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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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 대한 생각
연구원이 되기 위한 관문이었던 레이스의 첫번째 책‘신화와 인생’책 날개에는 조셉 캠벨의 사진이 실려 있다. 현대 인간사 모든 문제를 신화에 빗대어, 거침없이 일필휘지로 알려주는 인류의 스승! 그의 얼굴이 실린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사진의 배경이 된 나무가 우거진 것으로 보아, 계절은 늦여름 혹은 초가을로 판단된다. 사진 속에 찍힌 캠벨의 나이는 아마, 5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온화한 인상, 잘 생긴 코, 명료하고 깊은 눈매, 부처님처럼 축 늘어진 커다란 귀!
신학, 인류학, 문학, 철학, 역사, 심리학, 종교, 예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캠벨의 해박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 크지 않은 저 머리 속에 인류의 비밀과 신화의 본질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글 쓸 시간도 부족했지만, 사진을 계속 들여다 보았다...“어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 떠 올랐다.” 홈페이지에 있는 구본형 사부님의 프로필을 열어보면, 스승님의 옆 얼굴 사진이 나 온다. 캠벨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오른쪽으로 90도 돌려 옆 얼굴이 보이는 자세를 취하니, ‘오호..비슷하다..비슷하다.’
그의 얼굴과 구본형 사부님이 많이 닮았다.
조셉 켐벨, 그의 목소리는‘이선형’을 닮았다. 풍경소리 들리는 산방에서 감칠맛 나는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듯, 차분하게 우리에게 인생의 비밀을 들려준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조셉 켐벨, 그는‘박상현’처럼 묵직하고 듬직하다. 예수를 영웅으로 규정하는 세상 사람들의 항의와 손가락질에도 묵묵하게 미소만 짓는다. 그리고 한결같이 조용한 톤으로 말한다.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켐벨 아저씨, 그의 깊은 눈 속에서‘김인건’의 눈매가 엿보인다. 조용한 관찰력으로 전 세계의 신화와 신화에 내포된 비밀을 파악하여, 영상으로 제작했다. 그는 그 영상을 눈앞에서 보여주며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 테를 붙잡는 삶이지..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 자, 돈이 중요할까? 천복이 중요할까?
진정한 예술가는 만물의 ‘광휘’를,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러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다. 켐벨, 그는 노래하는 우성과 그에 맞추어 춤추는 은주와 닯았다.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구본형 사부님과 6기 모두는 그 노래에 맞추어 밤새도록 요가 춤을 춘다.
(6기 나머지는 다음에..)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p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겠지요.
(p9)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헤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p10)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의 어떤 힘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의 권능이 의례화하고 신화화하는 것이다.
(p12)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p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p15) 목사들이 범하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
(p17) 여기에 종교의 귀한 메시지가 있지요. 즉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랍니다. 하고 덧붙였다.
(p21)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p25) 도대체 신화가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p26)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는 말씀이군요?
(p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p32)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p33)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 /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37)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배웁니다.
(p42)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p47)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p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가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p50) 영화에는 확실히 마력같은 게 있어요.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곳, 그러니까 영화가 나타내고 있는 상황을 체험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지요.
(p55) 아이젠하워가 컴퓨터가 가득 차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는 이 기계에다 “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입력시켰다지요? 그랬더니 기계들이 일제히 불을 번쩍거리면서 돌아가다가 한참 뒤에 “이제는 있지요”하더라잖아요?
(p56)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나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p59)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p61)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p71) 워싱턴은“독립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유럽의 혼돈과 결별하게 되었다.”고 했지요.
(p73)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p74)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란느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p85) 흡사 한 연극 대본이 각기 다른 곳에서 상연되고 있는 것과 같지요. 말하자면 지방에 따라 그 지방 연기자가 그 지방 옷을 입고 나와서 똑같은 옛날의 연극을 연기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p87)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내면에 송두리째 차곡차곡 쌓여 있어요. 프로이트는 더할 나위없이 상세한 꿈도 실제로는 가장 상세할 수는 없다는 말을 했어요. 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영적인 정보가 무진장하게 발현되는 현장입니다. /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p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p91) 융 박사는 꿈에는 두 종류, 즉 개인적인 꿈과 원형적인 꿈 혹은 신화 차원의 꿈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p97) 뱀이 기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물처럼 흐르는 것 같지요. 혀를 보세요. 불꽃 같지 않아요? 결국 우리는 물과 불이라고 하는 한 짝의 대극을 뱀에게서 발견합니다.
