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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3일 23시 35분 등록

북리뷰 46: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책: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 박찬국 지음. 동녘. 2004.


***저자에 관하여

박찬국은 1960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를 ,독일 뷔츠불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호서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논문: 인간 소외의 극복에 대한 하이데거와 마르크스 사상의 비교 고찰
현대에 있어서 고향 상실의 극복과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
니힐리즘의 기원과 본질 그리고 극복에 대한 니체와 하이데거 사상의 비교 고찰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하버마스의 하이데거 해석과 비판에 대한 고찰
현대 기술문명에 대한 하이데거와 프롬의 사상

저서: <하이데거와 나치즘>
<에리히 프롬과의 대화>
<해체와 창조의 철학자, 니체>
<하이데거와 윤리학>
<환경문제와 철학>
번역서: <헤겔 철학과 현대의 위기>
<마르크스 주의와 헤겔>
<실존철학과 형이상학의 위기>
<니체와 니힐리즘>
<니체 유고>
<니체의 아침놀> 등등.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차례
책머리에

1장 지금 왜 하이데거인가?
2장 존재 물음과 불안에의 용기
  1. 출생에서 프라이부르크 대학 정교수가 될 때까지
  2.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하이데거의 초기 사상
3장 나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1. 나치 참여 이후부터 독일 패전까지
  2. 현대 기술문명과의 대결
4장 소박한 자연과 사물로의 귀환
  1. 대학 복귀 후부터 서거까지
  2. 소박한 자연과 사물로의 귀환
5장 맺으면서: 하이데거 철학의 의의

용어 해설 / 하이데거 연보 / 참고 문헌

 

1장 지금 왜 하이데거인가?

14. 모든 철학은 인간의 삶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인 한 모든 철학은 자신의 시대와 대결하면서 자신의 시대가 계속 되어야할지 아니면 변혁되어야 할지에 대해 결단을 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철학은 자신의 시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자신의 시대를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일정한 시대에 인간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고 추진시키는 결정적인 관심사가 철학을 통해서 개념적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에서 하나의 시대가 집중되고 결정되는 것이며, 자신의 본래적인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15. 하이데거가 살았고 하이데거 자신이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시대는 기술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기술문명과의 사상적 대결이다. 모든 위대한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도 시대의 방관자로 머물지 않고 시대의 고뇌를 자신의 고뇌로 삼으면서 이 시대의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활로를 모색하는 데 자신을 바쳤다.

17.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고향 상실( Heimatlosigkeit)의 시대라고 보았다. 우리 시대는 고향을 잃고 방황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여행,
겨울날 밤에
한줄기 빛도 없는 하늘 아래서
우리는 길을 찾아 헤맨다.
     -스위스 위병의 노래

18. 20세기는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불린다. 20세기에 이룩한 100년 동안의 기술적 진보는 인류가 몇천 년 동안 이룩한 기술적 진보를 추월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기술적인 진보라는 화려한 외관의 이면에는 한갓 계산 가능한 노동 에너지로 취급되면서 기계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피땀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은 소비 물자를 갖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노동하고 소비하는 동물’이 되고 말았다.

19. 또한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불린다. 20세기만큼 자유와 평등, 정의와 인류애를 내세운 이데올로기들의 선동이 격렬하게............ 폭력과 살육의 시대이지만 이러한 폭력과 살육이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허위와 기만의 시대다.

20세기는 커다란 희망과 환멸이 교차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기술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지만 이제 기술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기술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기술이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복제기술과 핵무기, 생태계 파괴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이다.

20.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큰 희망을 걸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이데올로기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세계는 황폐해졌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린 시대가 과학기술시대라고 하이데거는 말하고 있다.

20세기가 끝나고 이제 21세기에 들어섰지만 21세기는 20세기를 넘어서는 어떠한 희망의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

21. 모든 국가가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진력할 뿐이고 사람들은 시장경제에 적응하기 바쁠 뿐이다. 이제 이데올로기들 간의 투쟁 못지않게 치열한 경제전쟁이 전개되고 있다.

각국은 세계적인 규모로 전개되는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국민들을 총동원하고 있다. 모든 나라가 교육개혁, 행정개혁, 경제개혁 등과 같은 총체적인 구조조정을 통해서 모든 국민을 언제든지 적재적소에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노동 에너지로 만들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는 아랍과 이슬람의 자주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미국에 가한 전대미문의 테러와 미국의 철저한 보복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21세기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벌써부터 시사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하였다. 현대에는 인간이 마음놓고 발붙일 수 있는 고향이 없다는 것이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22. 고향은 예스러운 안정된 삶의 세계이며,

내가 떠나왔지만 그리워하는 추억의 장소이다.

고향은 도회지처럼 노출된 때묻은 공간이 아니라 감춰져 있으면서 아직 순수성을 간직 한 세계를 의미한다.

고향은 자연에 안겨있는 아늑한 곳이다.

하이데거에게 고향은 현대 기술문명에 대한 대칭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고향인 농촌 메스키르히의 들길을 회상한 <들길 Feldweg>이란 글에서 “이러한 고향에서 인간은 들길 옆에 튼튼하게 자란 떡갈나무처럼 광활한 하늘에 자신을 열고 어두운 대지에 뿌리를 박고 산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떡갈나무와 마찬가지로 “드높은 하늘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감싸안은 대지의 보호에 감사하면서 살 경우에만 그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하면서도 견실한 생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23. 이러한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또 그 안에서 죽어가는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한 자연의 빛 안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빛을 발하는 사물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자신을 열 줄 아는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문명의 위기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고향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고향을 상실한 데서 비롯되는 공허감과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하고 물질적인 소비와 향락을 추구한다.

