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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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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30일 11시 08분 등록

집으로 가는 길

 

눈이다. 한 송이가 떨어져 코 끝에서 작렬하더니 이마에 난 솜털을 덮고 이윽고 세상은 검정 하늘에 새하얀 백사장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버스정류장에 면한 재래시장을 지나 언덕 초입의 중학교를 끼고 770미터의 오르막과 백 한 개의 계단으로 통한다. 코스를 마쳤다고 방심하면 곤란하다. 이웃집 똥개의 구성진 목소리로 귀가 도장 세 개를 받아야 한다. . . .

 

담배가게는 오르막길 중간 지점에 있다. 길 너머로 바깥 풍경을 보며 멍 때리는 주인 아저씨가 보인다. 그를 눈 여겨 본 이후(별 다른 뜻은 없다. 군침이 돌만한 피는 아니다), 초점이 맞춰진 그의 눈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한 번은 그의 눈빛이 향하는 꼭지점을 찾아 뒷걸음을 치다가 축대에서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타고난 유연성에 뱀파이어의 피가 선사한 아크로바틱 체조 솜씨덕분에 아까운 코피 한 방울로 끝났지만 연륜에 맞지 않는 그 사건을 동족들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눈을 보고 있는 거겠지. 그가 피안을 바라보고 있다 한들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는 인간일 뿐. 또각또각 효과음으로 치장한 내 긴 종아리를 훑어보느라 목이 휘어지는, 시장바닥의 군상 중 하나인 걸.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다양성을 가진 게 또 인간이다. 그 다채로움은 한 명 한 명을 볼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섞어 놓으면 가관이다. 그들이 무리를 지으면 향의 블렌딩이 일어난다. 좀 전에 호프집 앞에서 마주친 오버 코트 삼형제를 볼까. 푸짐한 몸집에 안경 쓴 녀석, 그의 혈관에서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콜레스테롤 잉여물이 알코올 분자를 바퀴 삼아 봅슬레이 경주를 하느라 곰삭은 홍어찜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헌데 그에게는 특이한 향 하나가 더 있었다. 고추씨 냄새였다. 세 명 중간에 우뚝 선 오버코트는 어떻고. 은은한 생선 비린내에서 녀석의 간 온도가 살짝 내려간 게 느껴졌다. 긴장한 게다. 세 번째 애무하듯 껌을 씹던 오버코트는 유효기간이 살짝 지난 버터 냄새를 풍겼다. 향의 조합이 잠시 뒤의 풍경을 그려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을 지나자 마자 퍽, 퍽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두 녀석은 얼굴을 감싼 채 나뒹굴고 안경 쓴 오버코트가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고 있었다. 솜씨 좋은 주방장은 생선에 고추씨와 버터를 넣고 프라이팬에 달달 구워 먹음직한 생선조림 요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요리사가 없는 거리에서 이거 저거를 대책 없이 섞다가 식재료는 물론이고 프라이팬마저 홀랑 태워먹는 경우를 종종 본다. “쌈 싸먹어라이 개쉐이들아감정이 북받치면 인간들은 세상이 쌈으로 보이나 보다. 아귀가 맞든 말든 온갖 재료들을 한 큐에 싸버리는 쌈 말이다.

 

쇼윈도 밖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씩 웃는다. 볼 사이로 주름이 지며 오롯한 명암이 만들어진다. 나도 씩 웃어준다. 그의 시선이 나의 동선을 좇는다. 뒤통수에 미적지근한 시선이 느껴진다.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아저씨, 동사무소 나이로 나는 스물 두 살이에요. 모르는 사람들은 10대로 본다구요. 아저씨랑 내가 나란히 걸으면 원조라구요. 나이에 연연하는 회사 언니들은 어머 이마의 솜털 좀 봐하며 젊음과 미모를 아우른 나를 부러워한다. 그래 액면가 이 백 살의 너그러움을 보여주자. 증손자 뻘 되는 녀석이 관심 좀 보였기로서니. 아름다운 꽃에 나비가 꾀듯이 자연스럽게 생각해야지. 혹시 알아. 그의 피에 좀처럼 볼 수 없는 生氣의 정수가 녹아 있을지.

 

그러나 이럴 때 나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우쭐함이 이내 롤러코스터를 타고 진창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이다. 늪에 빠지면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한 달 이상을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검붉은 피조차 먹다 남긴 선짓국처럼 정나미가 떨어진다. 서둘러 관을 열고 적막 속으로 도망쳐 보지만 한번 펼쳐진 악몽의 파노라마는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춘삼월 스물 두 살 그 시절로 무대를 옮겨 놓곤 한다.

IP *.212.98.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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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12.30 18:11:08 *.30.254.21
은주에게 전화로 얘기했었는데,
글을 읽으며 그림이 그려지면,
난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고..
은주의 글이 참 좋아졌다고......

상현의 소설을 읽으며, 절로 그림이 그려져서 좋아..
자신에게 맞는다는 것의 힘...정말 놀라운 것 같아..
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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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2.31 16:53:22 *.236.3.241
소설 쓰겠다고 손 들었지만 참 막연했습니다.
뭘 어떻게 써야 할 지...지금도 틀이 안정적으로
잡힌 건 아니지만 글감옥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습니다.
공식 소설가도 아닌데 써지지 않는 글을 끙끙거리는
소설가의 심정은 이해하겠더라구요.

