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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1일 11시 57분 등록
 노년/ 시몬 드 보부와르/ 홍상희?박해영 옮김/ 책세상


1. 저자에 대하여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성으로 만들어질 뿐이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정체성을 의심하던 여성들에게 ‘깨어나라!’는 시몬 드 보브와르의 외침이다. 이 경구를 담고 있는 그의 대표작 『제2의 성』이 발간되었을 때 바티칸 교황청은 이 책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알베르 카뮈, 프랑스와 모리악 등 지식인 들을 비롯한 남성중심 사회 전반에서는 거센 비난과 혹평이 일었다. 그러나 여성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일깨운 이 책은 당시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이후 여성해방운동의 대표적인 지침서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학자 미셀페로는 그녀의 영향력을 이렇게 요약한다. ‘보브와르의 사상은 무기가 되고 현실이 되어, 여성들은 사회적 역할을 열망하며 대학에 등록하고, 모든 직종의 직업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결혼으로 인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르트르의 청혼을 거절하고 1년 단위의 계약 결혼을 한 여인. “인간의 삶의 의미는 결코 확정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정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라는 그녀의 말은 사회 개혁가로서 자신의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년>이라는 책을 통해 느끼는 점 역시, 그녀가 철저한 좌파적 개혁가, 혁명가(?)의 삶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물론 서구 유럽에서 좌파 학문의 거성이라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실천력이 거세된 채 강단에 영향력이 머물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노년>에서 보이는 저자의 모습은 다분히 격정적이며, 현실 참여적이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이익이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경제는 이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문명 또한 바로 이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일 뿐 한계를 넘어서면 버려진다. ‘폐물’ 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15p

정확한 분석이다. 굳이 정치경제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곳은 자본주의(資本主義)이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모든 것의 가치 척도는 ‘이윤’(利潤)이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 존재는 어떠한 사회적 윤리와 관습이 있다 하더라도, 폐물(廢物)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물론 보부아르는 ‘노인’들의 삶에 대해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행하지는 않았다. 다만 각 시기별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노년’이 규정되어 왔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학작품과 문학가들의 실제 사례 속에서 ‘노년’이 어떻게 이미지화 되어왔는지를 아주 꼼꼼하게 예증하고 있다.

보부아르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소수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노인, 여성, 노동자……)을 대변하고, 그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현실의 개혁과 참여를 외친다. 물론 그녀의 학문적 노력과 실천들이 대부분 여성문제 해결에 편중된 면이 없지 않지만, <노년>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서 그녀가 단순히 여성문제만이 아닌 다른 현실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0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28년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한다. 몇 년의 교수 생활 후 교수직을 사퇴하고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하면서 평론, 소설, 자서전, 철학서, 여행기 등 20여권에 달하는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945년 사르트르가 잡지 <현대>를 창간하자 그 일에 협력하며 실존주의 문학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으로는 1960년대 여성해방문학의 고전이 된 《제2의 성》을 비롯하여, 소설 《초대받은 여자》와 공쿠르상을 수상한 《레 망다랭》, 《대장정 : 중국에 관한 에세이》 《미국에서의 나날》 등의 여행기와 여러 권의 철학서도 있다. 《얌전한 처녀의 회상》 《나이의 힘》 《사물의 힘》 《결국》 등의 자서전은 개인적인 흥미를 넘어 193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 세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생활을 분명하고 힘차게 묘사했다. 《노년》은 노인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을 통렬하게 비판한 책으로 1970년 파리에서 첫 출간되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서론 ? 머리말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싯다르타 왕자>[7]

우리 사회는 노년을 마치 일종의 수치스러운 비밀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여성이나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분야에는 풍부한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 반면 전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나면 노년에 관련된 것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8]

“청춘기는 꽤 여러 해 동안 지속된다. 인생은 바로 이런 청소년들을 노인들로 만든다” 라고 프루스트는 지적했다.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른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11]

늙는다는 것보다 더 자명하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없다. 그러나 또한 그것보다 더 예상외인 것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절대로 늙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12]

이제 속임수는 그만두자.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그때의 우리 인생의 방향이다.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 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자. 우리가 우리의 인간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짊어지고자 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러면 단번에 우리는 말년의 불행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의 일이다. 말년의 불행,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착취체제를 강경하게 고발하고 있다.[14]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또는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살은 우리 서양 문명의 실패를 나타낸다.[16]