이데올로기의 광적인 추구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고향을 상실한 인간들이 잃어버린 고향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된 세계를 통해서 대신하려고 하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24. 하이데거에게는 단순 소박한 자연을 망각한 채 인위적이고 복잡한 기술만을 추구하는 우리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궁핍한 시대다. 그러나 현대인은 삶의 궁극적인 지반을 상실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시대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대라고 자부한다. 하이데거는 우리 시대 최대의 위기는 이러한 오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오만 때문에 인류는 파멸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25. 하이데거가 걸은 사유의 도정은 일생동안 상당한 변화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작위와 인위가 지배하는 과학기술시대에 단순 소박한 자연과 어우러진 고향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6. 하이데거는 휠덜린의 시적인 직관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했으며 휠덜린과 함께 새로운 시와 사유를 세움으로써 플라톤 이래 서양 2500년 역사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했다.

27. 하이데거가 말하는 위대한 사상가들이란 새로운 시대와 세계를 여는 사상가들이다. 이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시야에서 세계를 보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각 시대의 존재 이해, 즉 존재자 전체의 본질과 근거에 대한 이해가 그 시대의 모든 활동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33. 하이데거의 철학적인 근본 물음인 존재 물음(Seinsfrage)은 이런 의미에서 삶과 시대에서 유리된, 순수하게 강단철학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현대문명이 부딪히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려는 절박한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34. 하이데거는 서구의 역사를 규정해온 ‘눈앞의 존재’라는 존재 이해에 대해서 “존재자가 자신을 열어 보이면서 우리에게 다가옴”이라는 의미의 임재야말로 근원적인 존재 이해라고 본다.

36. 우리가 존재자들의 근원적인 존재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진리를 내보이면서 다가오는 존재자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태도를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존재자들이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 보이면서 임재하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어떤 특정한 존재자에 대해서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가 그렇게 임재함을 경험한다.

37. 그는 인간 자신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가 은은한 빛 안에서 자신이 환히 드러나는 것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전체의 開顯(개현)을 경험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자가 ‘전체의 열린 터’안에서 자신의 빛을 발한다. 이러한 전체를 하이데거는 ‘근원적인 의미의 자연’이라고 부르고 혹은 ‘존재 자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전체의 열린 터 안에서 우리는 모든 존재자를 근원적으로 경험한다.

38. 하이데거의 사상은 난해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가리키려고 한 사태는 사실 단순 소박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정교하게 조직된 복잡한 현대문명을 위대하다고 치켜올리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현대문명 역시 그것이 지반으로 삼는 소박한 자연을 망각할 경우에는 사멸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그는 존재에 대한 “경건한 사유”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의미의 존재 물음이야말로 현대인에게 부과된 과제라고 본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문제 의식에 대한 반응은 보통 극렬한 긍정과 부정으로 나뉜다. 긍정하는 사람들에게 하이데거는 단순한 사상가를 넘어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열어 보이는 예언자인 반면에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하이데거는 기술문명을 거부하고 소박한 자연으로의 회귀를 요구하는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이다.

어떠한 평가가 옳든 하이데거가 개척한 철학적 문제의식은 현대의 정신계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으며, 현대가 나아갈 길을 진지하게 사유하려는 자는 누구든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자리잡고 있다.

39. 이 책은 하이데거의 사상을 가능한 한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려고 한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부분, 존재 물음과 불안에의 용기-초기사상
둘째부분, 나치혁명의 소용돌이-나치부터 패전까지
셋째부분, 소박한 자연과 사물로의 귀환 -패전 이후 부터 죽을 때까지

 

2장 존재 물음과 불안에의 용기

44.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1889년 9월 26일 독일 남서부 메스키르히(Messkirch)에서 태어났다. 메스키르히는 당시 인구 2000명 정도의 조그만 마을이었고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메스키르히는 거의 전 주민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할 수 잇을 정도로 가톨릭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시골이었다. 이 마을의 중심에는 성 마르틴 성당이라는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성단이 있었고 하이데거의 생가는 바로 성당 옆에 있었다. 성당은 영주가 살았던 성을 마주보고 이 성을 지나면 넓은 들판을 통과하는 들길이 뻗어 있었다.

성 마르틴 성당을 중심으로 메스키르히에는 신이 깃들여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하늘을 가리는 고층빌딩도 없고 주변을 둘러싼 밀밭과 들길이 마을이 뿌리박고 있는 대지를 환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신과 하늘과 대지, 죽어야 할 인간들이 함께 만나고 있었다.

45. 하이데거는 죽을 때까지 이 마을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메스키르히와 같은 고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하이데거는 평소에 모든 위대한 것은 고향과 전통에 뿌리 박는데서 생성된다고 생각했다.

하이데거는 황폐져만 가는 기술문명에 대해서 자신의 고향 메스키르히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이데거가 고향에 대해 보인 커다란 애정에 보답하듯 메스키르히 시는 하이데거를 명예시민으로 임명했고 하이데거를 기리는 노래까지 만들었으며 하이데거의 이름을 붙인 김나지움을 세웠다.

