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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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밤의 꿈
“당신이 보여요. 당신이 보이니까 내가 보이네요.” 어둠 너머에 대고 말했다.
“내가 내가 아니라는 게 뭐죠?” 그녀가 물었다.
“웃지 마세요. 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입니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친 놈 같죠. 그래서 힘들었습니다.” 정적이 순식간에 공간을 채웠다. 벌레소리며 부엉이소리가 어색한 정적을 달래주었다. “당신 덕분에 뭘 해야 할 지 알았습니다.” “그게 뭔데요? 딸꾹.”
“김봉남으로 사는 것. 과거에 현재를 헌납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김봉남이 그렇게 잊지 못한 나폴레옹은 자신이 누운 한 평 영토에서도 평안을 모르는 미숙아였습니다. 조국을 위해 세계 정복에 나섰지만 정작 제 영토는 없었던 거죠. 또 한번의 생은 안식의 영토를 확보하라는 특명이었어요. 내가 세계의 창조자임을 간과하고 육신에 갇혀 부활한 정신을 타박했어요.”
“나는 육체가 부활하고, 당신은 정신이 부활했으니 부활이 우리의 인연인 셈이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게요. 어렵게 만났는데 만나자 이별이네요.” 무심코 나온 말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말이 세상을 만든다. 마지막 밤이다. 마지막…
“따뜻한 밥 한 술 대접하고 싶네요.” 허공을 향해 말했다.
“밥이요? 나 알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새 잦아들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를 만져봤다. 묵직한 게 그대로 있었다. 목소리가 난 쪽으로 네발 달린 짐승처럼 느릿느릿 기어갔다. 그녀가 있을 법한 곳에 이르러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다. 상처가 나지 않은 오른 손바닥 정중앙에 칼을 그었다. 이번에는 좀 더 깊었다. “뭐 하는 거에요?” 그녀가 당황한 듯 물었다.
발원지를 확인하고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갓 데워져 먹을 만해요.” 손바닥을 떼려 실랑이를 벌이다가 피 한 방울이 입 속으로 들어갔는지 ‘꿀꺽’ 소리가 났다. 그 다음은 피에르가 그녀의 목을 빨았을 때와 같았다. 신통치 않은 젖을 빨 듯 그녀는 안타깝게 한 방울 한 방울을 갈구했다. 목젖이 위아래로 연동할 때마다 몸 안의 기운이 쭉쭉 빠져 나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 없이 손바닥을 빨던 그녀가 미세한 손의 떨림을 감지했는지 살며시 손을 내려놓곤 입을 쓱 닦았다. “미안해요. 손목의 핏줄이 아른거려 일 내겠어요.”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뼘을 어루만지며 나를 바닥에 뉘였다. 상의를 벗는지 지퍼 내리는 소리, 소매에서 팔 빼는 소리가 이어졌다. ‘북~’ 무언가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혈을 해야겠어요.” 그녀는 팔을 더듬어 상처부위를 찾고는 티셔츠의 옷감으로 잽싸게 상처를 감쌌다. 찢긴 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이 뺨을 스쳤다. 부드럽고 서늘한 기운에 목젖이 뻣뻣해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허공에서 아른거렸다. 보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게 있다. 우리는 그것을 느꼈고 감각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하느냐는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 부활의 인연으로 갇혔을 때 방아쇠는 이미 당겨진 것이다. 허공을 맴돌던 손가락에 굳게 다문 입술이 걸렸다. 우유빛깔 분례의 것이었다. 진즉 사위었을 몸뚱이 하나를 지탱하기 위해 탄식의 고개에서 수 없이 넘어지고 일어섰을 떠돌이 분례가 거기 있을 터였다. 속을 드러낸 그녀의 입술이 긴장으로 오므라진 입술 위를 감쌌다. 미풍처럼 비린내가 걷히고 습기를 머금은 혀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찰병을 자임한 혀는 발성 기관으로만 기능하던 상피세포 하나하나를 속속들이 파악해갔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당황한 세포들이 파르르 떨며 낯을 붉혔다. 각각의 세포가 지닌 기질을 섭렵한 혀는 곧이어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공습은 주요 포스트를 정확히 짚어 강렬하게 이루어졌다. 이와 이가 부딪히고, 달뜬 혀가 배후로 돌아 그녀의 혀를 죄었다. 아득한 곳으로 추락하던 감각이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을 좌절과 진정제에 길들여진 몸이 홀연히 야성의 부름을 받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빛이 끊긴 폐가는 어느덧 검투장으로 변했다. 부엉이와 이름 모를 벌레들이 관객이 되었다. 뜻밖의 빅매치에 그들은 검투사보다 더 큰 소리로 환호했다. 우리는 짐승이었다. 엎치락덮치락. 그녀가 사냥감을 발톱으로 찍고 울부짖기 무섭게 그녀를 덮친 짐승에게서 속 깊은 포효가 울려 나왔다. 할퀴고 깨물었다. 싸움은 끝날 줄을 몰랐다. 날이 밝자 우리는 서로를 알았다. 그윽한 충만감이 죽음 같은 단잠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