(p100)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서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p107)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p113) 존재를 이해하려는 이 인간의 상상력, 아주 작은 모험을 통하여 초월의 가능성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장엄한 모습에 문득 놀라고는 합니다.
(p114) 신화에 관한 선생님의 작업은 저의 신앙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제 믿음을 그때까지 갇혀 있던 문화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p115) 종교라는 것은 제 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p116)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 만일에 은유를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먹는 것이나 같지요.
(p117)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p118) 사람들이 나에게 “재림을 믿나요?”하고 물으면, 나는 “천국이나 마찬가지로 재림도 메타포(은유)입니다.”라고 대답하고는 합니다.
(p120)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가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창의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p123)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p133)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 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가.
3. 태초의 이야기꾼들
(p141)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p147)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p150) 내가 짐승을 잡은 것은 자연의 뜻에 따른 것이지 나의 개인적인 의도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런 뜻을 지닙니다.
(p160) 남자들은 아이를 남자들만의 성소로 데려갑니다. 아이는 여기에서 시련을 당하지요
(p162) 우리 사회에서 이제 입문 의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p164) 여자라는게 뭡니까? 생명을 나르는 수레 아닙니까? 생명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생명을 낳고 먹여서 기릅니다. 여자의 힘은 대지의 여신이 지닌 힘과 동일시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p168)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p173) “귀신을 몰아낸답시고 그대 안에 있는 가장 귀한 존재를 몰아내지 않도록 주의하라”이런 말을 한 사람이 니체였지요. 아마?
(p175)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 (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
4. 희생과 천복
(p177) 사는 곳을 성화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p179)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비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 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p186)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잡아줍니다.
(p189)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누가 우리의 샤면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 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우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p193) 신 관념은 항상 문화적 조건을 따릅니다. 선교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 자기의 신을 어느 땅에 들여온다고 한들 그 신은 그 땅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신으로 변모합니다.
(p194)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마력이 대지의 마력을 버티어주게 된 거지요.
(p201)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p202) 미사의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곧 구세주의 피요, 살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내면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살과 피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어 역사하는 것이지요.
(p204) 우리는 우리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p205) 이 모든 드러남의 이면에는 빛으로 만물을 비추는 하나의 광원이 있어요. 잘 짜여진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아,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
(p209) 죽음의 신은 춤의 신인 동시에 섹스의 신이기도 하지요. / 이것은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 해골 사냥은 신성한 행위, 신성한 살인입니다. 젊은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제 몫의 살인을 해야 합니다. 죽음 없이 새 생명이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p211)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 쇼펜하우어는, 자세히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장담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한 것은, 사실은 “네 이웃은 곧 ‘너’이니까 사랑하라”는 뜻이겠군요.
(p213) 아벨라르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에다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멀어버린 인간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된다는 겁니다. /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p217) 종교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체는 이것은,“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 통찰력의 화신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지옥의 미궁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지복직관을 경험하지요.
(p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받는 자는 인간을 조잡한 육식동물에서 참 인간으로 바꾸어놓을 만한 어떤 본을 보이기 위해 우리에게 옵니다. 이 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민입니다.
(p219) 피닉스는 불 속에서 자신을 태웠다가 잿더미 속에서 새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새입니다.
(p222)“저 좋은 것만 하고 인생을 살 수는 없는 법이야. 저 좋은 것만 하고 세상을 살려고 했다가는 굶어죽어. 나를 봐!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평생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어.”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하고 산 셈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모 : 이 천복을 좇으면 어떻게 됩니까?
켐 : 천복에 이르는 거지요. /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p225)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 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자, 돈이 중요하겠어요, 천복이 중요하겠어요?
(p226)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 종교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보기까지는 끝내 천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나는, 살아있을 동안에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곧 천복이라고 생각해요.