하이데거의 아버지는 성 마르틴 성당의 성당지기였으며 술통 만드는 일을 겸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성적이고 과묵했던 반면에 어머니는 밝고 자상했던 것 같다. 하이데거의 어머니는 자주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

48. 프라이부르크 김나지움을 마친 하이데거는 신부가 되기 위해 예수회에 들아갔지만 2주간의 시험적인 수련기간 후 심장질환 때문에 예수회 신부가 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이데거는 심장의 통증이나 천식 발작 때문에 호흡 곤란을 일으키고는 했다. 이에따라 에수회 신부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일반 신부가 되기 위해서 1909년 겨울학기부터 프라이부르크 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49. 신부가 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 대학 신학부에 입학한 하이데거는 심장병으로 인해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았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메스키르히에서 요양하였다.

50. 하이데거는 이렇게 건강 때문에 어려운 시절을 경험했지만, 천성적으로 스포츠를 즐기고 잘 하였으므로 축구와 스키, 경보 산행 등을 통해서 건강을 되찾고 장수하였다.

52. 1915년 7월 27일 ‘역사과학에서의 시간 개념’이라는 시범 강의와 함께 하이데거는 사강사(Privatdozent)로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하이데거는 사강사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명강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는 강의에서 끈임없이 물음을 던지면서 사태의 근거에까지 철저히 육박해 들어갔다. 그의 사유에서는 이성과 정열, 정신과 삶이 하나가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그동안 추상적인 이론체계로 형해화되었던 사유가 하이데거를 통해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철학용어 대신에 일상적인 독일어를 철학용어로 사용하면서 철학과 삶을 밀착시키는 동시에 일상적인 독일어에 깊이와 신비를 부여했다.

54. 하이데거는 학생들의 날카로운 지성보다는 학생들 속에 잠들어 잇는 근본 기분에 호소하고 그것을 일깨우려고 했다.

55.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학생들은 단순히 지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 전체를 통해서 사유하는 하나의 철학을 볼 수 잇었을 것이며, 하이데거의 강의를 들으면서 또한 자신의 실존 전체가 불려나오고 각성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학생들이 하이데거의 강의에 매료되었던 이유일 것이다.

56. 1917년 하이데거는 수강생 중 한사람이던 엘프리데 페트리와 결혼했다. 루터파 신자였던 엘프리데는 하이데거를 위해서 가톨릭식 결혼을 받아들였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영세를 받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엘프리데는 일생 동안 하이데거를 일정한 시간에 깨워주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게 하는 등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하이데거의 제자들과 함께 슈바르츠발트의 토트나우베르크에 산장을 만들어 그가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58. 1919년에 하이데거는 후설의 조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약 5년 동안 후설의 조교로 일하였다. 그러나 후설이 비힙리주의로 배척한 생철학을 하이데거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치 소원해졌고 1931년 베를린 강의에서 후설이 하이데거와 셸러의 철학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 되었다.

60. 그러나 하이데거가 나치체제 아래서 갈수록 고립되어가는 후설을 위로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자이자 후임자였음에도 후설이 1938년 4월 27일 세상을 떠났을 때 하이데거가 장레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63. 마르부르크에 재직하던 1924년에 하이데거는 자신의 제자 한나 아렌트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당시 18세였고 두사람의 나이차는 열 일곱 살이었다.

64. 두사람의 사랑은 1924년부터 1928년까지 4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 기간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썼다.

65. 1927년 <존재와 시간>이 간행되면서 하이데거는 순식간에 세계적인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 저작은 미완성이었음에도 철학뿐 아니라 신학과 문학, 심리학 등 지성계 전체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일약 철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66. 1928년 하이데거는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 취임 강연으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강연을 했다.

71. 죽음, 오, 죽음! 그러나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유있게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73. 이반 일리치는 사람들의 동정과 관심을 간절하게 바랐지만 그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동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반 일리치는 울고 싶었고 애무를 받고 싶었지만 동료판사가 문병을 왔을 때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이 진지하고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의 가식과 이반 일리치 자신의 가식이 그가 죽었을 때 그 무엇보다도 해를 끼쳤다.

74. 그는 자신의 삶이 역겨운 것이었음을 발견하고 환멸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아무런 죄도 없고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왔는데도 왜 이렇게 공허감과 고뇌 속에서 죽어야하는지 항변했다.

75. 그는 자신의 삶을 참회하며 아내에게도 용서를 빌었다. 그는 가족들을 가엾다고 느꼈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죽음 대신에 그는 광명을 발견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자신에게 말하면서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76. 사람들은 ‘죽은 사람은 그지, 나는 아니야’ 라고 생각하고 ‘그가 죽었을 뿐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죽음이 이반 일리치에게만 닥쳐온 특수한 사건에 불과하며 자기에게는 아주 먼 일인 것처럼 생각했다.

77. <존재와 시간>은 각자적인 현존재가 갖는 본질적인 존재 구조를 분석한 것이다.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상실하고 어떻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지, 그리고 일상속의 자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진정한 자기는 무엇인지를 분석한 것이다.

79. <존재와 시간>에는 신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모든 기독교적인 전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을 파악하려고 한다.

80.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라고 말했다. 이 경우 실존이란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인간 특유의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

84. 흔히 우리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으로 승인된 사고방식에 따라서 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사회적 관습과 여론이 결정해놓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비본래적인 실존이라고 규정한다. 비 본래적이라는 말은 내가 나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85. 하이데거는 이러한 비 본래적인 삶은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성으로 점철된 삶이라고 말한다.

86. 잡담과 호기심은 타인과 사태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관심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잡담과 호기심에는 항상 타인과 사태에 대한 애매하고 무책임한 추측만 있을 뿐, 애정어린 이해와 관심, 함께 책임지려는 자세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재는 존재자들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한다. 현존재의 이러한 존재방식을 ‘세계내 존재’라고 말한다.

