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이종승
  • 조회 수 273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6년 5월 10일 09시 28분 등록
참으로 기구한 운명, 백범 김구.

1876년 음력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의 상놈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반역죄를 저질러 상놈으로 숨어사는 안동 김씨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대대로 토착양반들에게 천대와 압제를 받으며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겁이 없고 장난이 아주 심해 부모님의 속을 태우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천성이 담대하고 자존심이 강하여 누구에게도 지려하지 않았다.
조선 말기 사회가 부패할 대로 부패한 데다 일본의 조선 점령 의도가 점차 노골화됨에 따라 극도로 혼란한 시국을 보며 성장한다.
양반의 천대에 과거를 보기 위해 아버지를 졸라 서당을 열고 궁핍하나마 배움을 이루었으나 과거장의 폐해를 보고 포기한다. 그 후 상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관상공부를 하였으나 그 역시 포기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내적 수양에 힘쓰다 동학 접주가 되어 동학혁명에 참여하게 된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지인들의 도움으로 숨어 살며 이곳 저곳을 여행한다. 여행 중에 의병에도 잠시 참여하고 치아포에서 민비시해사건에 대한 복수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다. 이 일로 인해 인천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옥을 하여 또 다시 지인들의 도움으로 각지를 방랑하며 변성명하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 간다.
그 후 예수교에 귀의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인재양성을 위하여 교육자의 길을 걸으며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한다. 그러한 활동들로 인해 또 다시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나 감형에 감형이 거듭되어 5년 만에 출옥하게 되고 더욱 더 교육 사업에 매진한다. 몇 차례의 기구한 정혼처와의 결혼 약속이 성사되지 못하고 우역곡절 끝에 13살 연하의 신교육을 받은 여성과 자유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식 둘을 어려서 잃는 슬픔을 겪게 된다.
헌신적인 교육사업과 독립운동, 옥살이 등으로 인해 한 해도 편할 날이 없는 고달픈 삶이었다.
급기야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더 이상 국내에 머무를 수 없음을 직감하고 상해로 망명길에 오른다. 1945년 11월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기까지 말로 할 수 없는 망명객의 고난한 삶을 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생사를 넘나드는 독립운동을 한다.
젊어서부터 이런 저런 죽을 고비를 수 차 넘겼으며 사형선고를 받았었고 세 차례의 감옥 생활 중에도 고문과 병에 걸려 몇 번이나 죽음을 넘나들었다.
끝내 해방된 조국에서 젊은 장교의 총탄에 74세를 일기로 암살당하였다.


백범선생님에 대한 나의 이런 저런 착잡한 생각들.

