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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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을의 끝자락에서
낙엽
바람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
흐느적
너울대며 날리는 손수건
햇볕이
시들어 뒹구는 거리
귓불을 스쳐가던
스산한 입김
그래,
그것이 이별이었구나
햇볕 좋은 가을 오후 한 자락이 아쉬워 이름도 없는 작은 공원의 벤치에 기대어 앉았다. 여느 일상처럼 바쁜 도시의 수선스러움 속에서도 마흔 세 살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지난 해에도 또 그 이전에도 있었던 11월이었고, 해마다 이 시절이면 만나는 이별들이 단풍이 든 낙엽들이었다. 그다지 유난스럽지 않은 바람에도 지난 여름을 뜨겁게 살았던 열정의 추억들이 부서져 내린다. 너울너울 시간이 멎은 듯이 허공을 가르고 내려앉는 여윈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헤어지는 연인의 손수건 같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공원의 산책로 바닥. 그렇지만 그것도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시간이 다한 후에 식어가던 열정과 싸늘해져 가던 눈길처럼 이제는 바람도 스산해지기 시작한다. 싫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좀 더 붙잡고 싶어 몸부림을 쳤지만 그것은 분명 이별이었다.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나는 수많은 이별들을 만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마흔 세 살의 가을에게도 이별의 시를 적어 보내고 있다.
욕심 많은 은행나무가 제 몸 가득히 햇볕을 품어 안았다. 한참 젊던 여름나절에는 보지 못했던 황금색 삶이 그가 비로소 원래부터 은행나무였음을 말해줄 뿐이다. 훈장 같다. 이 회색의 도시 한복판에서 쉽게 굴복하지 않고 또 한 마디를 살아낸 그에게 수여된 훈장처럼 빛이 난다. 두 다리를 쭈욱 뻗고 앉은 벤치의 나에게도 햇볕이 쏟아져 내린다. 나른한 시간이다. 몸과 마음을 온통 불살라 한 시절을 살아온 나에게 쏟아지는 찬사 같다. 그래. 지금 나는 쉬어야 한다. 내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훈장도 찬사도 다 떨어버려야 한다. 오로지 맨몸뚱이로 사색의 시간을 준비하는 은행나무를 보고서 그가 천년을 거뜬히 살아내는 지혜를 지닌 족속임을 생각한다. 그의 품이 샘나도록 따뜻해 보인다.
가는 실눈을 하고서야 머리 위로 누렇게 시들어가는 것이 산수유 임을 알았다. 문득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다. 지겹도록 힘들게 마흔을 살아낸 누이. 그녀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하고, 묻어둔 사연들은 내 가슴이 먼저 알았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심장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산수유 열매가 누이의 눈물처럼 붉다.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나는 그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