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구본형

구본형

개인과

/

/

  • 구본형
  • 조회 수 9097
  • 댓글 수 8
  • 추천 수 0
2012년 3월 19일 10시 24분 등록

여기 시가 하나있다. 이 시의 제목은 '내 고추'다.

 

변소에 가서

오줌을 누려고 하는데

해바라기가

내 고추를 보려고 한다

나는 안 보여줬다

 

어느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시다. 열 살짜리의 시인데, 귀엽다. 그러나 원래의 시는 다르다. 원작은 이렇다.

 

변소에 가서

오줌을 눌라고 하는데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고 한다

나는 안 보여줬다

 

제목도 '내 고추'가 아니고 '내 자지'다. 사투리도 표준말로 고쳤다. 학교 선생은 다른 학생들에게 원작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불편해서 교육적 차원에서 젊잖게 고쳐두었다고 한다. 강제 개작을 통해 이 시의 어린 작가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 날 수 없게 되었다. 표준화 되었고, 무난해졌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거름망을 지나오는 동안 '열 살짜리 남자 아이'라는 본질을 잃고 말았다. 생명을 잃었고, 진실을 잃었고, 시(詩)를 잃었다. 해바라기가 보려고 하여 숨긴 것은 내 고추가 아니라 내 자지인 것이다. 고추라면 숨길 필요도 없다. 오직 자지이기 때문에 숨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프레데릭 와츠.jpg

 

신화는 문명의 고치지 않은 원판이며 야생의 사유다. 모든 어른 속에 아이가 들어 있듯이, 인류는 그 사유 속에 원시를 품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문명은 원시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시를 품지 않은 문명은 죽은 것이다. 야생의 사유가 없는 문명은 아스팔트며, 가면이며, 생명이 다했거나 애초에 생명이 없이 만들어진 조화(造花)에 불과하다.

 

신화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오래된 원시의 철학이다. 그때 그들은 이 사유의 틀로 사람을 이해했고 자연을 이해했고 우주를 이해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미신이라고 불렀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야만이라고 모멸했다. 그러나 신화는 이야기 속에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는 진리의 상징이다. 그것을 풀어내면 옷 속에 감춰진 인류의 은밀함에 접근해 갈 수 있다.

 

IP *.128.229.208

프로필 이미지
2012.03.19 10:52:11 *.97.72.233

 

.

.

.                                              ^-^*

 

프로필 이미지
2012.03.19 22:10:04 *.168.97.226

신화는 가장 오래된 원시의 철학!

느낌 있습니다.


요즘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내가 재미있어서 하는 공부를 즐깁니다.


원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상상하는 것이 

제법, 저의 뇌를 흥분시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프로필 이미지
2012.03.20 01:40:49 *.122.237.16

ㅋㅋㅋ 사부님, 통쾌하네요.

프로필 이미지
2012.03.27 13:07:04 *.37.14.12

자지란 생생한 표현이 좋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2.03.28 06:55:30 *.180.231.209

해바라기는 그곳에 그냥 피어 있을을 뿐인데, 시속에 생생한 조연이 되었습니다. 멋진 해바리기 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2.03.31 13:34:49 *.200.147.129

"야생의 사유가 없는 문명은 ~ 조화에 불과하다" 이 구절 좋으네요. ^^

 

"야생의 사유가 없는 삶은 ~ 가짜 삶에 불과하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7.02.25 11:16:08 *.139.108.199

자지를 자지라 부를수 없다니!

아무튼 유쾌통쾌한 글이에요^^


인류가 아무리 문명화 하더라도,

동물적 본성은 숨길 수 없겠지요,


그 본성과 문명을 조화롭게 어울리는 기술이 삶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9.01.17 11:25:54 *.212.217.154

자지를 자지라 부를수 없고,

보지를 보지라 부를수 없는 슬픔!


그것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비 문명에서 문명으로

'성장' 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화 이겠지요.


내 안에 숨겨진 어린아이의 그 순수함, 원시의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

그 에너지를 잘 되살릴 때

그 힘은 우리를 본래의 자신으로 되 돌아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3 인생을 훌륭하게 사는 법은 아주 많다 [3] 구본형 2007.02.12 9063
» 야생의 사유 속에 감춰둔 인간에 대한 진실 file [8] 구본형 2012.03.19 9097
101 50대 퇴직 후의 인생을 위한 준비 [2] 구본형 2004.03.03 9111
100 아프리카로 가자, 순수한 인류의 소년시대로 - 카를 구스타프 융, 생각탐험 26 [7] 구본형 2010.07.07 9126
99 이런 책 이렇게 [2] 구본형 2003.01.30 9167
98 자연스러운 마음이 사라지니 예의가 생기고 예의가 사라지니 합리적 사고가 생겼다 [7] 구본형 2008.10.24 9191
97 굿바이, 게으름 [10] 구본형 2007.02.12 9203
96 자기결정의 원칙-동아일보 [2] 구본형 2002.12.25 9251
95 전문가의 뜻을 세우고 절실하게 추구하라 [10] 구본형 2008.10.19 9258
94 경험이 무력해진 시대에 자신의 브랜드를 만드는 법-국민일보 [7] 구본형 2002.12.24 9260
93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 니체, 생각탐험20 [8] [1] 구본형 2010.06.20 9262
92 나를 오래도록 미치게 하는 법 [9] 구본형 2010.10.22 9355
91 스물 아홉과 설흔 아홉에 결심해야할 것들 [9] 구본형 2004.11.12 9387
90 실패를 경영하는 법 file [4] 구본형 2009.09.08 9407
89 분노를 다스리는 여덟가지 비계 file [7] 구본형 2012.04.02 9448
88 인문학적 감수성에 대하여-국민일보 [5] [6] 구본형 2002.12.24 9454
87 고전에 다가가는 법 - 청소년들에게 주는 독서 조언 file [17] 구본형 2009.11.08 9514
86 꿈꾸는 훈련을 하자 [16] [2] 구본형 2010.11.18 9537
85 상사의 분노에 대응하는 법 [8] 구본형 2007.04.12 9542
84 인생을 낭비한 죄-한국일보 [3] [1] 구본형 2002.12.25 9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