(p227)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요? 있다면, 연민을 느껴야 당연한 불쌍한 사람이지요.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
모 :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켐 :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5. 영웅의 모험
(p229)‘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p234)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톨스토이는 ‘그 지도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인가, 아니면 무리의 선두에 선 자에 지나지 않는가?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p241) 언젠가 육체가 우리에게,“이봐, 나라는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있군, 그래‘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고인 물이 디고 말았어,썩겠지“ 하고 말입니다.
(p244)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46) 신화학적 의미에서 존 레논은 개혁자였어요. 비틀즈는, 우리 사회가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음악을 만들었어요. /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다 정신적인 깊이를 더했습니다.
(p253) 동화는 어린이들의 신화에요. 각 나이에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신화가 있어요. 나이를 먹게 되면 튼튼한 신화가 필요해집니다.
(p263)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늘 명령과 지시를 받으면서 살지요.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난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좋은 코치는 선수에게, 팔은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 다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아요.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 줍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술가들도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또 하난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p265) 다스 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거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p267) 스타워즈를 처음 보았을 때 한 생각입니다. 영웅이 모험의 소명을 받고, 여행을 떠나 시련을 겪고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를 얻은 뒤 사회의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돌아온다...
(p270)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1)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
모 : 하지만 새로운 진실의 도전에 맞서고, 자기 삶을 여기에다 맞추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아니겠습니까?
캠 : 천만에요. 스승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소수겠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것에 반응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아이가 위험에 처할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나가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이와 같아요. 이런 능력은 우리 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p272)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처방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있는 용입니다. ”안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 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p273)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모 :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켐 :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딸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p275) 석가 역시 진리를 바로 가르쳐 주었던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었지요? 당연하지요.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을 석가가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p275)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p283) 등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사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 이 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데, 용의 이름은 ‘그대의 미래’입니다.
(p284) 우리는 예술을 공부하고 예술의 기법을 배우러 가서 스승이 강요하는 것만 열심히 좇곤 하지요. 그러다 보면 기법을 쓰기는 쓰되 스승이 시키는 대로 쓸 것이 아니라, 한번 자기 식으로 써보고 싶을 때가 오지요. 이게 바로 사자의 행위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이때가 되면 학생은 스승에게서 배운 모든 기법을 버립니다.
(p285) 예술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 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상당수의 예술가는 제자에게 이런 식의 홀로 날기를 허락합니다. /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p285)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p293) 달라이 라마에게서는 원망이나 미움과 관계가 있는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와그 교파의 구성원들은 무서운 격동기, 무서운 폭력의 희생자들인데도, 증오의 감정이 없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종교가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모 :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군요
켐 : 바로 우리 운명을 빚는 도구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p297)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p301)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 진정한 예술가는 만물의 ‘광휘’를,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러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p302)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예술뿐인가요? 내가 추천하고 싶은 두 방법이 종교와 예술을 통해 이르는 방법입니다. 삼엄한 철학으로는 이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학문이라는 것은 개념이 정교하게 얽힌 숲 같은 것이니까요..
(p303)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모 : 모험이라면 영웅의 모험 말씀이신지요?
캠 : 그래요, 영웅의 모험, 즉 살아 있음의 모험이지요.
6. 조화여신의 은혜
(p318) 히브리 전통에는 처녀수태 관념도 없는 것으로 확신해요. 그러니까 처녀 수태 관념은 그리스 전통에서 기독교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p320) 모이어스 씨,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구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자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에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모 : 그게 처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켐 :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에요.
(p322) 모 : 예수는 선생님이나 저처럼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캠 ; 그렇지요만,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어요.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영웅이나 반신은 자비로움이 육화된 존재로 태어나지, 성적인 욕망의 소산,혹은 종의 보존을 위한 소산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p335) 모 :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실제로 영적인 삶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캠 ; 그렇지요. 신화는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약도까지 그려주고 있어요.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약도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이 약도라고 하는 게 다 같지는 않아요.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44) 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 / 가슴이라면... / 타인을 향하여 열려야 할 우리의 기관이지요. 가슴을 열고 남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게 다른 짐승들과는 다른 인간의 특질 아닙니까?
