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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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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2일 11시 45분 등록

[칼럼] 가을의 끝자락에서

 

낙엽

바람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

흐느적
너울대며 날리는 손수건

햇볕이
시들어 뒹구는 거리

귓불을 스쳐가던
스산한 입김

그래,
그것이 이별이었구나

 

햇볕 좋은 가을 오후 한 자락이 아쉬워 이름도 없는 작은 공원의 벤치에 기대어 앉았다. 여느 일상처럼 바쁜 도시의 수선스러움 속에서도 마흔 세 살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지난 해에도 또 그 이전에도 있었던 11월이었고, 해마다 이 시절이면 만나는 이별들이 단풍이 든 낙엽들이었다. 그다지 유난스럽지 않은 바람에도 지난 여름을 뜨겁게 살았던 열정의 추억들이 부서져 내린다. 너울너울 시간이 멎은 듯이 허공을 가르고 내려앉는 여윈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헤어지는 연인의 손수건 같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공원의 산책로 바닥. 그렇지만 그것도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시간이 다한 후에 식어가던 열정과 싸늘해져 가던 눈길처럼 이제는 바람도 스산해지기 시작한다. 싫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좀 더 붙잡고 싶어 몸부림을 쳤지만 그것은 분명 이별이었다.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나는 수많은 이별들을 만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마흔 세 살의 가을에게도 이별의 시를 적어 보내고 있다.

 

욕심 많은 은행나무가 제 몸 가득히 햇볕을 품어 안았다. 한참 젊던 여름나절에는 보지 못했던 황금색 삶이 그가 비로소 원래부터 은행나무였음을 말해줄 뿐이다. 훈장 같다. 이 회색의 도시 한복판에서 쉽게 굴복하지 않고 또 한 마디를 살아낸 그에게 수여된 훈장처럼 빛이 난다. 두 다리를 쭈욱 뻗고 앉은 벤치의 나에게도 햇볕이 쏟아져 내린다. 나른한 시간이다. 몸과 마음을 온통 불살라 한 시절을 살아온 나에게 쏟아지는 찬사 같다. 그래. 지금 나는 쉬어야 한다. 내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훈장도 찬사도 다 떨어버려야 한다. 오로지 맨몸뚱이로 사색의 시간을 준비하는 은행나무를 보고서 그가 천년을 거뜬히 살아내는 지혜를 지닌 족속임을 생각한다. 그의 품이 샘나도록 따뜻해 보인다.

 

가는 실눈을 하고서야 머리 위로 누렇게 시들어가는 것이 산수유 임을 알았다. 문득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다. 지겹도록 힘들게 마흔을 살아낸 누이. 그녀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하고, 묻어둔 사연들은 내 가슴이 먼저 알았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심장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산수유 열매가 누이의 눈물처럼 붉다.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나는 그리워하고 있다.

IP *.186.57.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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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2010.11.22 12:18:21 *.203.200.146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이별을 만나고, 은행나무의 천년살이 지혜를 만나고, 그리운 이를 만나고....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을 예고하는 것이죠.
졸업이 끝이 아니듯.
지나온 따스한 봄과 여름을 그리워 하듯
가을의 끝자락에서
겨울을 지나 나시 올 봄과 여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어울어져 따스해지는 글입니다.
오빠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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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11.25 13:31:09 *.105.115.207
연주야..근데.. 왜 나는 점점 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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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11.22 13:07:28 *.42.252.67
내 의견을 깊이는 생각지 말지만 나 역시 한 사람의 독자가 될 수 있잖아.
그러니 내가 말한 자장면에 단무지를 잘 생각해 봐.
 자연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거기에 맞는 시 한편.
너에게 시가 빠진다는 것은 단무지 없는 자장면이다.
아 ! 생각만해도 자장면이 목에 걸린다.^^
오늘의 글에는 자장면도 있고 단무지도 있어 참 부드럽게 넘어간다.
나는 참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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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11.25 13:30:04 *.105.115.207
짜장면에 단무지.. 김밥에 초장.. 고구마에 김치.. 두부에 막걸리..
술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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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11.22 13:47:09 *.10.44.47
아~! 그 시가 만들어진 배경이 이런 것이었군요.  ^^
비슷한 듯 하지만 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시는 특히 더 재미있어요. 
시를 먼저 싣고, 그래서 독자 나름의 세계를 만들게 한 후
그 시를 산문으로 번역해 놓으면, 참 신선할 것 같아요.

같은 대상이 이렇게나 다르게, 혹은 같게 해석되는구나! 하는 경험적 깨달음까지 줄 수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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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11.25 12:55:32 *.105.115.207
해설이 먼저 달리고.. 시가 실리면..시가 싱거워지겠지?
신비감도 없고.. 그래.. 시가 먼저 실려야 하는 이유가 ...
해설도 적당해야.. 겠지? 너무 발가벗겨 놓으면.. 하고 싶은 맘도 없을테니.
조명도 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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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11.22 14:19:13 *.30.254.21

와우
아좋다
부드럽다.
자연스럽다.
진철이스럽다.
노래가생각난다.
그럼애기끝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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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11.25 12:51:54 *.105.115.207
형, 이걸로는 약해... 이런 글로는 밥먹고 살기는 힘들지 않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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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11.23 09:12:05 *.123.110.13
어, 미옥 읽고, 형 글 읽는데, 왜들 약속이나 한듯이, 짧지요? 

형, 제 마음이 여유가 없나봐요. 시가 안읽혀지네요. 

산문은 읽혀집니다. 벤치에서 가을을 만끽하는 형의 모습. 눈에 선하네요. 모자와 수염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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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11.25 12:50:49 *.105.115.207
ㅎㅎ 신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지..
그 뿐인줄 알아? 집에 가면 마눌님의 부러움도... 한 몸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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