인간은 그 말년에도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는, 현 상황의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전복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몇몇 제한적인 개혁을 통해 그러한 결과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의 특권적 지식 계급에 문화가 국한됨으로 인한 문화적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여러 가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불문에 부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침묵을 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16]

한 사회 안에서 노년이 지니는 의미나 무의미는 그 사회 전체를 문제 삼는다. 왜냐하면 노년을 통해서 이전의 전 생애의 의미 혹은 무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18]

매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어, 그것은 부동(不動)의 상태이다. 변화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그것을 우리는 노쇠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의 노인학 의사인 랜싱Lansing 씨는 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노화란 보통 시간의 흐름과 관계가 깊으며,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죽음에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 과정이다.”[20]

노년은 총체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23]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 제1장 노화와 생물학

아무리 장수한다고 해도 인간은 노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쇠란 불가항력의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노화는 어김없이 죽음에 이른다.[51]


제2장 민족학적 자료들

노쇠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채택한 남성적 혹은 여성적인 이상과 상치된다. 신체적인 부자유 때문에 노쇠는 추함과 병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노쇠를 거부하는 것은 본능적인 태도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노쇠는 직접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기초적 반응은 도덕성으로 억제하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다. 바로 여기서 모순이 생기고 우리는 수많은 모순의 실례를 만나게 될 것이다.[57]

북시베리아의 코랴크인들이 이러한 경우다.... 겨울은 혹독하다 오랫동안 걷는 일은 노인들의 기력을 쇠진시킨다. 기력이 소진한 후에도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노인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마치 불치병 환자들을 죽이듯 힘없는 노인들을 죽였다. 이것이 어찌나 당연한 일이었는지 코랴크인들은 그들이 이 일을 얼마나 잘 처리하는지를 자랑할 정도였다. 그들은 창이나 단도로 몸을 찌를 때 어느 부분이 치명적인지 가르쳐준다. 이러한 살인은 길고 복잡한 의식이 끝난 후 집단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행해진다.[71]

호피족, 크리크와 크로 인디언들, 남아프리카의 부시먼들은 마을에서 먼 외딴 곳에 지은 오두막으로 노인들을 데리고 가서 약간의 물과 먹을 것을 넣어준 다음 버리고 오는 풍습이 있었다. 식량 자원이 매우 불안정한 에스키모인들은 노인이 눈 속에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리도록 부추긴다. 고기를 잡으러 원정을 나갈 때 그들은 노인들을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빙산 위에 놔두고 가거나 혹은 얼음집 속에 가둬놓고 가서 노인들을 굶어 죽게 한다.[71]

최근까지도 일본의 벽지에는, 너무 가난하여 살기 위해 노인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마을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인들을 ‘죽음의 산’이라는 산에 데려가 버리곤 했다.<일본소설 나라야마>[75]

아주 가난하지만 노인들은 제거하지 않는 미개인들도 있다. 앞서 나온 예문들과 이것을 비교하면서 이런 차이점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연안 지방 사람들과는 반대로 내륙의 추크치족은 노인들은 존경한다. 가족 간에는 아주 친밀한 유대 관계가 있다. 가정을 다스리는 사람은 아버지이며 그가 순록 떼를 소유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소유권을 가진다..... 어쨌든 노인이 재산의 소유자로 있는 한 재산이 그에게 커다란 위엄을 부여해준다.[81]

알류투인들 역시 그들의 생존 조건이 불안정하지만 노인들의 처지는 행복하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노인들의 경험에 대해 인정하는 가치와 자식과 부모를 이어주는 상호간의 사랑 때문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봐서 경제력과 효성 사이에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부모들이 그들의 자식들을 잘 먹일 수 있고 또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여가를 가질 만큼 자연은 충분한 자원을 제공한다. 그래서 자식들은 늙은 부모가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배려한다.[83]

어린아이들을 잘 보살피지 않는 야쿠트족, 아니누족은 노인들을 거칠고 소홀히 다루는 반면, 거의 같은 생활 조건을 갖고 있지만 자식을 왕처럼 키우며 살고 있는 야마나족, 알류트인들은 노인을 존경한다. 그러나 노인들은 흔히 악순환의 희생양이 된다. 즉 너무나 궁핍해지면 어른들은 자식들을 잘 먹일 수 없게 되고 노인들을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효심은 관습과 종교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아들은 부모를 죽이는 죽음의 의식을 가능한 한 가장 빈틈없이 세심하게 실행하면서 자신의 존경과 애정을 부모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110]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인들의 지위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고 ‘부여된다’는 것이다. [116]

