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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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
▣ 저자에 대하여
나탈리 골드버그는 작가이자 글쓰기 강사이다. 1986년 자신만의 독특한 글쓰기 철학이 담긴 <뼛속까지 내려가서써라> 이 책을 내 놓은 이후 미국인들의 글쓰기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 책이 백만부의 판매를 기록하면서 전세계 9개 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품어져 나오는 진실된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는 누구나 솔깃한 대상이고 가슴 깊숙이 내재된 알 수 없는 갈망이기도 하겠다.
그녀는 1974년 명상의 세계에 첫 발을 들여 놓았고 1978년에서 198년까지 미국 미네소타 선원에서 다이니 카타기리 선사로부터 정식으로 선 수련을 받았다. 선사로부터 ‘만약 당신이 글쓰기 안으로 깊이 몰입할 수 있다면, 글쓰기가 당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곳으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학생시절 내내 모범생이었으며 배운 대로 문법에 맞는 글을 쓰는데 만 골몰했다. 대학에서도 문학에 빠져 유명한 작가의 시를 타자기로 옮겨 쓰고 또 음미하다 다 외웠으며 많은 작품들을 읽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 소설을 읽고 시를 암송하며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순수 자연식 레스토랑을 개업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정성을 기울일 때만 정말 맛좋은 음식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때가 자신의 마음만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최초의 시기라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토근길에 들른 서점에서 자신이 매일 하는 일을 소재로한 시집 <과일과 채소>를 일고 이렇게 평범한 것이 시라는 사실에 놀라 그녀도 자신만의 감정이 실린 글을 써 보겠다고 결심했다.
나탈리는 수 많은 지역에서 글쓰기에 대한 방법을 가르쳐 왔다. 이 글쓰기 워크숍을 통해 삶의 큰 변화를 경험한 세계인들에게 그녀는 위대한 글쓰기 스승으로 명성이 높다. 그녀의 글쓰기 방법론은 단순히 따라하기 스킬이 아니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평온함을 얻는 것이다. 그러니 유명한 스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롭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 안에 있던 것을 끄집어 내게 해주는 글쓰기를 그녀는 가르친다. 인생의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는 최고의 안내서를 그녀는 뼛속에서 우러나도록 썼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또한 글쓰기를 통해 삶이 끝나는 날까지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 훈련의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실려 있는 글쓰기에 대한 글들은 달리기나 그림 그리고 당신이 인생에 함께 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13]
언젠가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네가 사랑을 믿을 때만이, 사랑이 네가 가야 할 길을 이끌어 주는 법이지.” 나는 여기에 조금 덧붙이고 싶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믿음을 갖고 계속해서 밀고 나갈 때만이, 그 일이 자신이 가야 할 길로 이끌어 주는 법이지.”[16]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든 나는 항상 똑같은 방법론을 주장한다. 바로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나가야 한다’ 는 말이다. 이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싫증이 나지 앓을뿐더러 나 자신을 더욱 높은 이해의 경지로 끌어올린다.[16]
수업을 할 때 나는 학생들에게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 고 요구한다.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으라는 말이다.[18]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은 긴장을 풀고, 몸과 마음 전체로 이 책을 흡수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읽는 데서 끝내지 말라. 부디 써라. 그리고 자신을 믿어라. 자신의 요구가 무엇인지 배우라.[18]
첫 마음, 종이와 연필
두 달 전에 꽤 괜찮은 글을 썼다고 해서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쓴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글쓰기는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다.[19]
글쓰기는 정신적이면서 동시에 육체적인 작업이기에 사용하는 도구와 장비에 많은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나는 감정적인 글을 쓸 때는 적어도 처음에는 직접 손으로 쓴다. 손으로 쓰는 것이 심장의 운동과 더욱 가깝게 연결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22]
‘첫 생각’을 놓치지 말라
‘첫 생각’과 만나서 거기서부터 글을 퍼낼 때 당신은 싸움에 나선 전사가 되어야 한다. 특히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감정과 에너지의 힘에 질려 겁을 먹을지 모른다. 하지만 손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생각의 심장부로 뚫고 들어가도록 손을 계속 움직여야 한다.[25]
이러한 치열한 글쓰기 훈련에 있어 기본은 제한된 시간 동안 글을 써 보는 것이다.[25]
중요한 것을 글쓰기에 할애한 시간이 얼마이든 간에 그 시간 동안만큼은 글쓰기로만 완전하게 채우도록 집중하는 일이다.[25]
첫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제일 먼저 ‘번쩍’하고 빛을 낸 불씨다. 이 불씨의 뿌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잠재력과 맞닿아 있다.[25]
첫 생각은 에고 또는, 우리를 통제하려고 드는 논리적인 메커니즘(세상은 영구불변하며,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은 생각이다. 세계는 불변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의식 차원을 넘어선 글을 쓸 때, 그것은 있는 그대로 사물의 진실을 나타낸 것이 된다. 그래서 이런 글은 에너지가 넘칠 수밖에 없다. 글쓰기를 가로막던 ‘에고’ 라는 짐을 벗어 던지는 순간 당신은 더 큰 조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첫 생각에는 이처럼 굉장한 에너지가 들어 있는 것일까? 첫 생각에는 참신함 그리고 영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27]
멈추지 말고 써라.
글쓰기 훈련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몸과 육체를 믿는 법, 다시 말해 인내심과 공격하지 않는 마음을 키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29]
글쓰기 훈련은 세상과 자신에 대해 마음을 지속적으로 열어 나가게 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스스로에 대해 믿음을 키워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옳았을 때만 좋을 글을 얻을 수 있다.[30]
훈련은 공연에 앞서 무용수가 몸을 풀고, 시합 전 육상 선수가 스트레칭을 하는 것과 똑같다. 육상 선수라면 “난 어제 뛰었어. 그러니 오늘은 워밍업을 할 필요가 없어” 라고 말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달리기를 위해 매일같이 몸을 풀고 스트레칭을 한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글도 많이 쓰면 쓸수록 실력이 향상된다.
