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133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송산서원에서 묻다
문인수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 이쯤에서 그만 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 저것 캐묻는다.
찔레 덤불이 겹겹 앞을 가로 막으며 못 들어가게 한다.
돌아서고 싶을까. 찔레 가시에 찔리며 억지로 들어선 마당, 그리고 뒤꼍.
풀대들, 풀떼며 잡목들이 불학무식하다. 공부하고 싶을까. 작은 마루에 방 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까.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줄을 쳐, 토종 강냉이 수십 다발을 주렁주렁 널어두었다.
산새 부리들, 들쥐 다람쥐 청설모… 잇자국들이 대를 이어 상세하다.
이 빠진 세월은 또 얼마나 길까. 누군가 버리고 간 한 무더기 세로쓰기 책들,
대강 넘겨보니 사법고시 준비를 한 것 같다. 그리고 취사도구 몇 잘살까.
거미줄이며 먼지가 이렇게 힘세다. 작파했을까.
이 방 저 방 마구 부서져 널려 있는 것들 중에 격자무늬문짝 몇 개가 그나마 그래도 쓸 만하다. 사방, 닫아걸고 싶을까.
마당을 다시 잘 살펴보니 풀숲에 작은 웅덩이 흔적이 두 군데, 이쪽저쪽 숨어있다.
썩은 꺾꽂이 같은 세월, 깜깜 눈감고 싶을까.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과거지사란 남몰래 버티는 것, 대답하지 않는다.
문인수 시집, 『배꼽』, 창비, 2008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24 | [리멤버 구사부] 나를 마케팅하는 법 | 정야 | 2021.12.13 | 1519 |
223 | [시인은 말한다]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 이병률 | 정야 | 2021.12.20 | 1516 |
222 | [시인은 말한다] 빗방울 하나가 5 / 강은교 | 정야 | 2022.01.03 | 1511 |
221 | [시인은 말한다] 오래 말하는 사이 / 신달자 | 정야 | 2021.11.15 | 1502 |
220 | [시인은 말한다]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이 없다 / 이은규 | 정야 | 2021.12.13 | 1493 |
219 |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 정야 | 2020.01.13 | 1487 |
218 | [시인은 말한다] 제도 / 김승희 | 정야 | 2021.09.27 | 1485 |
217 | [시인은 말한다] 밖에 더 많다 / 이문재 | 정야 | 2020.11.30 | 1477 |
216 | [리멤버 구사부] 자기 설득 | 정야 | 2020.11.09 | 1477 |
215 | [리멤버 구사부]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 | 정야 | 2020.07.20 | 1453 |
214 | [시인은 말한다] 깨달음의 깨달음 / 박재화 | 정야 | 2021.10.11 | 1450 |
213 | [시인은 말한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 정야 | 2021.01.25 | 1441 |
212 | [시인은 말한다] 낯선 곳 / 고은 | 정야 | 2020.06.15 | 1439 |
211 | [시인은 말한다] 따뜻한 외면 / 복효근 | 정야 | 2020.08.10 | 1433 |
210 | [시인은 말한다] 간절 / 이재무 | 정야 | 2021.03.08 | 1430 |
209 | [리멤버 구사부] 관계의 맛 | 정야 | 2020.10.26 | 1430 |
208 | [시인은 말한다] 나무들 / 필립 라킨 | 정야 | 2021.05.03 | 1425 |
207 | [리멤버 구사부] 나를 혁명하자 | 정야 | 2021.01.04 | 1419 |
206 | [시인은 말한다] 눈풀꽃 / 루이스 글릭 | 정야 | 2020.10.19 | 1414 |
205 | [리멤버 구사부]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서 | 정야 | 2020.12.07 | 1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