인간은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 체계이다. 반대로 한 사회가 노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진실-흔히 조심스럽게 갖추어져 있는-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118]

노인들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관해 원시인들이 채택한 실제적인 해결책들은 아주 다양하다. 즉 그들을 죽이거나,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거나, 최소한 생명만을 유지하도록 하거나, 안락한 종말을 맞도록 해주거나, 혹은 그들을 존경하거나 혹은 극진하게 대접한다. 우리는 소위 문명화된 국민들도 이와 똑같은 방식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단지 공공연한 살해만이 금지되어 있을 뿐이다.[118]


제3장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흑인의 문제는 백인들의 문제이며, 여성의 문제는 남성들의 문제라고 사람들은 말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는 평등을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흑인들은 억압에 대항하여 싸운다. 한데 노인들은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노인들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의 문제이다.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은 자신의 실제적인 이익과 이데올로기적인 이익에 따라, 그들보다 앞서 활동했던 퇴역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결정해버린다.[121]

사람들은 노인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가장 위대한 일들이 성취되는 것은 “충고와 권위와 현명한 성숙함에 의해서이다. 노년에는 이러한 자질들이 사라지기는 커녕, 반대로 가장 풍부하게 갖추어진다.” “국가는 언제나 젊은이들에 의해 패망했고, 노인들에 의해 구출되고 복원되었다.” 카통은 노인들이 노쇠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노인은 정신을 계속 사용하고, 정신을 풍부하게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기의 정신을 고스란히 보존하다.” [165]

키케로는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들을 ‘편견’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노인을 증오한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희극작가들과 그 관객들의 눈에 우스꽝스러운 존재인 노인은, 시인들에게는 해가 미치지 않을까 두려운 파괴적인 힘을 나타낸다. 도덕가들은 노인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이다. 노인들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인들을 어둡게 그려놓았다.[173]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특히 영국에서, 아버지는 집안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 아들에게 밀려났다. 이 아들 또한 어느 정도 나이에 이르러 농사일이 너무 힘에 부치게 되면 장남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한 권한을 상속받으면 장남은 결혼했다. 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대치했고, 늙은 부부는 전통적으로 그들에게 정해진 방으로 옮겨갔다. 아일랜드에서는 그런 방을 ‘서쪽방’ 이라고 부른다. 권력을 박탈당한 아버지는 권력을 상속받은 아들에게 흔히 아주 나쁜 대접을 받았다.[183]

고대 이집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노년이라는 주제는 거의 언제나 상투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똑같은 비교, 똑같은 형용사들이 사용되었다. 노년은 인생의 겨울이다. 하얀 머리카락과 하얀 수염은 흰 눈과 얼음을 환기시킨다.....그러나 노인은 역사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며, 아무도 노년의 진실을 연구해보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17세기 초반에 놀라운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셰익스피어이다. 그는 <리어왕>을 쓰면서 노인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운명을 표현하고자 했다. 왜, 그리고 어떻게?[231]

“내 나이에 가장 서글픈 것은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희망은 가장 달콤한 열정이며 우리가 유쾌하게 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열정이다.”<생테브르몽>[249]

법은 노인들을 자식들의 무관심과 푸대접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어떤 상황에서 법은 권리의 상황으로 대체되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고서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종신연금을 받았다. 종신 연금의 총액수는 공증인 앞에서 정해졌다. 만일 자식들이 부모에게 종신 연금 지급을 거절하면 부모는 자식을 법정에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노인은 더 이상 가족의 독단에 종속되지 않았다. 법정이 노인에게 보장한 이러한 보호 때문에 불행하게도 종종 노인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275]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이 시대의 노인들의 운명은 원시사회의 노인의 운명과 흡사했다. 노인의 운명은 본질적으로 그들 가족에 달려 있었다. 애정 때문에, 혹은 이목이 두려워서 어떤 사람들은 노인들을 염려하거나, 적어도 올바르게 그들을 대우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노인들을 소홀하게 대했고, 양로원에 버리거나 집에서 내쫓아버렸으며, 심지어는 남몰래 죽이기도 했다.[302]