또, 육상 선수들은 달리기가 힘들고 지겨워져도 달리는 행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연습을 쉬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계속 달리고 싶게 만드는 뜨거운 열망이 찾아올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더구나 열망은 절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거나 회피하는 사람에게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31]
글을 쓸 때 “나는 시를 쓰고 있어.”라는 식으로 자신을 제한시키지 말라. 이렇게 자신을 제한 하는 순간 당신은 경직되고 얼어 붙는다. 책상을 마주했을 때 최소한의 제한만으로 충분하다. 그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라고 만 하자. 그저 좋은 글을 쓰겠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32]
만약 당신의 모든 것이 진정 글쓰기에 실려 있다면, 거기에는 글을 쓰는 사람도 없고,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생각도 없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글 쓰는 행위만이 글을 쓰고 있게 된다.[33]
글이 안 써질 때도 글을 쓰는 법
우리는 글이 안 써질 때도 무조건 계속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두려움, 무력감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만 있다면, 어떤 글이든지 쓰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55]
눈 앞에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라
나는 수업 계획을 미리 세워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상황에 겁먹지 않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충실하려 애쓴다. 그리고 매번 이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결이 있다면 마음을 계속 열러 두고 있는 것이다.[59]
어떤 것이 이상적인 글쓰기인가? 무엇에 대해 써야 할까? 당신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하라, 그건 다음 그 속으로 파고 들어라. 당신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다.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62]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정신 자세로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글쓰기를 배운답시고 쓸데없이 대가들과 문학 강의를 좇아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실은 아주 간단하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바깥에서는 어떤 배움의 길도 없다. 당신이 훌륭한 대가를 열 사람이나 만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글쓰기를 배우지 못한다.[64]
작가와 작품은 별개다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스스로 속지 않도록 경계하라. 시시각각 우리는 변한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변한다는 사실, 이것처럼 좋은 기회도 없다. 우리는 한 순간에 얼어붙어 있던 자신과 자신의 이상으로부터 빠져 나와 신선하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우리를 동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66]
나와 내가 쓴 작품은 별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67]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과 자신을 지나치게 일치시켜서는 안 된다. 당신은 또 다른 흐름에 몸을 맡기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에 들어가 있는 단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 몸을 빌어 밖으로 표출되었던 ‘위대한 순간’이다. 그 순간을 잡아내어 글로 옮길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다.[69]
사고의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려라
작가는 두려움 없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써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글쓰기와 인생 그리고 정신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경계가 없다.[71]
은유란 논리나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부터 비롯된다. 은유를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보던 익숙한 시각에서 기꺼이 벗어나야 한다.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71]
은유를 위한 은유를 하지 말라. 무언가를 은유 하기 위해 당신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평소의 사고 방식에서 한발 물러서서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들을 계속 기록해 보라. 이런 연습은 사고를 부드럽게 해 줄 뿐 아니라 창조력을 키워 준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엄청난 도약을 하게 된다. 마음이란 순식간에 위대한 도약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72]
글쓰기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아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경험과 추억, 감정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오븐에서 막 꺼낸 피자처럼 종이 위에 옮겨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모든 것을 풀어 주라. 아주 쉬운 말로 단순하게 시작하고, 당신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애써라.[75]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절대 자신의 에고를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대로 연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그저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글쓰기가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당신이 쓰고 있는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다가가도록 한다.[75]
세부 묘사는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당신은 상상력의 힘을 빌어 이것을 얼마든지 변경시킬 수 있다. 변경된 상황에다 당신이 실제로 알고 있거나 보았던 것을 세밀하게 묘사해서 이식을 한다면, 그 글에 뛰어난 생동감이 생기며 개연성과 진실성이 배어나게 된다. [83]
당신이 주변 상황에 자연스럽게 몰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당신이 글을 쓸 때 정말 살아 숨쉬는 듯한 생생한 기억들을 불러 낼 수 있다.[83]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라
우리의 삶은 모든 순간순간이 귀하다. 이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작가는 의미 없어 보이는 삶의 작은 부분들마저도 역사적인 것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84]
작가가 쓰는 글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재료로 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들이며,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작가가 되려는 당신은 알고 있는가?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세상의 모든 순간과 사물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주는 것, 그것이 작가의 임무다.[85]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세부 그림은 기록으로 남아야 할 가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작가들이 알고 있어야 할 진실이며 우리가 펜을 쥐고 자리에 앉는 이유이다. [85]
케이크를 구우려면
삶의 모든 세부 사항들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다정하게 접촉하라. 당신을 둘러싼 것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라. 강에 대해 쓰고 있다면 그 강에 온몸을 적시라. 그 강이 탁한 황토 빛으로 둔하게 흐른다고 적는다면 당신의 몸이 그 탁한 느낌을 그대로 느껴야 한다. 글쓰기에 깊이 빠져들면 쓰는 사람과 글은 분리되지 않는다.
카타기리 선사는 말했다. “좌선을 할 때 당신은 사라져야 한다. 좌선이 좌선을 하도록 만들어라.”
