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138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송산서원에서 묻다
문인수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 이쯤에서 그만 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 저것 캐묻는다.
찔레 덤불이 겹겹 앞을 가로 막으며 못 들어가게 한다.
돌아서고 싶을까. 찔레 가시에 찔리며 억지로 들어선 마당, 그리고 뒤꼍.
풀대들, 풀떼며 잡목들이 불학무식하다. 공부하고 싶을까. 작은 마루에 방 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까.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줄을 쳐, 토종 강냉이 수십 다발을 주렁주렁 널어두었다.
산새 부리들, 들쥐 다람쥐 청설모… 잇자국들이 대를 이어 상세하다.
이 빠진 세월은 또 얼마나 길까. 누군가 버리고 간 한 무더기 세로쓰기 책들,
대강 넘겨보니 사법고시 준비를 한 것 같다. 그리고 취사도구 몇 잘살까.
거미줄이며 먼지가 이렇게 힘세다. 작파했을까.
이 방 저 방 마구 부서져 널려 있는 것들 중에 격자무늬문짝 몇 개가 그나마 그래도 쓸 만하다. 사방, 닫아걸고 싶을까.
마당을 다시 잘 살펴보니 풀숲에 작은 웅덩이 흔적이 두 군데, 이쪽저쪽 숨어있다.
썩은 꺾꽂이 같은 세월, 깜깜 눈감고 싶을까.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과거지사란 남몰래 버티는 것, 대답하지 않는다.
문인수 시집, 『배꼽』, 창비, 2008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04 | [시인은 말한다] 낯선 곳 / 고은 | 정야 | 2020.06.15 | 1484 |
203 | [시인은 말한다] 간절 / 이재무 | 정야 | 2021.03.08 | 1479 |
202 | [시인은 말한다] 나무들 / 필립 라킨 | 정야 | 2021.05.03 | 1478 |
201 | [리멤버 구사부] 관계의 맛 | 정야 | 2020.10.26 | 1475 |
200 | [리멤버 구사부] 나를 혁명하자 | 정야 | 2021.01.04 | 1472 |
199 | [시인은 말한다] 눈풀꽃 / 루이스 글릭 | 정야 | 2020.10.19 | 1471 |
198 | [리멤버 구사부]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서 | 정야 | 2020.12.07 | 1468 |
197 |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 정야 | 2019.12.30 | 1465 |
196 | [리멤버 구사부] 스스로의 역사가 [3] | 정야 | 2020.08.31 | 1461 |
195 | [리멤버 구사부] 고독의 인연 | 정야 | 2020.08.18 | 1461 |
194 |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 정야 | 2019.10.21 | 1461 |
193 | [시인은 말한다]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가는 삶의 사소한 선택들 혹은 소금과 별들의 순환 이동 경로 / 박정대 | 정야 | 2020.07.27 | 1458 |
192 | [시인은 말한다]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 정야 | 2021.04.05 | 1457 |
191 | [리멤버 구사부] 괜찮은 사람 되기 | 정야 | 2021.07.26 | 1453 |
190 | [리멤버 구사부] 필살기 법칙 | 정야 | 2021.08.16 | 1445 |
189 | [시인은 말한다] 난독증 / 여태천 | 정야 | 2020.07.13 | 1442 |
188 | [리멤버 구사부] 숙련의 '멋' | 정야 | 2021.08.02 | 1440 |
187 | [시인은 말한다] 노자가 떠나던 길에 도덕경을 써주게 된 전설 / 베르톨트 브레히트 | 정야 | 2021.06.14 | 1439 |
186 | [리멤버 구사부]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 정야 | 2020.12.21 | 1436 |
185 | [리멤버 구사부] 좋은 얼굴 | 정야 | 2021.09.13 | 14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