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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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신영복, 돌베개
I. 저자에 대하여 :
저자 신영복을 말하려면 통일혁명당 사건을 빼놓고 지나가기는 불가능하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알려진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의 발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찰의 발표에 의하면 남파된 간첩 김종태가 통혁당을 조직하고 혁신적 지식인과 학생 등을 대거 포섭하고 요인암살 등을 기도하다 적발되었다. 사건 관련자는 158명이었는데 문화인 종교인 학생 등이 많았다. 김종태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이문규등 4명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신영복은 군법회의 1심과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되어 고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에서는 통혁당을 조선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이남간첩조직으로 몰아갔으나, 오늘날은 이남의 독자적인 전위정당 건설로 보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당시 박정희 군부정권 아래서 민주화와 통일을 이야기하던 4.19세대와 진보인사들이 많은 탄압을 받았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던 대표적인 인사로는 조동일, 임중빈, 박성준 박사(한명숙 전 국무총리 남편) 등이 있다.
1941년 밀양에서 태어난 신영복은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중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과 전주교도소에서 20년간 복역했다. 1988년 8월 15일에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중국고전강의 등을 강의하고 있다. 출소 10년만인 1998년 3월 달에 사면복권 되었다. 1998년 5월에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손잡고 더불어’ ‘나무가 나무에게’ 등이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저자가 수형생활 동안 부모님과 형수, 제수 등에게 보낸 서간을 묶은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애정,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 수형생활의 일상과 단상, 가족에의 소중함 들을 그려냈다. 인간에 의하여 가장 상처를 받았을 것 같은 그는 20년 이라는 복역생활을 마치고 나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강조한다. 경제학을 거쳐 인문학으로 이동한 그의 관심은 인간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왜곡된 현대사의 피해자로 삶을 살았고, 수감생활 때문에 격동의 현대사에서 비켜나 있었던 그는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인간에 대한 왜곡 현상을 정확히 지적해 일깨우고 있다.
위 발자취에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 아프게 했던 일명 ‘통혁당’사건으로 인한 20년간의 옥고가 어땠을지는 『신영복의 엽서』를 보면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친필로 쓴 편지와 엽서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수감 생활 초기의 글씨는 마치 이제 막 글쓰기를 배우는 초등학생의 글씨처럼 떨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겨우 쓴 글씨의 흔적을 보면서 가슴 아팠던 기억이 떠오른다. 고문의 후유증이었으리라. 그러나 해가 갈수록 선생님의 글씨는 투박하지만 묘한 매력이 흐르는 모양으로 변화해 갔고, 그와 더불어 그림도 한 점 두 점 추가되었다. 난 그제야 안심하고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신영복 선생님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은 「함께 맞는 비」로 선생님의 소개를 마칠까한다.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권 (1998년 6월)/ 더불어 숲 2권 (1998년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년 8월) /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년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년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 12월)
「역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년)/ 사람아 아!사람아(1991년) / 루쉰전(1992년)
중국역대시가선집(1994년)
저자 홈페이지 www.shinyoungbok.pe.kr
II.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서론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까지 하지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근본적 담론 자체가 실종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P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21P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23P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신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 自己增殖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23P
과거의 어학 교육은 어학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받은 영어 교과서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되거나 심지어는 I am a dog. I bark.로 시작되는 교과서도 있었지요.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누님들의 영어 교과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는 길게 탄식하셨지요.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교과서와는 그 정신세계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천지현황과 “나는 개입니다. 나는 짖습니다”의 차이는 큽니다. 아무리 언어를 배우기 위한 어학 교재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26-27p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38p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45p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게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47p
2. 오래된 시時와 언言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초사』楚辭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모시毛詩에서는 “위정자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 초필언’ 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민요의 수집과 『시경』의 편찬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 誰知風中草復立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경』에는 이와 같은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큰쥐」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로.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62-63p
『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제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을 맞추어져야 합니다. 64p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70p
「무일」편은 주공의 사상이나 주나라 시대의 정서를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편을 통해 가색稼穡의 어려움, 즉 농사일이라는 노동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산 노동과 유리된 신세대 문화의 비생산적 정서와 소비주의를 재조명하는 예시문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71p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81p 『초사』, 「이소」離騷, 굴원의 시 중에서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 선배들로 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82p
3. 『주역』의 관계론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그릇이 집집마다 있었지요. 여러분도 물 긷는 그릇을 한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서로 비슷한 그릇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물 긷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지만 또 안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그러한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보편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5p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92p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이것은 천지의 법칙이다.