고등학교 1학년 때 방학과제로 백범일지를 읽고 독후감을 썼던 기억이 알맹이는 없이 남아있다. 그때 참 깊은 감명을 받았던 아련한 기억과 함께.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어 다시 읽게 되니 그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책을 덮고 나니 마음이 착잡하다.
예전처럼 마냥 독립의 영웅으로 모든 것들을 덮어둘 수는 없어서이다. 김구 선생님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살신성인이야 두 말 해서 무엇하랴.
하지만 국모보수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본 장교를 시골의 객주에서 참혹하게 살해한 것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의 싸움이요, 원한에 사무친 살인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살인의 방법이나 살인 당시의 행동은 더욱 그렇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독립 영웅이 아닌 김구라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고다마 싯달타의 가르침을 통해 본다면, 김구 선생님은 전생업도 대단한 것이며, 이생에서 쌓은 업 역시 이루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중한 것이다. 물론 업에 대한 법(法)이 이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간단치는 않지만.
혈기 방장한 젊은이였던 김구 선생님의 젊은 시절의 행적들에서 오히려 김구 자신의 인간 소외를 느꼈다면 빗나간 역설일까?
만약 백범일지가 김구 선생님의 우려대로 상권으로 끝났다면 지금과 같은 백범사상이 완성될 수 있었을까 조금은 의아해진다.
백범사상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나의 소원’이 다행히 추가 되어졌고 하권 그러했기에 오늘날의 백범사상이 완성되어 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백범 선생님의 정신적인 변화과정을 유추해 본다면 더욱 그렇다.
책을 읽으며 자꾸 한편에서는 마하트마 간디와 달라이 라마가 떠오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몇 년 전에 개인적인 관심으로 인터넷을 통해 조사해 본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창설자인 고(故 ) 라신이 떠오른다. 우리에게 라신은 서방 언론의 훌륭한 선전대로 중동 평화를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테러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나는 백범일지를 읽으며 김구선생님과 마하트마 간디와 달라이 라마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여러 차례 생각해 보았다. 또 라신과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김구 선생님은 라신과 매우 흡사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인생 궤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김구 선생님은 절대적인 독립 영웅이요, 라신은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에 지금 우리나라와 팔레스타인의 상황이 정반대라면 두 분을 바라보는 우리의 세계관은 어떤 것일까?
여하튼 25년여가 지나서 다시 읽은 백범일지는 여전히 내 삶에 위력적인 모습을 다시 드러냈고 나는 백범이라는 너무나 큰 나무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들어 온 글귀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14)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15)
나는 상 좋은 사람(好相人)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 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39)
안진사는 비밀리에 나를 조사하고 난 뒤, “군이 나이 어리지만 대담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을 터이지만 군이 만일 청계를 침범하다가 폐멸 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는 후의에서 밀사를 보냈다고 한다. 나는 즉시 참모회의를 열고 논의한 결과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이 성립되었다.(51)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혹시 자네 앞길에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62)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오히려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63)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66)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100)
한때 구차스럽게 사는 것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수 없으니 과히 우려치 말라는 내용을 회답을 보냈다. 그대로 옥중생활을 계속하며 구서적보다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였다.(126)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131)
“우리는 새로 동지가 생겼을 적에 반드시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1개월씩 함께 지낸다오. 그리하여 각자 관찰한 바와 시험한 것을 모두 모아서 어떤 사업에 적당한 자질이 있는지를 판정하여 벼슬살이에 적당한 자는 자리를 주선하고 상업이나 농사에 적당한 인재는 상·농으로 인도하여 종사케 하는 것이 우리 동지들의 규정이오.”(174)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 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181)
정창극은 여비 사용대장에서 ‘짚신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떡, 마대, 밥값을 합해 총 70냥’을 보고 경탄하였다. 그러고는 ‘우리나라의 관리가 다 김선생 같으면 백성의 고통이 없겠다.’느니, ‘박가나 신가가 갔다 왔으면 적어도 몇 백 냥은 더 청구하였으리라’ 하였다.
정창극은 비록 수리이나 지극히 건박하여 노닥노닥 기운 의복을 입고 관에서 정한 요금 외에는 한 푼이라도 함부로 사용함이 없었기 때문에 군수가 감히 탐학을 하지 못했다.(190)
환등기구를 가지고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라고 절규하였다.(204)
장래 대규모의 전쟁을 하려면 인재양성이 없고는 성공을 기약할 수 없고 일시적인 격발로는 5일은 커녕 3일도 기약하기 어려우니 분기를 참고 다수 청년을 북쪽 지대로 데려가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당장 급한 일이라 했다.(217)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220)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세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221)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에도 학생들이 나를 숭배함보다 내가 학생들에게 천 배 만 배의 숭배와 희망을 두고 있었다.(236)
육체로는 복역을 하나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낙천생활을 하기로 했다.(237)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267)
“그대가 빈손으로 왔으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나 뇌물을 가지고 와서 요청하면 그 말부터 듣지 않을 터인즉, 물건을 도로 가져가고 후일 다시 빈손으로 와서 말하시오.”(278)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307)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 나이 오십 여라. 과거를 회상하고 장래를 추상하니 신세 가련하다.(365)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367)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426)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428)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431)
IP *.44.152.19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