제4장 현대 사회에서의 노년

필라델피아의 공중 위생에 대하여 린든Linden 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시민들 중 고령자들의 감정적인 문제 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로는 노인들을 기피하는 사회적 배척 현상, 친구들 범위의 축소, 극심한 고독, 인간에 대한 존경심의 감소와 상실,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들 수 있다.”[344]

남자의 인생에서 퇴직은 뿌리 깊은 단절을 가져온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그는 퇴직으로 인한 휴식이나 여가 시간 같은 어떤 이점과, 궁핍과 자격 박탈이라는 심각한 단점을 초래하는 그의 새로운 신분에 적응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죽음은 자기 삶의 중심, 진실로 그를 현재의 그로 만들어주는 것을 상실하는 것이다. 퇴직이란 말은 모든 말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단어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든, 혹은 운명적으로 강요당해서이든 퇴직한다는 것,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어주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366]

우리는 헤밍웨이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없다고 느낀 순간 죽음을 선택했다. 우리가 자유롭게 자기 일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일이 자기 자신의 성취일 대,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사실 일종의 죽음과도 같다. 일이 일종의 제약이었을 경우 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해방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에는 거의 언제나 양면성이 있다. 일이란 예속이며 피곤인 동시에 관심의 원천이며 균형의 요인이고 우리를 사회에 통합시켜주는 요인이다. 일의 이러한 모호성은 퇴직에도 반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퇴직을 긴 휴가로 혹은 폐품처리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367]

노인에게 계속해서 일하기를 원하느냐, 은퇴하기를 원하느냐 물었을 때 그들이 내놓은 답변이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들이 언제나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일하기를 원하는 경우, 그 이유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고, 일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경우, 그것은 건강관리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삶의 양식 중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긍정적인 해결책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은 일 속에서도, 여가 속에서도 성취감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385]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이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고, 내일은 오늘과 거의 다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의한 기적 중 하나이다. < 세비네부인 >[398]

우리는 늙어가는 자를 우리 속에 있는 타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나이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 나이에 기꺼이 동의하지 못한다.“처음으로 노인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소스라치게 놀라기 마련이다.”[399]

“내가 늙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나는 피곤하고 미칠 듯 화가 난다. 지금의 나는 과거보다 못한 것이 없다. 오히려 더 낫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떤 적이 나를 꽁꽁 묶어놓고 심한 고통을 가한다. 그래서 나는 이전보다 더 나은 사고를 하고 계획들을 세울 수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것을 더 이상 실천할 수가 없다.”<예이츠>[415]

톨스토이의 정력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만큼 대단했다. 원기를 유지하려는 그의 세심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67세에 자전거를 배웠고, 그 후 몇 년 동안 자전거나 말 또는 긴 도보 산책을 계속했다. 그는 테니스를 즐겼고, 강에서 냉수욕을 했다.[435]

“인간이란 파괴될 수는 있어도 정복될 수는 없다”라고 늙은 어부는 말한다.<노인과 바다>[438]

노년의 왕성한 성욕으로 널리 알려진 예로 톨스토이를 들 수 있다. 그는 말년에 남자와 여자에게 완전한 순결을 권장했다. 그렇지만 그는 69, 70세에도 말을 타고 긴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러고 나서는 쾌활한 기분으로 하루 종일 집 주변을 산책하곤 했다.[462]

특히 성욕과 창의력과의 관계는 놀라울 만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 관계는 위고, 피카소,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 명백히 드러난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플로베르가 ‘일종의 열성’이라고 부르는 어떤 공격적 성격이 필요하며,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리비도에 근거를 둔다. 또한 창조하기 위해서 애정의 열기로 스스로가 이 세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껴야 한다. 이 애정의 열기는 육체적 욕망과 함께 사그러진다.[490]


제6장 시간, 활동, 역사

"노인들은 희망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추억으로 살아간다" < 아리스토텔레스 >[506]

"과거가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이다“라고 사르트르는 지적한다. 진보하고자 계획하는 사람은 과거에서 벗어난다. 그는 자신의 옛 자아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자아가 아니라고 정의하고, 분리하여 생각한다.[506]

