가진 새들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겨우살이는 어떻게 새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까. 그들이 무슨 색깔과 무슨 맛을 좋아하는지를 어찌 알았을까. 그들의 위장에서 분비되는 소화액의 성분을 어찌 알았을까. 씨앗의 과육은 녹고, 씨앗 자체는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새의 소화액에도 녹지 않는 성분으로 코팅을 해야 할 줄은 또 어찌 알았을까.
비단 겨우살이뿐이 아니다. 세상은 우리가 인식하는 방법 말고도 엄연히 다르게 인식하는 방식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한다. 그들이 생산해내는 과육을 식량삼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효소로 약을 짓는다. 그들의 생명활동에 의지하고 살며, 그들과 함께 더불어 공존해왔다. 자연의 현상이 인간의 인식밖에 두려움으로 존재하던 시절에는 ‘신’의 이름을 빌어 경배와 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권위는 점차 쇠락해 가고, 우리는 ‘과학’의 힘을 통해 힘을 강조하는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종교의 창조신화는 자연 만물은 신이 인간을 위해 마련해 둔 선물이라고 하고, 따라서 그 자체의 존재의미보다는 인간에 의해 쓰여질 때만 가치가 부여되는 논리로 악용되기도 한다.
숲 속의 버섯은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으로 구분되고, 닭과 돼지는 잔칫날 풍성한 식탁 위에 오르기 위해 세상에 존재한지 오래되었다. 아이들은 모기는 해충이고, 모기를 잡아먹는 거미는 익충으로 기억한다. 고로쇠의 수액은 건강에 다시없고, 헛개나무를 우려낸 물은 술에 쩔은 간에 그만이다. 정력에 좋다는 웅담을 찾아 중국의 광쩌우를 찾는 발걸음들이 여전하다.
내가 지금 들이 마시고 있는 공기는 도시의 가로수들의 노고의 결과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내가 탄 차에서 나오는 온실가스는 북극의 빙하를 녹이고, 북극곰은 쉴 자리를 잃고 익사하고 만다. 아직 쓸만한 휴대폰이지만, 유행따라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고 싶은 욕망에 늘어나는 휴대폰 수만큼 아프리카 고릴라들이 줄고 있다. 더러는 사라져가는 벌들의 행방불명이 각종 전자기기들이 품어내는 전자파 때문이라는 우려도 있다.
눈 덮인 겨울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모진 겨울바람을 이겨내는 성자같이 기억되기도 하고,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앵글 속에 담기도 한다. 건강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모질게 견뎌내는 힘에 경탄할 따름이고, 돈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가지 끝까지 톱을 뻗어 올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을 뿐이다. 저마다 필요에 따라 겨우살이를 기억하고, 그의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겨우살이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뿐이다.
백년 쯤 후에도 우리는 겨울산에서 눈을 볼 수 있을까? 그 눈과 함께 푸른 빛깔로 살아가는 겨우살이를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