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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어 성큼 가을이 다가오자 남자는 모처럼 아내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옷을 사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일요일 큰맘 먹고 부부가 함께 외출을 하였다. 오늘은 남편 노릇을 톡톡히 해보겠다는 굳은 결심을 품고.
“여보, 맘에 드는 옷 천천히 골라봐.”
남자는 작정을 하였다. 오늘은 군말 없이 잘 따라 다니리라. 덕택에 여자는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 사람이 웬일이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되어가자 남편의 다리는 아파오고 서서히 속이 끓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그 상황에서 불을 지르는 아내의 한 말씀.
“맘에 드는 게 없네. 건너편 백화점 가보자.”
남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여기서 끝을 내어야지 다른 곳엘 가자고. 미치고 폴짝 뛰겠네. 아무리 작정하고 따라 나왔지만 그래도 그렇지 시방 뭐라고. 널린 게 옷인데 맘에 드는 게 없어 다른 곳엘 또 들리자고.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난국을. 그럼에도 남편은 허벅지를 쥐어뜯었다.
‘그래. 이왕지사 오늘 하루 희생하기로 하였으니 나의 하해와 같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끝까지 오늘은 온몸으로 충성해 보리라.’
백화점에서 다시 아내의 옷을 고르는 작업은 계속 되었지만 난국은 이어졌다.
‘이것은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
‘치수가 맞지 않네.’
‘색상이 별로잖아.’
남편의 한계는 드디어 팔부능선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해.’
어금니를 깨물었지만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이유인즉슨 아내의 다음과 같은 한마디 덕분 이었다.
“여보, 돌아 다녀 봤지만 그게 그거네. 다음 세일할 때 한 번 더 와봐야 겠어.”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목표 지향적인 남자와 관계 지향적인 여자의 성향을 설명할 때 이같은 쇼핑의 사례가 회자되곤 하는데 부부 이철저님과 김뽀사시님의 경우가 그러하다. 남편 이철저는 평소 벼르고 별렀던 골프채를 금번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이름에 걸맞게 주변 사람의 조언과 품질 및 가격 등 여러 정보들을 사전 수집하고 비교 분석을 한 후 백화점 스포츠 용품점으로 향하였다. 그는 다른 곳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가전제품 매장에 전시된 갖고 싶어 하였던 태블릿 PC도 그냥 지나쳤다. 오늘 목표는 오로지 골프채 이었기에 온통 마음이 그쪽에 가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매장에 도착 하였다. 그는 마음먹은 타깃을 점원에게 이야기 한 후 드디어 실 제품을 보게 되자 가슴이 뛰었다. 점원의 설명과 제품에 관련된 메리트를 들으면서 자신의 내부적인 결정에 대한 인정을 재확인 후 확신을 가지고 구입 및 대금 결제를 하였다. 그의 선택에서 구입까지 사이클의 동선은 심플하고 간단명료하다. 중간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다. 도식으로 표현하면 내재된 동기 --> 정보 수집 --> 타깃 설정 --> 구입으로 나타난다.
김뽀사시 여사는 신상품 스커트를 사기위해 금번 백화점 세일 기간을 기다렸다. 물론 친구 나잘난이 동창회에서 비싼 가방 자랑을 한 것에 대한 반발 심리 탓도 컸었다. 덕분에 며칠 전부터 기분이 업이 되어있고 아침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 그녀도 카탈로그 등을 활용해 관련 정보를 입수 하였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가끔 지름신이 강림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가 되면 어느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
당일 현관문을 룰루랄라 나서는 그녀의 등 뒤로 남편은 언제나처럼 그랬듯 몇 시까지 오냐고 확답을 요구한다. 귀찮아 대충 언제까지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지만 솔직히 그건 나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 내 마음도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서 서두의 경우처럼 남편이 동행을 할 시에는 변수가 일어난다.