80세에 모리악은 다음과 같이 썼다. “쇠약해지지도 않았으며, 실추되지도 않았고 부유해지지도 않았다. 언제나 똑같다. 늙은 사람은 자신을 바로 이렇게 본다. 노인에게 삶에서 얻은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그렇게 많은 해를 살면서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들 중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이 이렇게 보잘것없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건들은 잊혀지거나 뒤범벅이 된다. 그러나 사상에 대해서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인가? 50년간의 독서에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533]

노년을 가장 활동적으로 보낸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변화하는 것이 더 용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권좌에서 물러나 클레망소는 글을 썼다. 그는 정치에 말려들긴 했어도 활동이 줄어들었을 때 학자로서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서는 악순환이 생겨난다.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 호기심과 정열은 저하되며, 무관심하므로 세계가 공허해진다. 그 공허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활동할 이유를 전혀 찾아내지 못한다. 죽음이 우리 내면에, 그리고 사물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632]


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습관, 그것은 과거이다. 그것은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태도와 행동의 형태로 우리가 경험한 과거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몽타주와 기계적인 동작의 총체로서, 이것에 의해 우리는 걷고 말하고 글을 쓰고 기타 등등의 행동을 한다. 정상적인 노년기에 있어 이것은 약화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역할이 커지기까지 하는데, 그것이 인습에 기여하기 때문이다.[651]

행위를 함으로써 스스로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더 이상 노인에게 속해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노인은 존재하기 위해서 소유하기를 원한다. 노인들에게서 아주 일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탐욕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656]

우리는 노년이 평온함을 가져다준다는 편견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부터, 성인이 된 인간은 인간 조건을 낙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자신이 지금 지니지 못한 미덕들을 나이에 전가시켰다. 즉 아이들에게는 순수함을, 노인에게는 평온함을 전가시켰다. 인간은 말년을, 그를 괴롭히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시기로 간주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편리한 환상이다. 이 환상은, 노인을 괴롭힌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노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들을 운명에 내맡겨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678]

건강, 기억, 물질적 재산, 위엄, 권위 등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난 후에도 한 인간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벌써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인간으로 남기 위해 노인이 이끌어가는 투쟁은 비참하고 덧없는 것이다..... 이 투쟁은 인간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성인들은 그들을 하찮은 벌레나 무기력한 사물로 축소시켜버리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처럼 극도의 비참함 속에서 최소한의 위엄을 지니고 싶어한다는 것에는 무언가 영웅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679, 680]

직업과 함께 사회적 지위를 상실한 개인은 고통스럽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긴다. 노인은 의기소침해지거나, 또는 만약 그가 특권을 받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에 띄려고 한다. 그는 직위, 역할, 직함, 명예를 탐욕스레 원한다. 그러나 헐벗게 된 그의 생활 속에서 진실로 능력을 끌어낼 수가 없다.[682]

노인의 가장 중요한 행운은 양호한 건강 상태보다도 그에게 있어 세계가 아직도 목표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활동적이고 유용한 노인은 권태와 노쇠에서 벗어난다. 그가 살아가는 시간은 여전히 그의 시간이고 일상적으로 말년을 특징짓는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행동들이 그에게 필요치 않다. 그의 노년은 말하자면 불문에 부쳐지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성인의 나이에 이미 그가 도전하는 시도들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689]

모든 우울증 환자들은 죽음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제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완전히 사라져버리기를 원한다. 미래가 그들에게 제안하는 유일한 전망은 죽음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죽음이 가능한 한 가장 빨리 그들에게 다가오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자살의 유혹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도 많다.[696]


제8장 노년의 실례들

한 사람의 말년은 대부분 그의 장년기에 달려 있다. 샤토브리앙이 음울한 최후를 준비했던 반면에 볼테르의 개방적인 태도는, 견디기 어려운 신체적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름다운 노년을 가져다주었다. 스위프트와 휘트먼은 둘다 노년에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당했다. 인간 혐오자였던 스위프트와 삶을 사랑했던 휘트먼은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스위프트의 분노는 그의 불행을 악화시켰으며, 휘트먼의 낙천주의는 그로 하여금 시련을 극복하는 것을 도왔다.[706]

1869년 그(빅토르 위고, 67세 때)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 내가 늙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영혼의 증거인가! 나의 육신은 쇠약해지고, 나의 사고는 성장한다. 나의 노년에 일종의 개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708]