‘제’際는 만남의 의미입니다. 천은 양, 지는 음입니다. 따라서 ‘천지제야’天地際也라는 의미는 음양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천지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법칙, 즉 천지의 운행 법칙이라는 의미로 풀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춘하추동이 반복됩니다. 인간의 화복도 대체로 다시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113-114p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卽便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잇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원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130p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132p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배움과 벗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142p
중요한 것은 이 ‘습’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뿐 것이지요. 144p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149p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는 “스승이라 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우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150p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3p
덕의 의미는 『논어』의 이 구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웃’입니다. 이웃이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입니다. 심心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성과 품성의 의미라면 덕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8p
바탕이 문채 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옹야 194p
승하다는 표현은 물론 지금은 쓰지 않지요. 그러나 과거에는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승하다’는 말은 여러분의 언어로는 ‘튄다’로 해석해도 되겠네요.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 195p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199p
5. 맹자의 의義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잇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지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2p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뵈었을 때 왕이 말했다. ‘선생께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찾아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져오셨겠지요.?“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大夫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領地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士人 이나 서민庶民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 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利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맹자의 글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논어』가 선어禪語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해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서당세서 『맹자』로써 문리文理를 틔운다고 합니다. 213p
맹자는 그 사상이 우원迂遠 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패자들에게 수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맹자의 민본 사상은 패권을 추구하는 당시의 군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 249p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 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이루 상」249-250p
6. 노자의 도와 자연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4p
『노자』는 81장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은 도道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주나라가 쇠망하자 노자는 주나라를 떠납니다. 이때 관윤關尹이라는 사람이 노자를 알아보고 글을 청하자 노자가 이 『도덕경』 5천 언言을 지어줌으로써 후세에 남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258p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닙니다.
도道를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玄이라고 부리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263p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299p
노자의 철학은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 제25장)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305p
7. 장자의 소요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재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07p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장자』 외편外篇 「추수」秋水 309p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짧은 것은 늘려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仁義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仁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변무」325-326p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입니다.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은 것을 가르면 울고, 육손을 물어뜯어 자르면 소리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장자가 주장하는 것은 인의仁義는 사람의 천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천天이 무엇이며 인人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장자는 간단명료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326p
'책‘의 한계에 대한 명쾌한 지적
세상에서 도道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形과 색色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名과 성聲일 뿐이다. 「천도」338p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산목」 343p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 되어 있다는 비판은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343p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득어망전得魚忘筌 득토망제 得兎忘蹄’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린다”는 뜻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잡편 「외물」355-356p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맹자에 따르면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66p
"큰 나라가 약소국을 공격하고, 큰 가家가 작은 가를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억압하고, 간사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신분이 높은 자가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천하의 해로움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377p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386p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386p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하늘에는 변함없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요순 같은 성군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걸주와 같은 폭군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르게 응하면 이롭고 어지럽게 응하면 흉할 뿐이다. 농사를 부지런히 하고 아껴 쓰면 하늘이 가난하게 할 수 없고, 기르고 비축하고 때맞추어 움직이면 하늘이 병들게 할 수 없으며, 도를 닦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 천론 406p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 길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사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천론 40p
대교大巧 즉 뛰어난 장인匠人은 손대지 않고 남겨두는 데서 그 진가를 발휘하며, 뛰어난 지자(大智)는 생각을 남겨두는 데 그 진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410p
성악설의 이해와 오해
성性은 선악 이전의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과 선악을 조합하여 개념 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412p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천성과 천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순자의 성악설은 그의 사회론을 전개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14p
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 424p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水)이 잘 흘러가도록(去)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426p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養生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위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428p
10. 법가와 천하 통일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451p
현실을 보기 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452p
「문전」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계공이 한비자에게 충고합니다.
“오기와 상앙 두 사람은 그 언설이 옳고 그 공로 또한 대단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기는 사지가 찢겨 죽었고 상앙은 수레에 매여 찢어져 죽었습니다. 지금 선생이 몸을 온전히 하고 이름을 보전하는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걱정됩니다.”