대개의 경우 정해진 시간 속에 움직이며 극단적으로 끌려 다니는 개처럼 따라 다니던 남자는, 철부지 어린이마냥 어느 한도가 넘어가면 급기야는 본능적인 화를 내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남자가 여자의 쇼핑에 동행했을 때 느끼는 스트레스 강도는 소방관이 불을 끌 때의 강도와 비슷하다는 연구결과 보고도 있다. 그만큼 남자는 타깃의 획득 결과물에 만족을 느끼는 자신과 다른 여자의 쇼핑 관행에 대해 받아들이기를 힘들어 한다.
여하튼 김뽀사시 여사는 오늘 혼자서 자유롭게 쇼핑을 제대로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남자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고립무원의 상태에 이따금 있으려고 하는 경향과는 달리,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위를 탐색하고 접촉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목표물 쟁취 보다는 먼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지하 1층부터 향한다. 향긋한 냄새와 함께 떡뽁기, 어묵, 튀김을 비롯해 여러 시식코너가 즐비하다.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지만 일단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군만두 진열대 앞에 섰다. 자주 들리다보니 이제는 판매를 하시는 분과도 눈웃음과 농이 자연스럽다. 남자가 낯선 이와 동화되는 시간이 긴 것과는 달리 여자들은 몇 번 마주치기만 하면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번에 새로 나온 제품인데 드셔보세요. 철판에도 눌러 붙지 않고 맛깔스러워요.”
입에 한번 넣어 오물오물 씹어보니 맛이 괜찮다. 아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살까말까 망설이던 그녀는 1+1 시책 앞에 일단 하나를 집어 든다. 어느 정도 다니다 보니 이제는 배가 불러 오기에 위층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가급적 1층에는 들리지 않으려고 하지만 향수 향기와 탐나는 명품들이 여심의 마음을 유혹한다.
‘지난번 동창회에 나잘난이가 들고 온 것이 루이비통 이었었지.’
자꾸만 그때의 빨간색 가방이 떠오르고 눈에 밟혀 뒤돌아보지만 할 수 없다. 금번에는 아이들 과외 등 지출비용이 많이 나왔기에 판매하는 점원 언니에게 찜만 해놓고 다시 올라갔다. 살 마음이 없었지만 2층으로 향하니 정화 언니의 매대에서 무언가를 싸게 판다. 이게 웬 떡. 다른 사람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이월상품 이지만 의외로 물건이 괜찮다. 주섬주섬 고르다 보니 어느새 쇼핑 카트는 예상치 않게 불룩해졌다. 그러다 건너편 00 아파트 아줌마를 만났다.
“어머 오랜 만이예요.”
“뽀사시 여사 피부가 장난이 아니네. 보톡스 했나봐. 아니면 외제 화장품을 쓰던지.”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칭찬을 받으니 그냥 있을 수 있나. 전망 좋은 커피숍으로 향했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서둘러 최종 목적지 층으로 향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서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을 하며 여러 매장을 탐색한다. 똑같은 상품이더라도 브랜드와 디자이너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몇 번을 점원에게 물어보고 탐문한 끝에 결국 낙찰을 보았다. 무이자가 적용되는 카드를 꺼내어 3개월 할부를 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원래 사고자 하는 물건 외에 짐도 가득하지만 정가보다 싸게 샀다는 그것에 쾌재를 부른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상황은 난리가 아니었다.
중천에 해가 떠있는 상황에서 나간 그녀가 저녁 늦도록 들어오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남편과 아이들은 중국집에 음식을 시켜먹고 하염없이 TV에만 눈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아내의 감정과는 달리 화가 난 남편은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지금 몇시인줄 알아. 애들에게 밥은 챙겨주어야 할 것 아니야. 도대체 옷 하나 사러가서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그녀는 속이 상하다. 자주도 아니고 오랜만에 벼르고 별렀던 상품을 구입해서 한창 기분 좋던 차에 공감은 못해줄망정 찬물을 끼얹다니. 하지만 구입해온 상품을 펼쳐놓고 거울을 보자 금세 기분이 돌아왔다. 역시 사기를 잘했어.