93.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연관체계인 세계는 현존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 각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세계에 살게 된다.

96. 하이데거는 구두라는 도구가 갖는 위와 같은 ‘존재의 충일’을 신뢰성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도구의 진리라고 하였다.

97. 도구의 유용성은 본질적으로 신뢰성에 의거한다. 도구가 신뢰성을 상실할 경우 도구는 한갓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도구에 대한 사용은 남용이 된다.

하이데거가 도구의 신뢰성이라고 한 것은 우리말의 情(정)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98. 이반 일리치에게 죽음은 단순히 삶이 끝나는 종점이 아니라 일종의 개시력을 갖는 것이다. 죽음은 이반 일리치가 살아온 삶은 공허하고 가식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개시해 보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들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의 죽음이다. 나는 그 어느 누구와도 구별되는 유일한 삶의 역사를 갖는다.

우리 각자는 죽음을 전적으로 홀로 떠맡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101. 죽음은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불확실해도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죽음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침입해올 수 있다. 죽음은 우리 앞에 끈임없이 박두해 있는 가능성이다.

103.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불안이라는 기분 속에서 경험하기 때문에 그에게 죽음은 실존적인 고뇌와 후회를 동반하면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모든 이해는 ‘기분 지어진 이해’라고 말한다. 동일한 죽음이라도 어떠한 기분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이해된다는 말이다.

불안이란 기분을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안주해온 일상적인 세계는 의미를 상실한다.

105. 불안은 나의 심연으로부터 치솟아 올라 나를 송두리째 사로잡으면서 ‘내가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이렇게 존재 한다’라는 적나라한 사실 앞에 세운다.

106. 우리는 불안이라는 기분에 사로잡힐 때 ‘왠지 모르게 섬뜩하다’고 느낀다. 이반 일리치가 죽음 앞에서 섬뜩하게 느낀 전율은 바로 이러한 섬뜩함이다.

109. 현존재가 태어나자 마자 죽음으로 던져진 존재인 한 우리 실존의 근저에는 항상 불안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불안이 대두되지 못하도록 불안을 억누른다.

110. 공포는 본래 비본래적인 실존방식에서 불안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은 우리가 아무리 도피하려 해도 공포라는 변형된 방식으로 우리의 실존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115.불안이 우리를 본래의 실존적 문턱으로 이끄는 기분이라면 불안이란 기분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면서 죽음으로 선구하는 것은 본래적인 실존으로 비약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와 함께 불안이란 기분이 기쁨으로 전환되는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으로의 선구야말로 세게가 근원적으로 자신을 개현하기 위해서 현존재가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실존적인 수행이다.

116. 불안을 인수하면서 죽음으로 선구함으로써 현존재의 삶은 그전과는 달라진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이 기만적이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집착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광명’을 경험하게 된다. 이 경우 광명을 보았다는 것은 그가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고 자신의 아내와 딸을 비롯한 모든 인간과 모든 존재자를 새롭게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딸과 아내에게 용서를 빈다.

118. 인간은 자신을 보통 자신의 삶과 세계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은 탄생과 죽음을 통해서 불가항력의 존재 전체에 포섭된 유한한 존재자다.

119. 그러나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과 다른 점은 인간이 단순히 존재 전체의 순환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해서 자신의 삶과 존재 전체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120. “근원적으로 무화하는 무의 본질은 그것이 현존재를 무엇보다도 존재자 자체와 직면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121. 하이데거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에 열려있는 상태가 진정한 의미의 자유라고 말한다. 무의 근원적 개시를 통해서만 현존재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유의 상태에서만 인간은 내적으로 충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내적으로 충만한 존재가 될 경우에만 인간은 다른 존재자의 신비를 경험하고 그것들을 존중할 수 있다.

123. 우리는 앞에서 이반 일리치가 육체적인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괴로워하던 어느 날 자신의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보았다. 그 목소리는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묻는다.

양심의 소리는 세인의 잡담과 달리 소리가 없으며, 애매하지도 않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것은 말없이 부르면서 우리에게 본래적인 실존 가능성을 개시하고 이러한 본래적인 실존 가능성에 대한 책임의식을 일깨운다.

126.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지금 이순간 온몸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은 그렇게 마냥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27. 이런 맥락에서 막스 뮐러는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 생의 일회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의 시간은 한없이 늘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진정하게 충만한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128. 따라서 우리의 삶은 죽음에 눈을 감고 삶에 몰두하는 것을 통해서 충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자신의 삶이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 진중한 삶이 되도록 항상 깨어 있는 것을 통해서 충실해 진다.

130. 불안을 인수하면서 죽음으로 선구하는 결단은 현존재가 새로운 화젯거리를 좇아다니는 산만한 분산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근원적인 통일을 회복하게 되는 극적인 사건이다.

131. 우리는 죽음 앞에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던져져 있는 자신의 존재에 직면하면서 우선 삶의 우연성과 유한성을 철저하게 경험하게 된다.

132.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자들의 궁극적인 근거인 존재를 시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면서 신앙이나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초 시간적인 근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무한한 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 하나의 사물처럼 지속적으로 머무르려고 한다.

134. 나의 존재가 언제라도 죽음을 통해서 끝날 수 있고 내 삶의 순간순간이 죽음과 닿아있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존재 자체를 매순간마다 경험할 수 있으며 이와 함께 각 순간에 대해서 충만한 기쁨이나 온몸이 저리는 회한도 느낄 수 있게 된다.

135.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는 시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하는 것이다.