이것이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당신은 그저 당신 속에서 흐르고 있는 생각들을 글로 적어 내고 있을 뿐이다.[88]
세부 묘사를 사용하면 당신이 느끼는 환희나 슬픔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전달하려는 감정이 어떤 맛인지 정확하게 표현해 준다면, 그것을 맛보고 싶어하는 미식가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89]
세부 묘사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요소이자 단위다.[90]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
작가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먼저 첫 번째 인생이 있다. 길에서 만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건널목을 건너고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넥타이를 매는 그런 일상생활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생활의 또 다른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을 다시 곱씹는 두 번째 인생이다. 이들은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면밀하게 음미한다. 삶을 이루고 있는 재질과 세부 사항을 들여다본다. [91]
작가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지키고 있으며, 그 시간의 중요성과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92]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조금 어수룩한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 당신 속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느림보가 들어 있다. 그 느림보가 당신이 모든 것을 팔아버리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당신에게 어딘가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이마에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응시하게 만든다.[92]
잘 쓰고 싶다면 잘 들어라
글쓰기 역시 90퍼센트는 듣기에 달려 있다. 열심히 들으면 당신을 채우고 있는 내면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자연히 나중에 글을 쓸 때, 당신의 그 내면의 소리를 저절로 분출시킬 수 있게 된다. 내면의 진실한 소리를 듣게 된다면, 글쓰기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다. 당신은 그저 식탁 건너 편에서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곳의 분위기가 내는 소리와 의자와 문이 말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문 너머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도.[98]
계절이 만들어 내는 음향과 바람에 실려오고 있는 온갖 색상의 음향을 받아들여라. 과거와 미래와 현재 당신이 있는 곳에 귀를 열어 두어라. 귀로만 듣지 말고 온몸으로, 당신의 위장과 심장과 피부와 머리카락으로 들어라.[99]
듣는 것은 곧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이 더 깊이 들으려 하면 할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이 가는 길을 받아들일 때 그 사물에 대한 진실한 글이 태어난다. 만약 당신이 사물의 이치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셈이다.[99]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 주고, 많이 써 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냥 단어와 음향과 색깔을 통해 감각의 열기 속으로 뛰어들어가라.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느낌이 종이 위에 생생히 옮겨지도록 계속 손을 움직이라.[100]
시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시를 읽고, 시를 들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시를 분석함으로써 시로부터 멀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그저 시가 당신의 몸 속을 스며들게 하라.[100]
위대한 선승 도겐은 “안개 속을 걷는 사람은 안개에 젖는다” 고 했다. 그러니 그저 듣고, 읽고, 쓰라. 당신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조금씩 당신만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고 그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 그냥 흐르는 대로 운율에 맞춰 노래하고 쓰라.[101]
파리와 결혼하지 말라.
문학의 책임은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 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방황한다면, 독자 역시 방황하게 된다.[103]
어빙 호웨는 <유태계 미국인 이야기>의 머리말에서 “최고의 작품은 감상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감상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104]
글쓰기는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작가인 우리는 늘 의지할 것을 찾아 다닌다. 동료들로부터, 비평가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안심하려 든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나 작품에 대해 보내는 타인의 칭찬에 기대어 살아가는 한, 그 작가는 다른 이들의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원조자에 대해 아는 편이 작품성을 높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이미 매 순간 무엇엔가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106]
우리가 서 있는 대지, 폐를 채우고 비우는 공기....., 이 모두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질 때 그 대상을 멀리서 찾지 말라. 바로 지금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 아침의 침묵, 이런 것들로부터 시작하라. 그런 다음 마주 보고 있는 친구가 “난 네 작품이 너무 사랑스러워” 하고 말하면 그 좋은 기분을 그저 간직하면 된다. 대지와 의자가 당신 몸을 쓰러지지 않게 받쳐 준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그 친구의 말을 그대로 믿어라.[107]
우리는 정직한 지원과 격려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누군가 칭찬을 해 주면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비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은 별볼일 없고 진짜 작가도 못 된다는 쓸데없는 믿음만 키워가려 한다.[108]
그만! 누군가 당신을 칭찬해 준다면, 정말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그런 일이 익숙하지 않고 계면쩍더라도. 계속 숨을 들이마시고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칭찬을 받는 것이 이렇게도 좋다는 것을 반드시 느껴 보아야 한다. 작가가 되려면, 자신을 향한 긍정적이고 솔직한 격려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여유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니까.[109]
꿈에 대해 써라.
우리는 자신이 지닌 꿈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향하게 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꿈에 의해 언젠가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다. 꿈은 우리가 삶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112]
문장 구조에서 벗어나 사유하라
‘나는 개를 본다’ 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이러한 문장 구조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내가 개를 보고 있는 동안 개도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린다.[114]
우리는 호모사피엔스라는 지나친 우월감에 빠져 있다.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존재들에게도 인간 못지 않게 중요한 그들만의 삶이 있다.[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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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기리 선사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친절하게 배려해 주십시오.”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러한 배려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물들이란 어떤 것인가요?” 그는 의자, 공기, 종이 그리고 심지어 거리에 대해서조차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것이 이 세상 속에서 우리 마음이 이루어 내야만 하는 제일 큰 일이라고 했다.[115]
결국에는 인간이 만든 언어 체계 속으로 돌아가겠지만 당신은 작가로서 이 세상을 이루고 지탱하며 관통하고 아우르는 그 근원적인 큰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116]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소통하는 법을 많이 알게 될수록, 당신은 글을 쓸 때 상황에 따라서는 구문론이라는 틀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때로는 이처럼 문장 구조를 깨고 글을 씀으로써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116]
말하지 말고 보여 주라
작가는 슬픔과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독자의 마음을 슬픔과 기쁨의 골짜기로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117]
당신이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글은 당신이 그 글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119]
그냥 ‘꽃’이라고 말하지 말라
고유성을 허락하라. 그냥 ‘과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석류 열매다’ 처럼 어떤 종류의 과일인지 분명히 밝혀 주라. 사물의 이름을 불러 주어 그 사물의 고유성을 만들어 주라.[120]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마음속 흐릿한 부분이 선명해지면서 이 지상의 삶에 더 튼튼한 줄을 이어 주기 때문이다.[121]
사물들 속으로 파고들라. 새 꽃, 치즈, 트랙터, 자동차, 비행기..... 이 모든 것의 이름을 배우라. 작가는 건축가이자 프랑스 요리사이며, 농부여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는 이런 것 중 어느 것도 아니어야 한다.[123]
몰입하기
글쓰기 속에 몰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차단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몰입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균형을 잡는 데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125]
평범과 비범은 공존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이미 평범함과 비범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열릴 때도 있고 닫힐 때도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 세부 묘사는 무엇이 좋고 무엇은 나쁘다라는 식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이 세부 묘사의 본질이다.[128]
모든 사물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깊이 들어가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세부 묘사가 독자의 눈 앞에 그러한 현실을 창조할 것이다.[128]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지구를 위해, 텍사스를 위해, 지난 밤 우리의 끼니를 위해 생명을 바친 병아리를 위해, 각자의 어머니를 위해, 고속도로와 나무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친절하게 대할 책임이 있다. 먼저 자신에게 친절할 때에만 세상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글쓰기를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를 대하는 올바른 눈이 떠질 때 우리는 세부 묘사를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모든 진실을 반영시키는 것으로 다루게 된다.