목표 지향적인 남자의 특성은 조직생활의 제한된 틀 속의 공간 안에서 빠른 업무처리 등의 유용한 재능을 발휘 해왔다. 하지만 통섭이란 바람이 불자 고정화된 업무의 탈피 및 사업 영역의 파괴를 넘나드는 보다 업그레이드된 능력을 사회는 요구하기 시작 하였다. 이에 그 Key의 하나를 쇼핑을 통해서본 여자의 관계 지향적 속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사례로써 우리는 일반적인 남자의 한계성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목요일. 회사 창립기념일이어서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마부장은 느긋하게 평일 휴무의 향연을 만끽하려고 하였으나 웬걸 오늘따라 더욱 일찍 눈이 뜨였다. 공짜로 주어진 시간 뭘 할까. 일단은 맞벌이 하는 와이프를 배웅하고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을 자동차로 바래다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런. 곳곳에 포진되어 나를 바라보는 주변 분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낯설기도 하고. 혹시나 평일날 출근 안하고 있으니 놈팡이로 보는 것은 아닐까. 서둘러 안전지대인 집으로 향하나 왠지 텅 빈 느낌을 갖는다. 거기에 개수대에 가득 널려있는 설거지 꺼리들. 아내의 칭찬을 받기 위해 오랜만에 청소기를 돌릴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쉬는 날인데 내가 뭐하는 짓이람. 한 번 더 침대로 몸을 날려 늦잠을 만끽한다. 이렇게 영원히 쉬어 봤으면 하다가 문득 눈을 뜨니 10시.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차려 놓은 아침을 먹는다. 이젠 할 일이 없다. 뭘 하지. 뭘 할까. 리모컨으로 케이블 방송 영화를 보는 것도 잠시. 어느 순간 지겨워졌다. 여자들은 집안일을 끝내고 나면 어떤 것을 할까 하는 의문을 품으면서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가자 다시 배꼽시계가 신호를 보낸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과 계란을 꺼내었다. 이번에는 김치를 찾아야 되는데 가만있어보자 어디 있더라.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고. 어떡하지. 김치 없는 라면은 앙코 없는 찐빵인데. 할 수 없이 마트에 가서 사오기 위해 추리닝 옷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 그런데 이런. 세탁소에 양복을 맡길 것이 생각나 다시 집으로 향하여 옷가지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니 웬 아줌마가 인사를 건넨다. 누구지? 나를 언제 보았다고 인사를 건네는 걸까.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는 체를 해야 하나. 그런데 1층까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겨. 두근거리는 가슴을 뒤로하고 겸연쩍게 내린 후 동네 세탁소를 향한다. 밝은 대낮에 이런데 들어가기가 머쓱하다. 그럼에도 나를 반겨주는 사장님. 그런데 역시 눈초리가 이상하다. 나 혼자 만의 생각인가. 인사도 못하고 서둘러 나왔다.
마트에서는 김치 한 봉지와 담배 하나를 샀다. 포인트 적립을 위해서 전화번호를 나에게 묻는다. 번호? 내번호 이었던가 아니면 아이들? 생각이 오락가락. 그냥 계산을 끝내고 나오니 할 일없이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이 참 익숙지 않다. 담배하나 피워 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태반이 아줌마 들이다. 도대체 저 여편네들은 뭐하는 걸까. 남자들은 이 시간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얼마나 허벌나게 코피 터지게 아부하며 거래처를 뒤집고 다니는데. 혀를 끌끌 차보지만 그녀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향하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움츠러드는 마음도 그렇지만 도대체 아는 사람이 없으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먼저 낯간지럽게 인사를 건네기도 그렇고. 그렇게 예상치 않은 휴일은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고독한 아파트 방 한 칸에서 아무 할 일없이 죽치고 있던 나. 평소 얼굴에 철판을 깔며 모르는 이와도 인사를 잘도 나누던 와이프가 조금 부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