136. 우리는 보통 영원을 우리의 목숨이 차안에서든 피안에서든 무한히 지속되는 것과 동일시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죽어가기 직전의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긴 시간을 모두 합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충만한 영원을 경험한다. 이러한 영원의 체험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순간을 살더라도 얼마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느냐다.

우리는 생이 의미로 가득찬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치열한 순간을 기다려야 하고 매 순간을 그렇게 경험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의 존재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유한한 시간일 경우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발견해야 하고 이러한 시간의 심연에서 고동치는 순간에 대한 감각을 계발해야 한다.

137. 그러한 순간은 이반 일리치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근본적인 변혁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기계적인 외피를 뚫고서 그동안 은폐되고 억압되어 왔던 진정한 삶의 힘이 분출되는 예외적인 순간이다.

139. <존재와 시간>은 루터와 키에르케고르에서 비롯된 프로테스탄트적인 신앙 체험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체험이란 교회를 통해서 제도화된 신앙이 제공하는 기만적인 위안을 포기하고 죽음 앞에서 홀로 불안과 절망으로 전율하면서 신으로 도약하는 극적인 체험이다.

145.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이러한 우상들이 진정한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갓 미봉적인 도피처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주는 사건이다. 따라서 죽음은 최고의 개시력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에게 철학은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죽음의 연습’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세계 구성이나 존교적인 피안에 의존하는 것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현존재에게 항상 임재해 있음을 보이면서 우리를 결단의 칼날위에 세우려고 한다.

151. 철학은 “철학 함 ”으로써만 존재한다. 이 경우 철학 함은 각자적인 실존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이며, 자신과 세계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에 경이와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들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철학 함을 우리들 각자의 실존적인 삶의 현장에 뿌리박게 하면서 그러한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사태 자체를 엄밀하게 분석하려고 했다. 하이데거는 ‘실존적인 삶의 현장을 무시하는 주지주의적인 합리주의’도 , ‘엄밀한 개념적 분석을 거부하고 직관과 체험만을 주창하는 비합리주의’도 거부한 것이다.

“생으로부터 분리된 합리주의적인 철학은 무력하다. 이에 비해 비힙리주의적인 신비주의는 맹목적이다.”

152.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예리함과 아울러 불안을 인수하면서 죽음으로 선구하는 실존적인 진지함이 필요하다.

 

3장 나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154. 1933년 5월 1일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이 되었다. 이당시 독일에서는 나치가 전권을 확고하게 굳힌 상태였고 하이데거는 총장 취임 직후 나치스에 입당하였다.

총장 취임 후 몇 개월동안 하이데거는 나치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하이데거는 연설과 글을 통해서 나치즘의 대의를 설파하고 학생들이 나치운동 대열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156. 야스퍼스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총통을 정신적으로 지도하기’를 원했다.

157. 특히 마르쿠제나 한나 아렌트, 카를 뢰비트 같은 유태인 제자들이 받은 충격은 하이데거에 대한 큰 실망과 환멸로 이어졌다.

161. 하이데거는 극좌세력의 대두를 막고 독일의 안정과 국민적 통일을 회복함으로써 연합국들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세력은 나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62. 하이데거는 죽을 때까지 1933년의 국민적 궐기를 독일 민족과 서구 전체의 정신을 혁신할 수도 있는 호기로 보았으며 그러한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 했다.

164. 하이데거는 대학생들로 하여금 노동에 참여하게 하는 한편 노동자들에게는 대학을 개방하려고 했다.

166. 1934년 2월 총장에 취임한지 1년도 안되어 하이데거는 총장직을 사임했고 이는 즉시 수리되었다.

167. 1934/35년 겨울학기에 하이데거는 최초로 횔덜린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1934년부터 하이데거는 히틀러 대신 휠덜린이라는 다른 영웅을 선택한 것이다. 이때부터 횔덜린은 그에게 사유의 방향을 지시해주는 시인이 된다.

169. 하이데거는 총장직 사퇴 이후 자신이 당의 감시를 받아왔다고 말했다. r,리고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은 당과의 협의 하에 교수들을 ‘전혀 불필요한 교수’, ‘반쯤 불필요한 교수’, ‘불가결한 교수’로 분류했는데, 하이데거는 첫 번째 부류의 맨 앞에 기록되었다. 1944년 11월에 하이데거는 국민 돌격대에 소집되었다.

172. 1945년 5월 독일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났다. 독일 패전 후 프라이부르크는 프렁스 점령군이 지배하게 되었고 하이데거의 집과 장서는 압수되었다. 1945년 9월 나치 정화위원회는 ‘하이데거는 교수직을 사임해야 하지만 사임 후 제한된 강의는 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이 판결에 대해 일부 교수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 결과 1945년 12월에 다시 조사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다.

1947년 3월에 프랑스 군정은 하이데거의 교수직을 무기한 박탈하고 강의도 금지했다. 1949년 7월 프랑스 군정 당국은 나치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계를 ‘당에 복종하지 않는 형태로 동참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4장 소박한 자연과 사물로의 귀환

242. 독일 패전 후 좌절과 시련에 봉착한 하이데거는 1949년 제자 페체트의 주선으로 브레멘에서 강연을 한 이후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저술과 강연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53년에는 사르트르가 하이데거를 방문하는 등 저명한 철학자들과 시인들, 심지어 정 재계의 지도자들까지 하이데거를 만나고 싶어했다.

1951년 9월 바덴 주 교육당국에 의해서 하이데거의 공식적인 복권이 이루어졌다.