카타기리 선사는 말했다.
“찻잔 하나에도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이 찻잔 또는 바위 언덕, 하늘이나 개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때 그 대상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 대상들에게 선의의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고, 글쓰기를 통해 초월적인 세계로 도약할 수 있게 된다.[130]
이야기 친구를 만들라.
뉴욕에 사는 단편 작가 그레이스 팔레이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책임이 있다. 이야기꾼은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배워 나간다.” 이야기를 지어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이야기 만들기는 글쓰기 훈련의 자원이다. 이야기를 해 봄으로써 무엇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고 무엇이 지루하게 만드는지 의사 전달력과 표현력을 배우게 된다.[132]
말하기는 혼자서 펜과 종이만을 상대로 보내야 하는 길고 긴 창작의 시간에 앞서 하는 준비운동이다. 당신이 수없이 누군가에게 말했던 이야기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라. 그것으로 글쓰기의 많은 부분은 이미 이루어졌다.[134]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작가들은 다른 작가들과 수시로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글쓰기를 배우는 방법이다. 그들은 한 작가에게 다가가, 그가 쓴 모든 작품들을 통해 그가 어떻게 움직이고 휴식을 취하는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읽고 또 읽는다.
자신에게서 빠져 나와 다른 누군가의 피부 속으로 옮겨 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사랑하게 되는 능력이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을 흔들어 깨운다는 뜻이다.[136]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 이념 그리고 대중문화 모두를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글쓰기 안에 용해되어 나타나는 것이다.[136]
다른 작가들을 나와 ‘분리된’ 존재로 여기지 말라. “그들은 훌륭한데, 나는 형편없어”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도 하지 말라.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의 작품은 좋아지기 힘들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나만 훌륭하고 나머지는 모두 형편없는 글쟁이들이야.” 이런 지나친 자만심으로는 절대 훌륭한 작가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당신 작품에 대한 비평에도 귀를 막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들도 훌륭하고 나도 훌륭하다” 라고 말하자. 이 말은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 “그들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러니까 나는 잠시 그들의 경로를 따라 가면서 배우면 돼.” 얼마나 솔직하고 마음 편한 고백인가.[137]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되어 두 팔로 세계 전체를 담는 글을 써야 한다. 거친 황야에서 홀로 떨어져 글을 쓸 때에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같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만이 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은 자기 본위에서 나온 우월감일 뿐이다.[147]
작품을 자신만의 습작 노트에 사장시키지 말라. 바깥으로 꺼내 놓아라. 예술가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생각 같은 것은 떨쳐 버려라.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럽다. 자신만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이유는 없다.[138]
현상을 넘어 사물 속으로 파고들라
당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려라. 당신이 쳐다보고 있는 모든 사물들 안으로, 거리 속으로, 물 잔에 담긴 물 속으로, 옥수수밭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사라져 버려라. 당신이 느끼는 바로 그것이 되어 그 감정을 태워버려라. 걱정하지 말라. 당신은 어떤 감정을 잡았다거나, 그 감정과 완전히 하나가 된 바로 그 순간을 냄새 맡거나 보게 되면, 당신은 이미 위대한 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140]
그러니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이를 수 있는지 밝혀 주는 작품을 읽고 또 읽어라.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키우고 다정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을 거듭 체험하게 된다.[140]
먹잇감을 응시하는 고양이처럼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도 당신은 작가다. 당신이 작가라는 사실은 언제 어디서든 떨쳐 버릴 수 없다.[141]
무엇이 되었든 모든 감각을 집중시켜라. 논리적인 마음은 꺼버려라. 마음을 비워 놓고 생각이 들어가지 않게 하라.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껴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당신 육체가 양분을 빨아들이도록 내버려 두라. 인내심을 가지고 한결같은 균형을 유지하라. 생각의 지층에 있는 무의식의 세계 속으로, 당신의 핏줄 속으로 글쓰기를 삼투시키라.
그런 다음 드디어 당신이 튀어나올 때, 가령
제일 좋은 글은 당신의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실린 글이다.[144]
자신을 믿어라
세상이란 언제나 흑백으로 갈라지는 곳은 아니라. 하지만 작가가 되고 싶다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술하는 것일 필요하다. “글세, 웃기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마 그것이 푸른 말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글은 곤란하다. “이것은 푸른 말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라.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의 사고 속에 똑바로 서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146]
비록 우리 인생이 언제나 선명한 것은 아닐지라도, 명확하게 인생을 표현해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이 순간의 나다.” 이렇게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당신은 훗날 그만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146]
또 하나, 스스로 경계할 부분은 바로 질문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질문 하나를 만들 수 있다면 아주 잘 된 일이다. 하지만 즉시 더 깊은 단계로 내려가 바로 그 다음 줄에서 그 질문에 답을 해 주어야 한다.[147]
‘혹시 내가 만든 질문에 답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떨쳐버려라. 글쓰기는 안개에 싸여 있는 마음에 불을 지피는 행위다. 종이 위에 안개를 옮겨 놓지 말라. 설사 확실하지 않을 때라도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라. 이런 훈련은, 문장을 훨씬 힘차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147]
자신이 사는 마음을 순례하라.
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161]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161]
평범한 것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배우라. 당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라. 계속 그 목록을 늘려가라.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글의 형태와 장르에 상관없이 이 목록에 들어 있는 것들을 단 한 번이라도 언급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라.[162]
쓰라, 그냥 쓰라, 그냥 쓰기만 하라.
