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 조회 수 3144
- 댓글 수 2
- 추천 수 0
어제는 모처럼 고요했습니다. 지방선거 당일이어서 한동안 이 숲까지 어지럽게 들리던 후보자들의 확성기 소리가 완전히 소멸한 탓이었습니다. 투표를 마치고 돌아와 모처럼 오후 내내 숲 속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벌통들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곳엔 작은 옹달샘이 있고, 물을 좋아하는 아주 커다란 버드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내게 처음으로 나무의 언어를 들려주었던 가죽나무도 서 있는 곳입니다.
분봉 벌을 지키는 날이면 그곳에 앉아 그렇게 책을 읽곤 하는데 그 곳이 곧 병원이요 도서관이요 절입니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숲이 내는 소리와 향기와 바람이 몸으로 스미고 차올라 내가 숲으로 녹아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벌들의 부지런한 날개짓 소리, 바람을 맞는 나무 이파리들의 떨림, 새들의 노래 소리… 소리는 모두 제 각각이지만, 그들이 모이고 어울려 빚는 소리는 확성기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어울림을 갖고 있습니다. 이 즈음 새 소리 중에서는 검은등뻐꾸기 짝 찾는 소리가 백미입니다. 그들의 독특한 소리를 글로는 그대에게 들려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아카시꽃 활짝 피었다 슬며시 져가는 요즘 숲에는 단연 찔레꽃 향기가 으뜸입니다. 벌들도 나도 모두 하얀색 그 향기에 취해 환장할 것 같습니다. 장사익선생의 노래 ‘찔레꽃’의 환장할 것 같은 애절함의 연원을 온전히 이해할 만큼 그 향기의 매력은 진합니다. 신기한 것은 나의 오감이 이토록 무수한 자극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데도 책 속의 글들이 흐트러짐 없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이 한 대목을 소리를 내어 열 번쯤 읽었습니다. 너무 깊고 충만하여 그대로 책을 덮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모든 향기가 사라졌습니다. 이윽고 나도 사라졌습니다. 숲의 모든 존재 속으로 내가 다가가 닿고 마침내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황홀함이 몇 년 만에 다시 찾아 들었습니다.
그대 삶이 떠돌고 어지러워 견딜 수 없을 때, 하여 스스로를 가누기 버거운 때, 그대 이 경험을 나누고자 이 숲에 오시는 날이면 저 파란색 의자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937 |
넘어져보는 경험 ![]() | 김용규 | 2010.06.10 | 3561 |
936 | 상황을 활용하고 있는가 [2] | 문요한 | 2010.06.09 | 3089 |
935 |
영웅은 과거의 나를 죽이고 진정한 자기로 거듭난다 ![]() | 승완 | 2010.06.08 | 3256 |
934 | 파우스트는 왜 영혼을 팔았나? [3] | 신종윤 | 2010.06.07 | 6117 |
933 | 3년을 품으면 소화시켜 뼈를 내 놓을 수 있다 [1] | 부지깽이 | 2010.06.04 | 4199 |
» |
그대를 위해 준비해 놓은 의자 ![]() | 김용규 | 2010.06.03 | 3144 |
931 | 흔들리지 않으면 무너진다 [1] | 문요한 | 2010.06.02 | 3351 |
930 |
소중한 것은 멀리 있지 않다 ![]() | 승완 | 2010.06.01 | 3602 |
929 |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 [4] | 신종윤 | 2010.05.31 | 4514 |
928 |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자 [3] | 부지깽이 | 2010.05.28 | 3255 |
927 | 용기 있는 사람 [4] | 김용규 | 2010.05.27 | 3361 |
926 | 감동은 순환된다 [4] | 문요한 | 2010.05.26 | 3027 |
925 |
달인은 ‘길 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 ![]() | 승완 | 2010.05.25 | 3394 |
924 | 100일에 좋은 습관 하나 [2] | 신종윤 | 2010.05.24 | 3788 |
923 | 용이 되어 그를 보호하다 [2] | 부지깽이 | 2010.05.21 | 4202 |
922 |
본래의 힘 ![]() | 김용규 | 2010.05.20 | 3364 |
921 | 건강하다는 것의 의미 [2] | 문요한 | 2010.05.19 | 3094 |
920 |
훌륭한 스승은 존재 자체가 가르침이다 ![]() | 승완 | 2010.05.18 | 3973 |
919 | 상황이 사실을 덮지 못하도록 [5] | 신종윤 | 2010.05.17 | 2930 |
918 | 위대한 그가 바보에게 당하는 이유 [6] | 부지깽이 | 2010.05.14 | 35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