243. 1966년 9월 23일 하이데거는 <슈피겔>지 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나치 참여에 대해서 해명하고 기술시대에 철학이 갖는 의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이 인터뷰는 하이데거의 요구에 따라 그가 죽은 뒤인 1976년에야 발표되었다.

1969년 9월 24일 하이데거는 독일 제2 TV(ZDF)가 그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마련한 인터뷰를 했다.

1975년부터 <현상학의 근본 문제들>을 필두로 ‘하이데거 전집’이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이 전집은 100권 이상의 방대한 전집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는 어떠한 고정된 이론체계에 집착하기보다는 사유의 사태에 비추어 언제든지 사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도상에 서있는 사유’를 강조해 왔다. 따라서 그는 전집 간행을 통해서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걸은 ‘사유의 길들’을 보여주려고 했다.

245. 1976년 5월 26일 하이데거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87세 였다. 그는 자신의 평소 희망대로 고향 메스키르히에 묻혔다. 묘비에는 십자가 대신에 그가 일생동안 청종하려고 했던 존재를 상징하는 별 하나가 새겨졌다.

그리고 그의 아내 엘프리데 하이데거는 1992년 3월 21일 아흔 여덟살의 나이로 서거했고 남편 곁에 묻혔다.

250. 하이데거는 사유를 의미하는 독일어 ‘Denken'을 감사를 의미하는 독일어 ’Danken'으로부터 해석하고 있으며 이런 종류의 감사야말로 전통 형이상학에서 망각된 진정한 사유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라는 것은 감사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252. 경이와 경외에 사로잡혀 존재의 소리없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발하는 모든 말이 시이며 그렇지 않은 말은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 쓴 시라도 시가 아니다.

259. 단순 소박한 자연과 사물로의 귀환을 통해서 현대 기술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하이데거의 생각은 그가 말년에 쓴 서적인 <들길>에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하이데거는 이 글에서 자신의 고향인 메스키르히의 들길을 회상하면서 우리가 고향의 들길에서 발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촉구하였다.

260. 하이데거는 들길이야말로 자신의 사상이 자라난 장소라고 보았다. 그것은 들길에서 세계 전체가 가장 환히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261. 하이데거는 부활절 즈음에는 들길에 싹들이 피어나고 목장은 활기를 되찾으며, 성탄일 즈음에는 들길이 눈보라 속에서 가장 가까운 언덕 뒤로 사라진다고 썼다.

들길은 계절의 변화와 만물의 소생과 휴식이 가장 여실하게 경험되는 곳이다. 또한 들길에서 경험되는 봄과 겨울은 신의 부활과 탄생을 상기시킨다. 들길은 인간과 대자연, 인간과 신의 만남이 일어나는 장소인 것이다.

아울러 하이데거는 “들길에는 십자가가 서있다”라고 쓰고 있다. 들길에는 신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길은 인간이 신과 자연, 다시 말해 세계 전체가 가장 분명하게 경험되는 장소이고 세계 전체를 파악하려는 철학이 행해지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263. 하이데거는 동일한 것, 단순 소박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들길은 항상 동일하고 단순하며 소박하다. 거기에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동일하게 반복되고 하나의 떡갈나무가 태어나서 죽고 자라고 죽으면 또 다른 떡갈나무가 태어난다.

266. 들길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환히 열린 세계를 경험하며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경험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자유를 이렇게 환히 열린 세계로부터 사유했다.

우리는 이 터전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밝은 기쁨과 아늑함을 경험한다. 현대인의 불행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터전을 상실함으로써 항상 부유하고 방황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267. 들길에서는 황랼한 겨울 바람과 풍요로운 가을 햇볕이 만나고 기대에 찬 탄생과 평온한 죽음이 만나며 유년시절의 철없는 유희와 노년의 성숙한 지혜가 서로 마주본다.

269. <들길>은 하이데거가 머리에 떠오르는 감상적인 시상을 붓 가는대로 옮겨놓은 글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그 어떤 철학 논문보다도 더 엄밀하게 사유하고 있으며 철학의 근본 물음과 대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존재, 신, 세계, 인간, 선, 아름다움, 언어, 노동, 현대사회의 본질 등과 같은 철학적인 근본 물음에 대해서 하이데거가 도달한 궁극적인 통찰이 압축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만 하이데거는 자신의 글이 시적인 수필식으로 쓰이게 된 것은 자신이 지향하는 사태 자체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자신이 본 사태는 근거를 낸정하게 추궁해 들어가는 논증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오히려 우리의 온몸으로 감응할 것을 요구하는 사태라는 것이다.

270. 하이데거가 보기에 훌륭한 시란 시인이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자의적인 변덕을 배제하고 사태 자체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 엄격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271. 자연에 대한 기술 지배의 과정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 자신이 황폐해지는 과정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든 사회주의에서든 근대인들이 인간의 궁극적인 안전을 자연에 대한 지배와 노동 생산물의 공정한 분배를 통해서만 구현하려고 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

273. 하이데거의 주요한 철학적 작업은 인간이 그 안에서 살고 죽어가는 소박하면서도 근원적인 생활세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 있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적인 관점에 의해 은폐되어 있는 대지와 하늘, 사물, 시간, 공간, 신, 노동, 죽음, 예술작품, 인간, 동물 등의 본래적인 본질을 새롭게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5장 맺으면서: 하이데거 철학의 의의

276. 하이데거는 전쟁과 과학기술문명 사이에 본질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요청된다.