또 다른 노트를 꺼내, 다른 만년필을 잡고 쓰라. 그냥 쓰고, 또 쓰라. 세상의 한복판으로 긍정의 발걸음을 다시 한 번 떼어 놓아라. 혼돈에 빠진 인생의 한복판에 분명한 행동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그냥 쓰라. “그래! 좋아!”라고 외치고, 정신을 흔들어 깨우라. 살아 있으라. 쓰라. 그냥 쓰라. 그냥 쓰기만 하라.[164]
결국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진정 글을 쓰고 싶다면 모든 것을 잘라내고 쓸 수밖에 없다. 글을 쓰기 좋은 완벽한 환경도, 습작 노트도, 펜도, 책상도 없다면, 자신을 유연하게 훈련시킬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낯선 환경 속에서도,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도, 글쓰기 훈련은 계속 되어야 한다. 기차 안에서, 버스 안에서, 허름한 부엌 식탁에서, 기댈 것이라고는 나무 둥지만 있는 숲 속에서, 혼자 흐르는 개울물에 발을 담근 채, 사막의 바위 위에 앉아서, 당신 집 앞 모퉁이에 서서, 현관에서, 자동차 뒷좌석에서, 서재에서, 점심 먹는 계산대에서, 복도에서, 실업자 고용사무실에서, 치과 대기실에서, 공항에서, 텍사스에서, 캔사스에서, 과테말라에서, 콜라를 홀짝이는 동안에도,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도, 베이컨과 양상추와 토마토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를 먹는 중간중간에도 당신은 글을 써야 한다.[164]
우리가 글쓰기에 열중해 있다면 장소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글쓰기에 빠져 있는 것 자체로 충분히 완벽한 것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든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위대한 자율성과 안전성이 있다. 진정 글을 쓰고자 갈망한다면, 결국 당신은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는 길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165]
충분하다고 느낄 때 한번 더
글쓰기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될 때, 조금만 더 자신을 밀고 나가 보라. 당신이 종점이라 생각하는 곳이 실은 초입에 들어선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항상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당신은 제어할 수 없는 아주 강한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166]
당신이 글을 밀고 나가 그저 적당한 종점에서 끝맺으려고 한다면, 그 글에는 당신의 진정한 숨결이 배어날 수 없다. 글쓰기는 자유를 향해 헤엄칠 수 있는 위대한 기회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
심지어 당신이 자신을 충분히 밀고 나갔고 철저하게 자아가 깨쳤다고 느낄 때조차도, 조그만 더 앞으로 밀고 나가라. 중간에서 멈추지 말라. 이 순간은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나중으로 미룬다면 지금 작품을 끝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멀리,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167]
삶을 사랑하라
나는 결국 혼자 있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산책을 한 다음 글을 쓰고 싶은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인생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이 하나씩 있다. 나의 두려움은 고독이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다. 작가는 많은 시간을 홀로 글을 쓰는 데 보낸다. 또한 사회라는 틀 속에서 예술가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모두가 아침이면 일터로 향하거나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분주하다. 예술가는 제도가 만들어낸 사회의 바깥에서 살고 있다.[169]
나는 외로움이라는 들판 속을 헤매며 그것을 즐기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외로움이 나를 물어뜯으려고 덤빈다 해도, 두려움에 갇혀 버리거나 존재론적 무의미로 회피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다만, 지도를 꺼내 내가 가야 할 길을 확인할 뿐이다. “왜 작가가 되어야만 하는가?" 모든 것을 향해 이 질문을 던지며, 나는 나 자신을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가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하얀 종이를 앞에 있는데, 마음은 불확실하고 사고는 연락하기만 하고 감각은 무디고 둔하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조절력을 잃어버린 글쓰기, 결과물이 어디에서 나올지 확실치 않은 글쓰기는 무지와 암흑 속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것과 정면으로 부딪칠 때, 이러한 무지와 암흑의 장소에서 출발한 글쓰기가 결국에는 우리를 깨우쳐 주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이런 두려움의 회오리 바람에서부터 진정한 천재의 목소리가 탄생되는 것이다.[171]
‘인간은 고통을 안고 산다’라는 사실에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라. 결국에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민의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발 아래 깔린 시멘트와 혹독한 폭풍에 짓이겨진 마른 풀들마저도 다정스레 바라보게 한다. 예전에는 추하게 생각했던 주변의 사물들은 이제는 손으로 만지게 되고, 사물의 세부를 있는 그대로 보아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 사람이 여기 있다는 사실, 우리 인생을 싸고 있는 일부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생을 사랑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지금 이 순간의 인생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172]
의심이라는 생쥐에게 갉아 먹히지 말라
“만약 그곳 사람들이 당신을 쓰러뜨린다면 당신은 일어나야 합니다. 그들이 또 다시 당신을 쓰러뜨린다 해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얼마나 많이 쓰러지든, 당신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174]
글쓰기에서도 같은 진실이 통한다. 지금 세상에 나온 책들 가운데 출판조차 못했을 뻔한 책이 아마 수천 권도 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저 계속 가야만 한다는 진실이 있을 뿐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쓰라! 설령 그 글이 출판되지 않더라도 또 다른 글을 계속해서 쓰라. 훈련은 당신의 글을 점점 더 훌륭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두 달에 한 번씩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부딪힌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늘 똑같다. “어리석은 짓이야. 돈 한 푼도 벌지 못하면서 그럴싸한 경력도 쌓지 못하고 있잖아. 이제는 내 걱정을 해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 너무 외로워. 이런 게 싫어! 바보 같은 짓이야. 나도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어.” 이런 생각은 그 자체로 고문이다.
의심과 의혹은 고문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전적으로 매달려 심혈을 기울였다면, 그 일은 그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준다. 의심은 굽히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끊임없이 시험하는 것이다.[174]
비평가가 지껄이는 말에는 신경 쓸 것 없다. 거기에는 당신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하나도 없다. 대신 자신의 글쓰기를 너그럽게 받아들여라.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인내심과 유머 감각을 키우라. 의심이라는 생쥐에게 갉아 먹히지 말라. 훈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잃지 말고 저 너머에 있는 광활한 인생을 바라보라.[175]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다.