1935년 6월 그(프로이트)는 60세 생일을 맞은 토마스 만에게, 너무 늙어서 까지 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볼 때, 자비로운 운명이 적당한 시기에 우리 삶의 길이를 제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1936년 5월 18일 그는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이렇게 쓴다. “나는 가정생활에서만 예외적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노년의 불행과 비탄에 익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나는 향수어린 마음으로 허무를 통과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733]


결론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노년을 슬프게 혹은 반항적으로 맞아들인다. 노년은 죽음 자체보다 더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756]

더욱 비참한 것은 그를 침범한 무관심이 그가 과거에 가졌던 열정, 확신들, 활동들에 이론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부인한다는 것이다.[756]

“노년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끊임없는 희극이다. 그것이 희극적인 것은 특히 그가 연기를 잘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게Faguet의 이 말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757]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757]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해야 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758]

사람들은 종종 노년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돈을 저축하고, 은퇴 생활을 할 곳을 정하고, 취미를 만드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날이 와도 우리는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모든 환상들이 사라지고 생명의 열기가 식었다 하더라도, 계속 삶에 밀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노년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게 참여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758]

건강과 명석한 이성을 보존한다 해도 사람은 권태라는 끔찍한 재앙에 시달리게 된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박탈당한 은퇴자는 다른 어떤 영향력도 회복할 수 없다. 자기 일이 없는 여가란 자주성이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자는 시간을 죽일 소일거리조차 찾아내지 못한다. 음울한 나태는 결국 무감각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것은 남아 있는 신체적?정신적 균형마저 해치게 된다.[759]

이것은 우리 사회의 죄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 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노쇠가 때 이르게 시작되고, 빨리 진전되며,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정신적으로 끔찍한 것은 사회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빈손으로 노년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소외당하고 착취당한 사람들은 기력이 사라지면 숙명적으로 ‘폐품’과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759]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 사회가 비활동 인구에게 지정해주는 운명을 통해서, 그 사회의 이면의 베일은 벗겨진다. 사회는 항상 그들에게 상품 취급을 해왔던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하며, 사회가 내거는 ‘휴머니즘’이란 겉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사회는 고백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지배 계층은 무산 계급을 대놓고 야만, 무지와 동일시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들을 인류 속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노동자가 생산력이 있을 때에만 인류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늙으면, 사회는 마치 낯선 인간을 보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이 문제를 공모적인 침묵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노년은 우리 문명의 모든 실패를 고발한다.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온통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760]

사회는 개인이 생산성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그에 대해 염려한다.[761]

사회에서 밀려난, 이제 지치고 헐벗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눈물밖에 없다. 이 둘 사이에서 기계는 돌아간다. 그 기계는 인간을 빻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으깨지는 대로 가만히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도망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 정책’, 노인 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762]



3. ‘내가 저자라면’ -

『노년』을 통해 보부와르의 책을 처음 접한다. 770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제2의 성』은 1,000페이지에 달한다고 한다.) 이 책은 엄청난 양의 사례를 담고 있다. 끈임 없이 나타나는 사례는 고대에서 현대를 아우른다. 민족학, 역사학, 예술가?과학자?철학자 등 다양한 분야와 직종의 사례를 포함하고, 그 사이사이에 수시로 나타나는 철학적 사고들로 그득하다. 그녀의 책에서 보여 지는 엄청난 분량과 다양한 사례, 끈질긴 서술은 그녀의 지적 충만함, 저술에 대한 애착과 치밀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다. 더구나 사회에서 많이 주목받지 못해왔던 노인문제를 과감하게 드러내서 사회적 변화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작가의 모습에서 당찬 용기와 사회 개혁가로서의 열정을 본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이유가 ‘우리 사회의 노인문제가 심각한 상황임에도, 침묵하고만 있는 또는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어떤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살아가는가를 묘사함으로써,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 가를 말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외적 관점과 내적 관점이란 큰 틀에서 노년을 설명해 간다. 즉, 노년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관점(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과 노인들 스스로는 어떻게 노년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관점(제2부, 세계 속의 존재)으로 나누어 노년을 검토한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에서는 노화의 생물학적 의학적 관점을 조명하고(1장 노화와 생물학), 인류학과 민족학 관점에서(2장 민족학적 자료들), 역사 및 사회학적 관점에서(제3장 역사사회에서의 노년, 제4장 현대사회에서의 노년) 노년을 살펴본다.