(p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9)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 /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 나의 사랑이 있어야 겠다, 나의 인생이 있어야 겠다.
(p357) 성배는,뭐라고 할까?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p359) 성배는,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는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p364)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에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p365)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 그러나 음유시인 전통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성실’이었어요. /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 : 청교도들은 결혼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결혼을 하면 날마다 사랑해야 하고 날마다 용서해야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랑과 용서의, 현재진행형 성사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켐 : 더 정확하게는 ‘시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p369)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계에 면역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애관계,..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 / 성실한 태도가 분산되니까요.
(p370)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 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p371)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채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탄이 신의 애인이었다는 이 페르시아 신화를 좋아하는 겁니다.
(p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8. 영원의 가면
(p375) 해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p377) 우리의 인생은 어디에서 옵니까? 우주의 생명인 궁극적인 에너지에서 오지요.
(p378)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 기도는 신비에게 말을 걸고 명상하는 행위이지요.
(p379) 융 박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어요.
(p380)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 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p383) 가르쳐 드리지요.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p384) 나는 자비를 근본적인 종교 체험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
(p386) 누구든 그 존재와의 관계안에서 살면 그리스도 같을 수 있다는 겁닏. 누구든 말씀의 메시지를 삶 속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면 곧 그리스도와 동등해질 수 있다.
(p387)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p393)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p395) 비교신화학 강의를 하면서 나는 약간 두려워했어요. 학생들의 종교적 신앙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나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던 거지요. 그러나 곧 정반대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학생들에게 종교 전통이라는 것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되었어요.
(p396) 똑같은 앎에의 갈망을 체험하고, 인류의 언어를 초월해 있는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신앙을 돈독하게 할망정 신앙에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p398) 이게 나의 절정경험입니다. 그날은 어떤 선수도 나를 이길 수 없었어요.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p405)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p411)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p412)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p413)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414)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3. 내가 저자라면
대담의 형식이 갖게 되는 한계를 이 책 또한 가지고 있다. 자유롭고 편안한 형식으로 모든 것을 논할 수 있지만, 장과 장과의 연결이나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같은 얘기가 중복되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용어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생략했다. 신화에 대한 입문서라고 하지만, 캠벨에 대한 사전지식과 용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쉽게 수용하기에 어려운 책일 수 있다.
그러나, 단 한권의 책으로 위대한 학자 캠벨의 사상을 표현하기에는 애초부터 요령부득이다. 책이 어렵고 구성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그의 지식의 방대함이 문제일 것이다. 친절한 편집자가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요점정리 하듯이, 핵심을 짚어주는 방식은 오히려, 이 책에 어울리지 않는다. 인류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신화학을 풀어가는 방식은, 질문과 질문을 이어가고 끌어내는 하이퍼 텍스트 형식의 대담형식이 더 적합해 보인다. 신화는 메타포인데, 신화학을 말하는 이 책 또한, 메타포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핵심요약을 이해하고 싶다면 빌 모이어스의 서문을 읽어보라고 앞에 배치한 것일테니....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니다.
주옥같은 정의, 거침없는 지혜, 책 전체를 한 줄, 한 줄 필사하고 싶은 욕망이 넘실거렸다. 시간에 쫓기며 읽고 해치워 버릴 내용이 아니니까...결혼, 죽음, 종교에 대한 부분이 특히 가슴에 남았다. 4월에 다시 읽을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다. 다시 한번 천천히 정독하며 읽어나가야 하겠다.
4월 4일 일요일 저녁, 아내와 함께 부활대축일 미사에 참례했다.
44살의 나이, 두 번 죽고 부활하라는 계시로 여겨졌다.
신화를 주제로, 캠벨에 관한 노래를 만든다면 아마, 핵심 키워드는 영웅이 될 것 같다.
영웅의 모험, 영웅의 길, 살아있음의 모험..
* 가장 감동적인 귀절
(p227)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요? 있다면, 연민을 느껴야 당연한 불쌍한 사람이지요.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
모 :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켐 :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413)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303)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모 : 모험이라면 영웅의 모험 말씀이신지요?
캠 : 그래요, 영웅의 모험, 즉 살아 있음의 모험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