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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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모처럼 고요했습니다. 지방선거 당일이어서 한동안 이 숲까지 어지럽게 들리던 후보자들의 확성기 소리가 완전히 소멸한 탓이었습니다. 투표를 마치고 돌아와 모처럼 오후 내내 숲 속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벌통들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곳엔 작은 옹달샘이 있고, 물을 좋아하는 아주 커다란 버드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내게 처음으로 나무의 언어를 들려주었던 가죽나무도 서 있는 곳입니다.
분봉 벌을 지키는 날이면 그곳에 앉아 그렇게 책을 읽곤 하는데 그 곳이 곧 병원이요 도서관이요 절입니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숲이 내는 소리와 향기와 바람이 몸으로 스미고 차올라 내가 숲으로 녹아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벌들의 부지런한 날개짓 소리, 바람을 맞는 나무 이파리들의 떨림, 새들의 노래 소리… 소리는 모두 제 각각이지만, 그들이 모이고 어울려 빚는 소리는 확성기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어울림을 갖고 있습니다. 이 즈음 새 소리 중에서는 검은등뻐꾸기 짝 찾는 소리가 백미입니다. 그들의 독특한 소리를 글로는 그대에게 들려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아카시꽃 활짝 피었다 슬며시 져가는 요즘 숲에는 단연 찔레꽃 향기가 으뜸입니다. 벌들도 나도 모두 하얀색 그 향기에 취해 환장할 것 같습니다. 장사익선생의 노래 ‘찔레꽃’의 환장할 것 같은 애절함의 연원을 온전히 이해할 만큼 그 향기의 매력은 진합니다. 신기한 것은 나의 오감이 이토록 무수한 자극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데도 책 속의 글들이 흐트러짐 없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이 한 대목을 소리를 내어 열 번쯤 읽었습니다. 너무 깊고 충만하여 그대로 책을 덮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모든 향기가 사라졌습니다. 이윽고 나도 사라졌습니다. 숲의 모든 존재 속으로 내가 다가가 닿고 마침내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황홀함이 몇 년 만에 다시 찾아 들었습니다.
그대 삶이 떠돌고 어지러워 견딜 수 없을 때, 하여 스스로를 가누기 버거운 때, 그대 이 경험을 나누고자 이 숲에 오시는 날이면 저 파란색 의자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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