저자는 수많은 민족학적 자료와 역사적 자료들을 조사하고, 그 속에서 노인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 걸쳐 비교한다. 이런 시간적, 공간적 비교를 통해 노인의 조건 가운데 불가피한 것은 무엇인지, 사회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한다.

‘제2부 세계 속의 존재’에서는 인간이 나이를 먹게 되면 자기의 육체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가(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그리고 노인이 느끼는 시간과의 관계, 활동, 역사와의 관계를(6장, 시간, 활동, 역사), 또한 노인들의 심리적 특성과 그 원인을 분석하고(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은 노년을 어떻게 느꼈는가(제8장, 노년의 실례들)를 기술하였다.


보완할 점(또는 아쉬운 점)

저자의 방대한 지적 스팩트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훌륭한 책이지만, 이 책은 너무 두껍다. 그 두께로 먼저 독자를 지치게 만든다.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여 제시한 것은 본받을 만하지만 너무 많은 유사 사례로 읽는 사람을 지루하게 만든다. 또 사례마다 이어지는 침울한 표현은 문제의 심각성을 독자에게 세뇌시키려는 저자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사례를 읽다 보면 나도 침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울한 기분을 느끼면서 까지 책을 계속 읽을 독자가 있을까?

1960년대 후반에 쓰여 진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은 노인의 어려움을 너무 과대 포장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노인을 구분하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기능적 연령(Functional Age)에 의한 구분은 노인을

1. 건강한 노인(well elderly : 활동적이고 건강한 노인),
2. 미약한 손상 노인(somewhat impaired elderly : 만성적인 병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노인),
3. 허약한 노인(frail elderly : 정신적 신체적으로 몹시 쇠약하여 모든 활동을 타인에게 의존하며 시설에 입소가 필요한 노인) 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을 78세로 보면, 은퇴 후 15년에서 20년 정도를 노년으로 보낸다고 볼 수 있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건강한 노인으로 사는 기간이 훨씬 길고, 허약한 노인으로 사는 기간은 비교적 짧다.(2-3년 내외) 우리는 노년을 보내면서 ‘건강한 노인’에서 ‘미약한 노인’, ‘허약한 노인’의 단계로 이동해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노년> 에서 보여주는 사례는 거의가 허약한 노인(frail elderly)의 사례를 드는 것 같다. 누구든지 죽기 전 얼마간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몹시 쇠약한 상태를 거치게 된다.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작가의 논리에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사례들을 선택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60년대 후반 프랑스의 상태를 잘 모르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은 든다)

저자는 1960년대 후반 프랑스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책을 썼다. 이 책은 대책을 강구하는 책은 아니다. 다만 경종을 울려서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결론 부분은 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빈약한 결론 때문에 책의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추가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이 책을 다시 쓴다면

우선 책의 분량을 절반(400페이지) 정도로 줄이겠다. 유사하고 침울한 반복 사례를 줄이면서 챕터별로 인상 깊게 다가올 수 있는 몇 개의 사례를 가지고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 낼 것이다. 예증이 많다고 객관성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고, 독자들의 공감력을 강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몇 개의 사례가 오히려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노인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에서 많이 주목 받는 주제가 아니다. 지루함을 느끼게 하면 독자는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쉽고 재미나게 읽히면서 공감할 수 있는 책이 되도록 할 것이다.

노인복지문제 해결에 사회적, 국가정책적인 면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개인의 역할’ 부분도 많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봐도‘생산적 복지’,‘참여복지’등의 용어를 쓰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부분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사회적 해결방법 만으로 행복한 노후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 결국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다시 쓴다면 3부(노후, 준비된 대로 만들어진다)를 추가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 사회가 함께 준비해야 할 부분(9장, 노년을 위한 사회적 준비)과 개인들이 준비해야 할 부분(10장, 개인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기술 하겠다. 흔히 행복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는 건강, 일거리(보람 찾기), 경제력, 여가 생활, 친구(가족)이 필요하다고 한다. 3부는 급속히 고령화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 사회와 개인이 어떤 마음자세로 이를 준비해 가야 하는지를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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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10.22 10:29:51 *.97.37.242

''저자에 대하여' 에서는 거암의 글을 일정부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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