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 대한 사랑과 부모의 욕망을 구분하는 법
사랑은 ‘살리는 힘’이다. 특히 부모의 사랑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준비없이 세상에 나온 아이가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살리며 살 수 있도록 지원하고 지지하는 특별한 힘이다. 물론 사람을 살리는 데 어떤 힘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한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은 대상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극한 정성은 사랑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일 수 없다. 그래서 대상에 대한 충분한 관심이 결여된 정성은 ‘사랑’이기보다 ‘욕망’일 가능성이 크다.
아이에게 필요한 그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경우, 이 욕망의 결과는 너무나 분명하다. 얼마든지 지출하고도 아무 문제없는 특수한 계층을 제외한 보통의 가정에서 결국 이 욕망의 대가는 부모와 아이가 함께 치르게 마련이다. 귀를 막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치른 희생이 반드시 보상받을 거라는 믿음으로 고단한 오늘을 아슬아슬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다음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기본적인 삶의 기반마저 허물어 뒷바라지한 아이의 실패를 담담히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대단한 부모가 맞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 되고 싶었던 좋은 부모라면 실패한 아이에게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헌신 덕분에 실패의 면역력을 키우지 못한 아이는 홀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으니 그건 아이의 몫이 아니겠냐고 발뺌할 참인가? 그럼 다시 묻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우기는 그 감정은 과연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인가?
설사 천운으로 아이가 부모가 기대하는 성공적인 삶을 성취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진짜로 괜찮은가? 아이만 행복하다면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런 우리 역시 대단한 부모가 맞다. 하지만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나라면 부모의 삶을 담보로 얻은 성취 위에 마냥 행복할 수 있겠는가? 성공했으니 이제 아이가 부모를 보살펴주면 된다고? 부모의 삶의 이유가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스스로 만족스럽고, 자식 역시 기꺼운 마음으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면야 우리의 투자는 비로소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교육의 대가로 부양을 요구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게다가 우리의 아이들은 같은 뒷바라지를 하고도 경제적으로 아직 건재한 부모를 가진 이웃들과 자신들의 아이를 위한 양육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들 역시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모자라면 해서는 안 될 것까지 해야 할 수도 있다. 거기에는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친 부모를 저버리는 것이 포함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그래도 괜찮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최저 수준을 밑도는 부밖에 얻을 수 없는 경우, 행복의 수준은 지극히 낮아지며 비참한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한다.’는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통찰을 굳이 거론할 것도 없이 최소한의 경제력마저 잃은 상태라면 우리는 정말 괜찮을 리가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인 우리 자신의 삶의 근간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 물론 당신이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생활을 실천했던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급 내면의 소유자라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존재만으로도 이미 풍요로운 우리였다면 굳이 자식에게 부유한 삶을 물려주려고 이런 무리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설상가상으로 부모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을 수 있는 자식은 드물다. 만약 우리의 아이가 그럴 수 있는 극소수에 속한다면 우리는 정말 아이를 잘 키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선택은 아이가 성공해 기꺼이 부모의 희생을 보상할 수 있는 매우 희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이에게 이롭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아이에게 득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분명해졌는데도 만의 하나를 기대하고 이 선택을 고집한다면 그건 사랑은커녕 아이 인생을 건 도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좋은 부모임을 인증 받고 싶은 스스로의 욕망에서 비롯된 불안을 견디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뿐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건 이미 의지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퇴사를 고민할 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이 아이들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과연 남편의 수입만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흡족한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만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해가는 몸과 맘. 축 늘어진 몸으로 집에 들어오면 아이들 눈 한번 맞춰줄 기운이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막 화가 났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참고 있는데...니들이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말들이 아이들을 향해 쏟아졌다.
아이들에게 부족함 없이 쓸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면서도 사랑으로 충만할 수 있다면 제일 좋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물론 아쉬움이 아주 없지는 않다. 친구들이 다 다니는 학원에 가고 싶다는 아들과 이쁜 새 옷을 바라보는 딸아이의 표정을 볼 때 마음이 그저 편치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저도 모르게 올라오는 불안에 어쩔 줄 몰라 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아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딸은 새 옷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신나게 놀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아이들을 지켜보는 나는 점점 더 평화로워져갔고, 그런 엄마 곁에서 아이들은 점점 더 충만해져가는 이 아름다운 순환. 돈으로 사려면 얼마가 필요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