글쓰기는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당신이 셀 수 없이 많은 글을 버릴 수는 있어도 글쓰기가 당신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다. 글쓰기 과정은 인생과 생명력의 끊임없는 자원이다.[176]
장대 위에서 발을 떼라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또는 큰 실패를 맛보았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고 이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건 당신은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만이 당신을 건강하게 또 살아있게 지탱해 준다.[178]
만물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나고 또 사라져간다. 이거야 말로 더 바랄 것이 없는 기가 막힌 기회다. 당신은 언제라도 다시 새롭게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이전의 실패는 모두 버리고, 다시 새롭게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이전의 실패는 모두 놓아 버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무언가 위대한 글을 쓰라. 아니 면 실패한 후에 느끼는,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에 대해서라도 쓰라.[179]
관통하는 글쓰기
그렇다. 우리의 목표는 고장 난 기계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이 또 있다.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그 일에 접근해 나가는가 그리고 그 일에서 어떤 가치를 얻는가 하는 점이다.[188]
우리는 모두 전체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를 통해서 글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89]
작가로 살아남기
우리는 작품 속과 작품 바깥이라는 두 가지 세계를 하나로 묶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비공격의 실천이다. 우리는 작품 속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도 이 기술대로 살아야만 한다.[192]
카타기리는 말한다. “우리의 목표는 매 순간 모든 존재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대하고 친절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말은 종이에는 멋진 시를 적으면서 자기의 삶에는 침을 뱉지는 말라는 뜻이다. 책상에서 시를 치우고 부엌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작가로서 살아남은 방법이다.[192]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또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근사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깊은 비밀이다.[193]
자신이 쓴 글에서 떠나라
당신은 즉흥적인 ‘글쓰기 창구’를 만들 수 있다. 준비할 것은 고작 백지와 빨리 써지는 필기구, 탁자 그리고 의자만 있으면 된다. 여기서 ‘즉흥시’ 또는 ‘주제를 정하면, 그 주제에 맞는 글을 써 드립니다.’라는 내용의 표시판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194]
일본에서는 뛰어난 하이쿠를 적은 종이를 병에 담아 강이나 개울에 띄워 보내는 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작가란 모름지기 자기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아주 의미심장한 우화다.[195]
위대한 불교 지도자인 초감 트룽파는 사업가가 되려면 우선 먼저 위대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두려움을 떨쳐내야 하며, 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즉흥글쓰기 창구는 바로 이러한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는 기회다. 글을 쓰는 동안 모든 것을 집중시켜야 하며, 그 다음에는 아무 미련 없이 자기가 쓴 글을 고객에게 넘겨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195]
하지만 우리는 대중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대중은 진실의 단면을 보고 싶어 한다.[196]
즉흥 글쓰기 창구는 글을 떠나 보내는 데 더없이 좋은 훈련이다.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 보내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당신은 작가로서 완전하게 설 수 있다. [198]
문학의 형식, 삶의 형식
글은 장편 소설이나 단편, 시, 희곡 등 장르마다 모두 특별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정해진 형식에 맞는 글을 쓰고 싶다면 그 형식으로 적은 글을 많이 읽는 게 최고다. 그 형식만이 가지고 있는 호흡을 눈여겨 보라. 맨 첫 문장이 무엇이었나? 어떻게 끝을 맺었는가? 같은 형식의 글을 많이 읽으면 그 형식이 당신의 의식에 저절로 각인이 된다. 그래서 직접 글을 쓰려고 할 때 그 구조에 맞는 글을 쓰게 된다.[199]
만약 짧은 시를 쓰고 싶다면, 먼저 짧은 시가 가지는 형식을 완전히 소화한 다음 실전에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해 보라. 열 개의 짧은 시를 연달아 써 보라. 한 편의 시를 쓰는 데 3분씩 할애하고, 각 시는 3행을 넘어서는 안 된다. 소재는 지금 당신의 눈 앞에 있는 것에서 고르라.[200]
첫 소재는 ‘유리잔’이다. 생각하지 말고 간결하게 세 줄만 적으라. 그리고 잠시 멈추라. 이제 다른 시를 써 보라. 규칙은 똑같이 3분에 3행의 시다. 이번 소재는 ‘소금’이다. 같은 방법으로 짧은 생각들이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낼 때까지. 특히 단시(短視)에서는 모든 단어들을 경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제목은 그 시에서 사용한 단어를 반복하기 보다는 그 시에 또 따른 느낌을 더해 주는 것으로 정해야 한다. [200]
하이쿠는 계절과 자연을 주요 소재로 5-7-5 음절로 이루어진 한 줄짜리 정형시다. 이것은 영어로 번역이 되면서 3행시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초등학생도 모두 3행시를 배우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만 갖추었을 뿐이지 진정한 하이쿠가 아니다. 블라이스(R.H.Blyth)가 소개한 4대 하이쿠 시인인 바쇼, 시키, 이싸, 부손의 작품을 읽어 보라.[200]
무엇이 진정한 하이쿠를 만드는가? 많은 하이쿠 작품을 읽다 보면 그 안에는 반드시 독자들의 마음을 도약시키는 순간이 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독자들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초월적인 세계를 일깨우는 순간이다. 바로 이런 순간 우리는 신을 경험하며 저절로 ‘아!’하는 감탄사를 터뜨리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하이쿠가 가지는 미덕이다.
눈 사람과 나눈 말
눈 사람과 함께
사라지네
– 시키 (201).
죽이지 마라, 그 파리를
살려 달라고
손발을 싹싹 비비고 있지 않은가
- 이싸
달이 동쪽으로 옮겨가자
꽃 그림자
서쪽으로 기어가네
- 부손
너무 울어
속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 바쇼
3행시 짓는 법을 아무리 많이 연습해도, 그 짧은 행간에 신과 접촉하는 경험을 담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바쇼는 평생 동안 하이쿠 다섯 편을 지을 수만 있어도 하이쿠 시인이 되며, 만약 열 편을 지을 수 있다면 이미 대가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202]
형식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문학의 형식도 배워야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인생이라는 형식을 채워 나가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생의 형식에는 훈련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203]
익숙한 초원을 떠나라.
내 말은, 우리 삶에는 반드시 미쳐 버려야 할 시기, 사물을 바라보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견고하지도 않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207]
우리는 스스로 영원 불멸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며, 이런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그 시간조차 알지 못한다. 오래 살다가 편안하게 자연사하기를 바라지만 당장 몇 분 후에 죽을 수도 있다.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숙명에 대한 깊은 고찰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더욱 생동하게 만들고, 현실에 충실하게 만들며,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207]
글쓰기에도 커다란 들판이 필요하다. 너무 고삐를 세게 잡아당기지 말라.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아무 이름도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길을 헤맨 다음에라야 당신은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208]
규칙적인 연습은 창조력을 마비시킨다.