이 충고에 대한 한비자의 대답이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보게 합니다. 동시에 법가 사상의 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한비자의 답변은 그 요지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선왕의 가르침을 버리고 (위험하게도) 법술을 세우고 법도를 만들고자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지럽고 몽매한 임금의 박해를 꺼리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한 몸의 화복을 생각하여 백성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것은 탐욕스럽고 천박한 행동입니다. 선생께서 저를 사랑하여 하시는 말씀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저를 크게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458p
11. 강의를 마치며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큰 것이고 충분히 넓은 것입니다.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474p
자본주의 체제가 양산하는 물질의 낭비와 인간의 소외, 그리고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보다 근본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당면한 문명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507p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509-510p
III. 내가 저자라면
영양가 만점 밥상
어느 연기자의 수상 소감이 떠오른다. “난 그저 스텝들이 차려준 밥상을 맛있게 먹었을 뿐입니다.” 이 책이 그렇다. 저자는 태산준령의 동양학을 자신의 솜씨로 맛있게 요리했다. 11가지의 밥과 반찬을 준비했다. 고품격 한정식이 이렇다면 나는 배가 터져도 좋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 드는 법도 익히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내가 만약 동양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좀 더 풍부했더라면 책속에 더욱더 푹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밥과 반찬은 숟가락 드는 법을 잘 모르더라도 미각만 살아있다면 충분히 맛을 느낄 수 있다. 『강의』는 범인들에 맞게 눈높이가 조절되어 있다. 그를 찾은 손님들이 동양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했거나 논어, 맹자와 같은 이름 정도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다.
시공을 넘나드는 책읽기
저자는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면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책의 곳곳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그 시기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저자의 친절한 해설은 책을 읽으면서도 마치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시대적 상황에 대한 몰이해는 과거의 텍스트를 오늘의 잣대로 잘못 해석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을 넘나드는 책읽기다. 한꺼번에 읽으려고 덤볐다가는 시간적 멀미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자를 잘 몰라도 전혀 부담 없는 동양철학 책
이 책은 다른 동양철학 서적과 다르게 한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굳이 한문을 읽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한문을 다 지운다 해도 책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한자로 원문을 쓰면서도 현재에 맞게 번역한 내용은 이것이 옛날 책인가 싶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없어진 과거의 언어를 지금의 언어로 변화시킨 점을 보면 저자의 학문적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쉽게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인문학의 거장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다. 많은 양을 읽으려 하지 말고 한 장 한 장을 음미하며 읽으면 동양학의 진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적절한 우화나 현실의 일반적인 문제점들을 빗대며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이어놓는 저자의 통찰에 감탄한다.
노자 ? 장자에 대한 저자의 마음
노자와 장자를 이야기 하면서 저자는 그분들 대접을 소홀히 한 것 같다는 말을 남기며 장을 마무리 했다. 이 대목은 저자가 노장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굳이 노자 ? 장자를 여기에 끌어들인 이유는 나도 저자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난 저자가 노자 ? 장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해주기를 바라면서 책을 읽었다. 왠지 그쪽에 더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분들에 대한 나에 애착이며 집착이다. 그러나 저자는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다. 동양학 전반을 한 책에 담아낸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모한 도전일 수 있다. 요점정리를 해놓은 전과를 보고 침소봉대針小棒大의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저자는 책의 끝부분 그러니까 강의에서는 마지막 시간이었을 그 때에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라고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두고두고 읽기에 충분한 책
『동양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의 저자 도올 김용옥은 ‘고전古典을 두고두고 책상위에서 읽을 만한 책’이라고 했다. 고전이 갖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책이 처음 나온 해에 사서 일 년에 한번 정도 씩 책장을 다시 넘겼다. 이번엔 아예 작정을 하고 책속에 느낌이 닿았던 대목을 옮겨 적었다. 역시나 구절구절의 의미가 새롭다. 왜 두고두고 읽어야 하는지 이제 조금씩 알겠다.
‘아는 만큼 배운다.’고 한다. 여름에 비 오고, 겨울에 눈 오는 이야기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책은 그 책을 읽을 당시의 내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것은 책이 이성적인 영역이라기보다 감성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때에는 공자의 이야기에 끌림을 받을 가능성이 많지만 해골이 복잡한 상황 특히 직장 내 암투나 정치판을 보면 한비자에 더욱 공감할 것이다.
기원전 3000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장장 5000여년에 이르는 시기동안 저마다 적어도 한 세대를 풍미했던 이론의 집대성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태평성대인 때도 있었고,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의 시기도 있었다. 또한 통일을 이루어 사상적 체계를 재정비하려는 시기도 있다. 국가의 큰 흐름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임에 틀림없다.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면
이 책은 나에게 과분하고도 넘쳐흐른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점은 『주역』에 대한 설명이다. 3장 『주역』의 관계론은 다른 장에 비해 이해도가 떨어진다. 물론 이것은 책을 읽는 내 지식의 한계에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더 아쉽다는 것이다.
8괘, 64괘와 괘사, 효사와 같은 것은 일반적으로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면 웬만큼 설명해 줘서는 알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책은 이러한 것에 중심을 두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장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졌다. 『주역』에 나오는 텍스트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그 메시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부분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재의 관점에서 예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변화’를 이야기한 『주역』의 이야기가 현재에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그 실질적인 예가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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