277. 하이데거는 역사란 인간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자신을 개시하는 사건으로 보면서, 이 시대에 존재가 우리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있는지를 드러내려고 했다. 존재에 대한 이러한 물음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근대의 대두와 함께 상실될 위기에 처한 삶의 신비와 무게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다.

바로 이것이 생태계의 위기가 심화되는 등 현대 기술 문명의 폐단이 노골화 될수록 , 철학계를 비롯한 모든 정신계에서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이유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실존철학을 이해하려면 아무리 어려워도 한번은 맞닥뜨려야 할 마틴 하이데거의 사상을 다룬 책이다. 운이 좋았다. 이 책을 발견한 것은. 하이데거를 전공한 철학자가 번역서가 아닌 한국어로 그 어렵다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풀어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하이데거의 책은 전집으로 줄곧 간행되었는데..무려 100권이 넘는다. 그는 이 저작물들이 모두 그의 사유의 길이었다고 말한다. 87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니 그는 거의 언제나 들길을 걸으며 사유하고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이 책의 저자 박찬국 교수는 오래 전부터 "그 어떤 책보다도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하이데거 사상의 핵심을 독자들의 실존 밑바닥에까지 전달하는, 말하자면 명쾌하면서도 사람들의 실존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을 갖는" 소개서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이런 책을 쓰기 위해 저자는 오랜 시간 이 주제에 매달렸으며, 〈인간 소외의 극복에 대한 하이데거와 마르크스 사상의 비교 고찰〉 〈현대에 있어서 고향 상실의 극복과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 〈니힐리즘의 기원과 본질 그리고 극복에 대한 니체와 하이데거 사상의 비교 고찰〉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하버마스의 하이데거 해석과 비판에 대한 고찰〉 〈현대 기술문명에 대한 하이데거와 프롬의 사상〉과 같은 관련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하이데거 입문서라기보다 저자가 오랫동안 묵히고 다듬고 걸러낸, '박찬국 표' 하이데거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철학 입문서도 집필서보다는 번역서가 많은 우리 실정에서 이렇게 '숙성된'(?) 입문서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출판사의 자랑스러운 리뷰이다.

 

 

*그러면 하이데거는 어떤 철학자인가?  
하이데거가 어떤 철학자인지, 조금 길지만 저자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5. 하이데거는 20세기의 정신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다. 하이데거는 보통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 불리지만, 그 사상적 내용의 우월성 여부를 떠나서 영향력 측면에서만 본다면 비트겐슈타인이 하이데거를 따라올 수 없다. 20세기의 거의 모든 철학적 조류,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뿐 아니라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실존철학과 현상학,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 철학적 인간학, 언어철학, 과학이론 등에서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철학뿐 아니라 문학과 문예비평·심리학·신학·생태학 등에 하이데거가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16. 카를 라너와 같은 대신학자는 하이데거야말로 자신이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며, 프랑스의 시인 폴 셀랑이나 루돌프 불트만과 같은 신학자에게 하이데거는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였고,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지성계에서 하이데거는 '최고의 사상가 Meisterdenker'로 인정받았다. 하이데거가 없었더라면 20세기의 정신계는 전혀 다른 지형도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 왜 지금 하이데거인가?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와 같은 비판을 듣기도 하는 하이데거를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277. 하이데거는 두 번의 세계대전, 나치즘과 볼셰비즘 같은 전체주의의 대두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격동의 세기 20세기와 고투하면서 자신의 시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하이데거는 역사란 인간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자신을 개시하는 사건으로 보면서, 이 시대에 존재가 우리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있는지를 드러내려고 했다. 존재에 대한 이러한 물음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근대의 대두와 함께 상실될 위기에 처한 삶의 신비와 무게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다.

존재 신비주의라든가 존재 숙명주의 등 하이데거 철학에 숱한 비판이 있었음에도, 하이데거의 철학이 우리가 2500년에 걸친 서양의 역사와 현대의 기술문명을 사유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소중한 전망을 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생태계의 위기가 심화되는 등 현대 기술문명의 폐단이 노골화될수록, 철학계를 비롯한 모든 정신계에서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이유다.


* 이 책의 구성을 보자.
책에서 저자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 부분은 하이데거가 그의 대저 《존재와 시간》을 저술하고 프라이부르크 대학 정교수가 되기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부분에서는 흔히 하이데거의 초기 사상이라고 불리는 사상적 여정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널리 알려진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원용하여 난해한 하이데거 사상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이 시기에 하이데거는 존재 물음을 새롭게 제기함으로써 2500년간 지속되어온 서양 형이상학의 흐름을 혁신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는 존재를 시간과 관계없이 영속하는 것으로 보았던 기존의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고, 불안이라는 기분을 통해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을 은폐하지 않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철저히 시간성 속에서 파악했던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하이데거가 나치에 가담할 때부터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의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 이미 알려진 대로 하이데거는 나치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그 사상에서도 친연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곤 했다. 저자는 이 시기에 이루어진 하이데거의 활동은 나치 참여의 좌절에 대한 철학적 반성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사상에서 큰 변화가 이루어졌기에 흔히 이때의 변화는 '사상적 전회(轉回)'로 불린다고 한다. 전기에서 하이데거가 던진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정태적이고 비역사적인 방식이었다면 전회 이후에는 철저하게 역사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또한 현대 기술문명이 인류에게 행복과 안녕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체 가능한 노동 에너지로서 닦달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세 번째 부분은 대학에 복귀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의 생애와 사상을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가 몇 년 후에 복권된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기보다는 자신의 철학적 연구의 산실이었던 토트나우베르크 산장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한다. 이 마지막 시기 하이데거 사상의 핵심은 '소박한 자연과 사물로의 귀환'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생각은 그의 짧고 시적인 글 [들길]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여기서 과학기술적으로 표상된 자연의 근거를 시와 예술에서 드러난, 좀더 근원적이면서도 소박한 자연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와 함께 인간을 과학과 기술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길을 밝히고자 했다.