다른 운동이 그렇듯, 글쓰기를 발전시키는 데는 연습만이 지름길이다. 하지만 글쓰기 훈련은 의무적으로 치러질 수 없다는 점이 여는 훈련과 다르다… 시간만 채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시간 속에 엄청난 압력을 가해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는 목숨 자체를 기꺼이 그 글 속에 집어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기계적으로 펜을 끄적거리면서 언제 시간이 끝날까 자꾸만 쳐다보게 될 것이다.[210]
글쓰기에도 이러한 유동적 공간이 필요하다.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글을 쓰면 단어들이 가득 채워진 종이 몇 장은 얻을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당신은 우울한 느낌이든, 꿈이든, 희망이든, 진정한 자신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만약 오랜 시간에 걸쳐 썼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글쓰기에 충분히 몰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오직 연습 시간의 경과로만 채우고 있다면, 당신은 평생을 연습해도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때로는 더 멀리 가기 위해 인생을 변화시켜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212]
자신의 규칙대로 미리 단정하지 말라. 만약 옥수수 밭에 철조망이 있었다면, 나는 그 철조망의 의미를 분명하게 읽었을 것이다.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살아 있는 존재와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법규란 들먹이지 않아도 항상 경우에 맞는 일을 하는 법이다. 사려 깊은 사람은 굳이 법규를 들먹이지 않아도 항상 경우에 맞는 일을 하는 법이다.[214]
모범생이 되기 위한 모범생은 되지 말라. 규칙에 얽매이면 글쓰기에 필요한 ‘진짜 현실’이라는 반석을 얻지 못한다. 그냥 옥수수밭으로 들어가라. 심장 전체로 글을 쓰라.[214]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13세기의 선승인 도겐은 이렇게 말했다.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침이 심한 인생에서 우리가 글쓰기를 향해 가져야 할 궁극적인 태도와 신념이다.[217]
글쓰기는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숨쉬기를 잊어버릴 순 없다. 정원을 손질해야 하고, 지하철을 타야 하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소중한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글쓰기의 기본이다.[218]
이렇듯 작가가 되려면 아주 깊은 마음이 따라야 한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깊은 진실이다. 그리고 만약 작가가 아니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나머지 인생 동안 가야 할 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다시 또 다시 기억할 것이다.[219]
외로움을 이용하라
글쓰기는 지독하게 외로운 것이다.[224]
예술은 의사소통이다. 고독의 씁쓸한 맛을 본 사람은, 거기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지애와 연민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에게 당신의 인생을 알려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게 된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224]
고독을 이용하라. 고독의 아픔은 당신에게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고독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그 고독을, 당신의 더 깊은 곳을 탐사하는 내시경으로 이용하라.[225]
자신의 뿌리를 이해하라.
하지만 명심하라. 뿌리로 돌아가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그 뿌리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뿌리 위에는 가지와 잎사귀와 꽃이 있다. 이것들은 무한한 하늘을 향해 뻗어간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231]
우리는 현대 사회의 생산물이며, 이 사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자 한계다. 우리는 단 한가지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뿌리를 파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뿌리가 묻힌 곳에서 발견되는 고통을 견디기 싫어서, 그것을 외면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도망’을 선택한다. 우리가 자신을 만들어 준 최초의 장소를 떠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232]
나는 누구인가? 또 내 글의 원천은 어디인가? 이것을 이해하고 다시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켜 줄 때, 당신이 전달한 것은 비단 당신의 뿌리에 대한 편협한 기록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근원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233]
누구에게나 천재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바깥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쉽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이 좋은 글을 썼음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곳에 들어 있는 진정한 재능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사이를 가로막던 장애물을 치워버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작업이 아름답고 창의적인 인간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끌어 안아야만 한다.[248]
우리 안에는 누구나 뭔가 천재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그것을 바깥으로 발산시켜야만 한다는 뜻이다. 내면에 있는 풍요로움을 외부에 있는 작품으로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 예술가들이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다가서기 힘든, 고요한 평화와 확신감을 얻는 열쇠다.[248]
사무라이가 되어 써라
사무라이 세계에서는 거칠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야박하다는 뜻이 아니라 단단한 진실과 함께 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상처 입힐 수 없는 진실이다. 이 진실이 세상을 더욱 명료하게 만들고 시를 빛나게 한다.[253]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는 후배 시인인 앨런 긴즈버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만약 그 시에 한 줄이라도 에너지가 있다면, 그 한 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 버려도 좋다.” 그 한 줄이 바로 시라는 뜻이다. 시는 생명력의 그릇이다. 한 줄 한 줄이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 작품을 쓸 때 이런 부분은 간직하고 나머지는 잘라내 버려라.[254]
자신이 쓴 글에서 어느 부분이 살아 있고 깨어 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글이 계속 타 들어가 환한 빛을 내는 그 지점이 결국 하나의 시와 산문이 된다. 그리고 이 차이는 누구나 알 수 있다.[254]
완전히 태워버린 것, 첫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것만이 모든 사람을 깨우고 모든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다. 누군가 정말 뜨거운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이 듣는 모든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수업을 하면서 많이 보아왔다.
자신의 작품을 솔직하게 쳐다보라. 무언가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된 것이다. 만약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죽은 발에 채찍질하는 짓은 멈추라. 다른 글을 쓰라.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다.
