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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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눈이다. 한 송이가 떨어져 코 끝에서 작렬하더니 이마에 난 솜털을 덮고 이윽고 세상은 검정 하늘에 새하얀 백사장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버스정류장에 면한 재래시장을 지나 언덕 초입의 중학교를 끼고 770미터의 오르막과 백 한 개의 계단으로 통한다. 코스를 마쳤다고 방심하면 곤란하다. 이웃집 똥개의 구성진 목소리로 귀가 도장 세 개를 받아야 한다. 컹. 컹. 컹.
담배가게는 오르막길 중간 지점에 있다. 길 너머로 바깥 풍경을 보며 멍 때리는 주인 아저씨가 보인다. 그를 눈 여겨 본 이후(별 다른 뜻은 없다. 군침이 돌만한 피는 아니다), 초점이 맞춰진 그의 눈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한 번은 그의 눈빛이 향하는 꼭지점을 찾아 뒷걸음을 치다가 축대에서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타고난 유연성에 뱀파이어의 피가 선사한 아크로바틱 체조 솜씨덕분에 아까운 코피 한 방울로 끝났지만 연륜에 맞지 않는 그 사건을 동족들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눈을 보고 있는 거겠지. 그가 피안을 바라보고 있다 한들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는 인간일 뿐. 또각또각 효과음으로 치장한 내 긴 종아리를 훑어보느라 목이 휘어지는, 시장바닥의 군상 중 하나인 걸.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다양성을 가진 게 또 인간이다. 그 다채로움은 한 명 한 명을 볼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섞어 놓으면 가관이다. 그들이 무리를 지으면 향의 블렌딩이 일어난다. 좀 전에 호프집 앞에서 마주친 오버 코트 삼형제를 볼까. 푸짐한 몸집에 안경 쓴 녀석, 그의 혈관에서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콜레스테롤 잉여물이 알코올 분자를 바퀴 삼아 봅슬레이 경주를 하느라 곰삭은 홍어찜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헌데 그에게는 특이한 향 하나가 더 있었다. 고추씨 냄새였다. 세 명 중간에 우뚝 선 오버코트는 어떻고. 은은한 생선 비린내에서 녀석의 간 온도가 살짝 내려간 게 느껴졌다. 긴장한 게다. 세 번째 애무하듯 껌을 씹던 오버코트는 유효기간이 살짝 지난 버터 냄새를 풍겼다. 향의 조합이 잠시 뒤의 풍경을 그려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을 지나자 마자 퍽, 퍽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두 녀석은 얼굴을 감싼 채 나뒹굴고 안경 쓴 오버코트가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고 있었다. 솜씨 좋은 주방장은 생선에 고추씨와 버터를 넣고 프라이팬에 달달 구워 먹음직한 생선조림 요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요리사가 없는 거리에서 이거 저거를 대책 없이 섞다가 식재료는 물론이고 프라이팬마저 홀랑 태워먹는 경우를 종종 본다. “쌈 싸먹어라이 개쉐이들아” 감정이 북받치면 인간들은 세상이 쌈으로 보이나 보다. 아귀가 맞든 말든 온갖 재료들을 한 큐에 싸버리는 쌈 말이다.
쇼윈도 밖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씩 웃는다. 볼 사이로 주름이 지며 오롯한 명암이 만들어진다. 나도 씩 웃어준다. 그의 시선이 나의 동선을 좇는다. 뒤통수에 미적지근한 시선이 느껴진다.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아저씨, 동사무소 나이로 나는 스물 두 살이에요. 모르는 사람들은 10대로 본다구요. 아저씨랑 내가 나란히 걸으면 원조라구요. 나이에 연연하는 회사 언니들은 “어머 이마의 솜털 좀 봐” 하며 젊음과 미모를 아우른 나를 부러워한다. 그래 액면가 이 백 살의 너그러움을 보여주자. 증손자 뻘 되는 녀석이 관심 좀 보였기로서니. 아름다운 꽃에 나비가 꾀듯이 자연스럽게 생각해야지. 혹시 알아. 그의 피에 좀처럼 볼 수 없는 生氣의 정수가 녹아 있을지.
그러나 이럴 때 나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우쭐함이 이내 롤러코스터를 타고 진창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이다. 늪에 빠지면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한 달 이상을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검붉은 피조차 먹다 남긴 선짓국처럼 정나미가 떨어진다. 서둘러 관을 열고 적막 속으로 도망쳐 보지만 한번 펼쳐진 악몽의 파노라마는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춘삼월 스물 두 살 그 시절로 무대를 옮겨 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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