댓글 하나 하나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연구원은 함께 가는 커리큘럼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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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12.30 18:17:46 *.154.57.140
봇물이 터졌구나...쏟아지는 것이..
저렇게 속이 쌓아두고서는... 쓸 것이 없다고.. ㅎㅎ
더 이상 썩히지 말고 다 토해내라.. 막창 끝 똥물까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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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2.31 16:57:28 *.236.3.241
아직 봇물은 아니고 예열 단계를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
고맙다. 침묵속에서 글을 보지만 너의 마음이 가끔 보인다.
글 속에서 즐기며 새해를 맞이하기를 열렬히 기원한다.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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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0 18:31:16 *.10.44.47
그전 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빠..나 아무래도 뱀파이언가봐요.
물론 요기 요 보송보송한 뱀파이러랑은 DNA가 살짝 다르긴 하지만 비슷해요 비슷해.
혹시 오빠도 느끼는 거예요?
인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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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1 17:34:54 *.10.44.47
꼬물이 녀석, 쫌 풀어줬더니 정신을 못 차리네요.
죄송합니다. 급 정정 합니다.

정권교체가 아니라 '연립내각'입니다.
험험..

그럼...원더풀 뉴이어 되세요~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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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물이
2010.12.31 17:15:26 *.10.44.47
걱정마세요!!
36년 동안 장기집권 해묶느라고 지도 지쳤는지
파쇼 묙이 자진해서 정권을 반납하네요.

역사적인 평화적 정권교체와 함께 희망의 새해가 밝아옵니다.
제가 이래뵈도 탈출과 쥐잡이 두 종목은 월드챔피언감이거든요.
묙보다는 훨씬 더 희희낙낙한 자유민주공화국을 만들 것을 확신합니다.
선진국민답게 묙도 호의적인 고문역할을 약속했구요.

기대해주세요~!!  ^^

글구 오빠가 사람 아닌 건 벌~~~써 알아봤거던요.
언제쯤 아는 척해야 놀라지 않을까 간을 보고 있었던거라구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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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2.31 17:02:36 *.236.3.241
내가 아직 사람으로 보이니 ㅋㅋㅋ

또랑에 빠져본 맛을 아는 네가 힘이 되어주어 고맙다.
올해처럼 날로 영빨이 성장하되, 네 목에 건 고삐는
좀 풀어주고 희희낙락한 새해가 되기를 빈다.

너의 기쁨이 이미 세상의 기쁨이 되어가는 듯 하구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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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0 22:17:27 *.230.26.16
아, 담편이 궁금타,,
연재 당기다 작가 쓰러지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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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2.31 17:05:55 *.236.3.241
동기들 있으니까 그나마 이렇게 쓰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그만두지 않았을까ㅎㅎㅎ
소설 읽기에 일가견이 있는 선의 적나라한 리뷰를 많이
접할 수 있도록 열심히 써 볼게.

새해에는 선의 신작을 활용해서 집안 살림을 알차게 꾸며봐야겠다.
보람찬 새해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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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12.31 09:34:54 *.42.252.67
이렇게 글이 써지면 참 신나고 재미있지?
모두가 너의 글을 빨리 읽고 싶어 뱃 속의 황금 달걀을
한 번에 꺼내라고 난리네.
참 상상력도 기발하다.
글이 나를 당길 때 많이 써내려가 ....뼈속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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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12.31 21:36:02 *.42.252.67
시상식 갈 정도면 내 돈들여 때때옷 준비 하면 오우 ~~NO  NO
협찬 받아야지 음 우리 시껌댕이 방울양의 드레스는 '앙드레김' 의 순 백색
엘레강스 스타일을 생각해 두었고, 울 검버석 왕자 오리오는 버섯 좀 가리려고
검은  갤럭시 턱시도를 협찬 받을까 해.
나는?  개털로 우아한 옷을 하나 맞춰 봐야 할까?
바쁜데 갑자기 고민이 하나 더 생겼 군~~ 내 피와 우리 애기들 피는 절대 넘보지마.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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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2.31 17:12:30 *.236.3.241
눈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다는데, 이 김에 초고를 뽑으시죠 ㅋㅋㅋ
가 보지는 않았지만 눈 쌓인 동네가 참 멋질 것 같네요~
이 눔의 달걀이 황금인지, 무정란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끝을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지점에 서면 뭔가 뭉클한 게  툭 치고 나오지 않을까

강아지들에게 안부 전해 주시고
강아지들 때때옷도 준비해 두세요
내년 어느에선가 시상식 무대에 함께 오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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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1.01.01 06:08:03 *.129.207.200
오늘, 신춘문예 당선 발표날이네요.  

경향신문 시부분 당선작입니다.  읽고,  이 새벽에  가슴이  짠했지요.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잡았을까?  모두가 쉬쉬하는 이야기를  외롭게  되뇌이는  것이  '시'구나.라고  처음  느꼈어요.  소설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말,  하지  않는 일,  쓰지  않는  글 을  써가는 것이지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  
형은 뚝심이  있고,  하체가 강하시니 그 마침표를 찍으시리라 믿습니다.  

0a01c13b.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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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1.03 14:15:00 *.236.3.241
여자 주인공이 사는 달동네 풍경이랑 비슷하네ㅎㅎㅎ
필요한 정보를 콕콕 짚어줘서 잘 쓰고 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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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2011.01.03 20:00:05 *.108.52.183
읽다보니 왠지 이 뱀파이어 여인이 참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느낌이 들어요.
우성오빠 말처럼 그녀의 캐릭터가 눈에 그려진다고나 할까.
소설을 읽으며 재밌다 빠져든다는 느낌이 그 소설속의 캐릭터들이 내 머리속에서 살아움직일때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라면...
오빠 잘하고 계신듯 ㅎㅎ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이 캐릭터안에 잘 녹아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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