나쁜 글은 세상에 이미 너무 많다. 그래서 좋은 글을 단 한 줄만 써도 당신은 유명해질 것이다. 미적지근한 글은 사람을 잠들게 만든다.[255]
그날 나는 작업실에서 도저히 좋은 글을 슬 수 없을 거라는 절망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앵앵거리는 모기떼 같은 이런 자기 비판적인 생각 아래서도, 내 손은 첫 생각을 기록하고, 그 순간을 옮겨 놓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지치지 않고 지껄여대는 내면의 비평가를 무시하고 계속 종이 위에 손을 움직이게 할 능력이 있다.[258]
고쳐 쓰기
자기가 쓴 글을 쓰자마자 다시 읽어 보지는 말라.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기 전에는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리라. 작품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한달 정도 걸려 노트 한 권 분량의 글을 썼다면, 이제는 마치 다른 사람의 글을 대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읽을 때는 항상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이 사람이 하려는 말은 무엇일까?’ 작음을 처음으로 대하듯 여유 있는 마음으로 읽자. 건너뛰지 말고 한 페이지씩 차례대로 읽어라.[256]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다. 왜냐하면 당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글쓰기란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자신의 소박한 인생에 매료되어 자리를 떠날 줄 모르게 된다. 평범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257]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한 달 후 당신은 그 시절 당신이 썼던 노트를 읽으며 그 글의 훌륭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 서로를 깨닫고 하나가 되는 시점이다. 이것이 작품이다.[259]
다시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게 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조금도 과장시키거나 공격하는 일이 없이 그저 수용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260]
작품을 다시 돌아볼 때는,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전사, 즉 사무라이가 되어야 한다. 미련 없이 적을 잘라 내는 사무라이처럼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을 때는 기꺼이 감상을 버려야 한다. 깨끗하게 본질을 꿰뚫는 마음으로 자신의 글을 쳐다 보라. 하지만 글에 간섭하고 싶고 좀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261]
원고 수정 작업은 ‘새롭게 다시 상상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쓴 글에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먼저 전체 그림을 다시 본 다음 그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세부 묘사를 첨가하면 된다.[261]
똑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자신을 탓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지금껏 쓴 글들을 모두 읽어보고 좋은 부분들만을 골라 조합시켜 보라. 자신이 쓴 글에서 강하게 끌리는 내용만을 잘라서 이어 붙이는 것이다. 고쳐 쓰기 할 때에도 처음 글을 쓸 때처럼 제한된 시간 안에서 훈련하는 규칙을 이용해야 한다. 이런 방법이 전에 썼던 작품과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된다. [261]
자신이 쓴 글 중에서 좋은 부분은 표시를 해두라. 이것들을 글감 목록에 적어 놓으면 다음 번 다시 글을 쓸 때 그 중 하나를 잡아서 새롭게 시도해 볼 수 있다.[262]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카타기리는 위대한 작품 앞에 서게 되면 평화로움을 느낀다는 말을 자주 한다.[264]
예술가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영적인 사람은 평화를 발산한다. 하지만 카타기리는 이 영적인 사람들이 평화를 느끼게 되기까지는 지난한 삶의 노력과 그 순간을 움직이는 우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예술가들이 생명력 있는 작품을 얻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요한 평화와 접촉해야만 한다고 말한다.[264]
에필로그
“이 책을 완성하는 데 1년 6개월이 걸렸어요. 적어도 절반은 처음 썼을 때 나온 것들이죠. 가장 힘든 싸움은 글 쓰는 행위가 아니었어요. 내가 과연 괜찮은 것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싸우는 게 제일 힘들었죠.”
마지막 한 달 반 동안 나는 주말도 휴일도 없이 글을 쓰는 데 매진했다. 나는 한 장씩 완성시킨 다음,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내 속에서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먹어라, 친구를 만나라, 낮잠을 자라고 아우성 쳐댔지만, 나는 그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267]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성공이 행복이다’라는 등식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성공을 해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성공은 또 다른 고립감과 실망을 가져온다. 모든 성공이 다 마찬가지다. 그러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여유를 가지라. 이렇게 큰 감정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제한시키지 말라.[267]
카타기리 선사가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쪽에서 다신 책을 출판하겠다고 하면 아주 잘된 일이지만, 그것에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글을 쓰는 데만 정진하십시오.”[268]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탈리, 이 책은 끝났어. 넌 또 다른 책을 쓰게 될 거야.”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뭘 모르는 겉멋이 들었던 게다. 작년 일년의 연구원 과정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 하나가 생긴 대로 살라는 것이다. 글도 생긴 대로 쓰고 내가 잘하는 글쓰기로 쓰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시간이다.
이 책을 다시 잡은 건 이 책이야 말로 지금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진정으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해 글쓰기를 하도록 끌어 당겨줄 에너지가 필요했다. 명상 체험을 통한 내면의 기운이 흐르는 이 글쓰기 책은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나탈리는 마음대로 손이 가는 대로 읽기 시작해도 좋다고 했지만 꼼꼼히 읽고 정리해 보니 글쓰기의 단계가 엿보인다. 처음에는 글쓰기 훈련의 정의를 내려준다. 글을 쓰고 싶은 첫 마음을 놓치지 말고 충실히 쓰라고 충고하며 이상적인 글쓰기를 알려준다. 글감 찾는 방법을 알려주며 세부 묘사를 통한 생동감 있는 글쓰기를 일러준다. 작가의 임무와 깊이 있는 글쓰기를 일러준다. 사무라이처럼 잘라내는 법과 고쳐 쓰기의 묘미를 일러주며 끝을 맺는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글쓰기 방법들이 다르게 제시되는 것도 흥미롭다.
붙잡고 가야 할 말들이 많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스승이 있고 최상의 글쓰기 방법론이 있다고 해도 직접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글쓰기의 진실은 아주 간단하다. 자꾸자꾸 써보는 것이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고 저자는 단호히 말한다. 이 단순한 진실을 우리는 실천하지 못해 더 좋은 글쓰기 방법이 있지나 않을까 두리번거린다.
내가 만들어 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느낀 감정들일 뿐이며 나와 내가 쓴 작품은 별개라는 언지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작가는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고 고독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녀는 글쓰기를 즐긴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 주고, 많이 써 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작가가 되려면 아주 깊은 마음이 따라야 한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깊은 진실이다.”
깊은 마음을 따라 먼 길을 떠나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온 마음을 다해 쓰고 또 쓰는 것이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으며, 많이 써서 작가가 되고 싶다.
이 책은 마지막 책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책이다.
이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며 길을 떠날까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믿음을 갖고 계속해서 밀고 나갈 때만이, 그 일이 자신이 가야 할 길로 이끌어 주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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