** 그의 들길에 대한 표현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덥석 이 책을 선택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내게 중요한 것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현상학적으로 설명해준 2장에 있었다. 그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무거운 주제를 내가 여러번 읽고 익혀서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있는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로 풀어서 설명을 해주고 있어서 정말 이런 행운 때문에 “공부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죽음을 향해 자각적으로 앞으로 달려감, 즉 죽음으로의 선구(Vorlaufen)
불안이란 기분에서 도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선구해나가는 것은 곧 본래적인 실존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불안이 기쁨으로 전환된다.

이때는 우리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가 근원적인 깊이와 풍요를 드러내면서 되돌아 온다.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본래적 현재를 하이데거는 순간 (Augenblick)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 심연에서 고동치는 “순간”에 대한 감각을 계발해야 한다.

이제 남아있는 중요한 일은 이 어려운 용어를 살리면서 좀더 쉽게 이야기를 풀어보는 연습을 하는 일이다. 그 어려운 하이데거는 이 책이 계기가 되어 기초 개념을 익히게 되었으니 이제 더 나아가서 하이데거의 니이체 해석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대가 된다.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계속 성찰해 나가다 보면 실존주의 심리학이 좀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면 빅터 프랭클과 어빈 얄롬과 롤로 메이 까지 좀 더 범위를 확장해나가서 그들이 치료장면에서 쓰고있는 전략들을 보다 깊이있게 그리고 선명하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저자라면 물론 이런 책을 쓰고 싶다. 무엇보다도 모국어로서의 독일어를 사랑하여 마지않아 여러 가지 표현으로 실험을 했던 하이데거를 그래도 반복해서 읽다보면 뜻을 이해는 할 수 있을 수준으로 이끌어 준  부지런한 철학자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러니 나도 나의 죽음 철학을 이렇게 잘 정리해서 풀어 써보는 연습을 계속해야 한다. 매우 험한 산길을 무사히 잘 지나온 것 같은 기쁨에 마무리가 잘 안되는 부분은 다음날 다시 생각해서 재정비 하여야 겠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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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10.03.14 06:22:49 *.160.33.180


오,  좌샘이 드디어 '죽음의 선구'를 시작하셨구나.    
죽음이 삶을 깨우고, 순간을 요동치게하는 것이며,  삶의 마그나 카르타 임을. 
존재는 순간마다 생기하는 것이며, 늘 죽었다 다시 사는 것이니,  그 뽕맛을 즐기는 감각을 온몸으로 수련하기를.
46번째가 아니고, 50번 째 책이지요 ?    하산하시지요.   드디어 연구원 중 '공부하다 죽고싶은' 좋은 학자가  한 명 나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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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3.14 20:02:59 *.67.223.154
밤에 글을 올리고 곤히 잠들면
선생님은 새벽에 깨어 나셔서 우리들의 글을 유심히 보아주시는
이런 즐거운 놀이를 이제 그만하고 산을 내려가라 하십니까?

글감옥이라고 징징 울며 투정부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약속한 50권의 책 리뷰를 마쳤습니다.
친절하니까 설명을 좀 더 해보면  레이스 할때 리뷰했던 4권의 책이 셈에 덧붙여졌거든요.

대단원의 막을 선생님의 축하로 마무리합니다.

들길을 걸을때면 언제나 요동치던 순간들을 기억할게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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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엽
2010.03.25 09:40:06 *.216.38.10
와우! 50번째 리뷰를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들길의 사상가> 라는 제목이 무척 끌립니다. 
이제 쌤의 빅터 프랭클과 어빈 얄롬과 롬로메이의 리서치가 기대됩니다!!와우 
제 다이어리에 이 문구는 기입할께요. 

"불안이란 기분에서 도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선구해나가는 것은 곧 본래적인 실존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불안이 기쁨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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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3.28 07:49:24 *.67.223.107
섬세하게, 날카로운 인문학자의 눈으로 북리뷰를 읽어주는 재엽씨
멋있는 제 2의 독자입니다. 

1년 공부마쳤다고
마구마구 바람난 봄처럼   돌아다녔더니...
책이고 글이고...모두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군요.
도로아미타불......

제정신으로 돌아와 어빈 얄롬을 읽어내려야 할 것 같아요.
댓글 달아주는 독자땜에 정신이 번쩍 납니다. ㅋㅋ

그러나 봄은 좋더군요.
남쪽의 봄은 아직 한강을 넘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리고 .
꽃다운 꽃 매화는   매운 바람에 어쩔 줄 모르지만...
그래도 봄은 그렇게 흐느적거리며  담벼락을 헤집고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ㅎㅎ

봄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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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향
2010.03.29 09:22:02 *.70.143.153
저도 깜빡 속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이번 책이 50번째 책이세요.
선생님 1년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샘의 리뷰는 갈수록 깊어지고 더 조근조근해지셨어요^^

올 한해, 선생님의 연두빛 열매 예쁘게 세상에 내놓으시길 믿고 소망합니다^^
그리고 변경영 안에서 늘 행복한 맏언니로 오래오래 함께 가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가 더 즐거운 여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연두빛깔 좌선생님, 홧팅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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