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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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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7일 06시 45분 등록

▶ 저자 소개

 * C. W. 체람 : 본명은 KURT W. MAREK. 1915년 베를린에서 출생하여 신문기자, 연극비평가, 출판인으로 활약하였다. 히틀러의 제3제국 선전가로 관여했던 전력을 의식해 저술 시에는 주로 C.W CERAM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1949년 그는 《신, 무덤 그리고 학자들 GODS, GRAVES & SCHOLARS(국내에는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으로 출간)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26개 이상의 국가에 번역되어, 50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그는 인류에게 고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일깨워 아스완댐 건설로 아부심벨의 유적이 물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으며, 히타이트 문명 발굴을 위해 터키의 고고학적 발굴에도 참여하여 《THE SECRET OF THE HITTITES, THE MARCH OF ARCHAEOLOGY》를 내놓았다. 이 외에도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발굴과 해독》, 《사진으로 보는 영화의 역사》가 있으며, 실명으로 내놓은 저서로는 《YESTERMORROW : NOTES ON MAN'S PROGRESS, HANDS ON THE PAST : PIONEER ARCHAEOLOGIST TELL THEIR OWN STORY》등이 있다.

 

열여덟 살부터 문학과 영화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고, 19살에 잡지사와 출판사를 창립할 만큼 일찍이 글쓰기와 저널리즘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체람은 생을 다할 때까지 하루에 책 한 권씩을 읽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지킨 다독가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격동의 독일 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그는 국가사회주의의 망령으로부터 사상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저술의 주제로 삼는다. ‘사실의 추구를 진리처럼 소중히 생각했던 그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으리라. 과거의 역사를 훑는 과정에서 조우한 고고학은 사실관계에 민감한 저널리스트로서 그의 기질과 잘 맞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한 미래학이라는 면에서 그에게 필생의 업이 된다. 4년 반이라는 방대한 작업 끝에 내놓은 이 책은 독일에서만 2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사람을 배경으로 사실들을 제대로 정리하면 그 사실은 가장 재미있는 문학적인 구조가 된다.” 사실에 대한 그의 저술 원칙은 이 책의 성공 배경을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아라. 그리고 책을 써라.” 남자로서 해야 할 일을 모두 완수한 그는 1972 57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머리말

 

이 책은 학문적 야망을 가지고 쓴 책이 아니다. 단지 학문 연구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그들 내면의 긴장과 극적인 동기, 인간적인 한계에 초점을 맟추어 조명하고자 했을 뿐이다. 18

 

이 책은 학자들이 결코 전문 학술서적으로 분류하지는 않을 책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의도며, 그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고고학은 모험과 낭만을 찾아 떠나는 결단력과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 책과 씨름하는 성실성이 한데 어우려진 학문이며, 모든 시대에 걸쳐 지구전역을 활보하며 측량하는 학문이다. 19

 

모험을 정신과 행동의 결합으로 볼 때, 고고학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이 또 있을까? 19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은 옛날 옛적에 일어난, 낭만적이지만 결코 현실에 위배되지 않는 사건들과 주인공들의 일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장된 의미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 책은 분명 소설이다. 20

 

고고학과 더불어 내가 사명감을 느끼는 또 한 가지 분야가 있는데, 바로 특수한 형식의 문학이다.

내가 알기로 그 창시자는 미국의 의사 폴 드 크루이프다. (……) 드 크루이프는 매우 전문적인 학문의 발달 과정을 마치 추리소설을 읽듯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놓았다. 드 크루이프는 1927년 미생물학의 발달사를 제대로 보고 제대로 정리한다면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복잡한 학문적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 독자를 학자 자신이 걸어간 길과 똑 같은 길로 이끌며 착상의 순간부터 결과를 얻을 때까지의 연구 과정을 묘사해나가는 방법이었다. 21

 

드 크루이프가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쓴 책이 《소설처럼 읽는 미생물 사냥꾼 이야기》다. 22

 

나는 가장 잘 쓴 논픽션 소설은 문학적인 요소는 단지 학문적 사실들을 배열하는 데만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학문적 사실이 언제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도록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22

 

. 조각상 이야기

역사에서나 일상에서나 사람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가장 빠른 길인 줄 알고 선택한 길이 알고 보변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9

 

고대의 출처에 의하면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화산폭발로 사라진 날은 같은 날이었다. 29

 

개의 해골은 온전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데 여자의 사지는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35

 

엄청난 유물을 바라보는 18세기 지식인들의 시각은 두 가지였다. 르네상스 이후에 사람답게 고대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사람과 정밀 학문의 태동을 느끼며 심미주의에만 빠지지 않고 사실 연구에 헌신하기를 열망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36

 

공개 보고서의 가치는 그것이 베수비오 산 기슭의 발굴에 대한 세계 최초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데 있었다. 41

 

빙켈만은 미술품을 가리키고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의 시대가 되는 전 지역을 측량하고, 거기서 얻은 아주 작은 실마리에서 추론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42

 

빙켈만의 업적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지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만이 난무하던 세계에 질서를 도입하고, 추측과 전설로 얼룩진 분야에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는 데 있다. 43

 

이책에서는 고고학의 과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발달 과정을 찬찬히 서 내려갈 뿐, 아무것도 지레짐작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47

 

사람들은 브라덴킬이 죽어서 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왼발이 비단 양말을 신은 채 해마다 자라 언젠가는 무덤을 뚫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기다리고 도 기다렸지만 무덤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소녀의 아버지는 가산을 탕진한 가난한 목사였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무덤을 파서 브라덴킬의 발이 얼마만큼 자랐는지 확인해보자고 졸랐다. 58

 

소년 하인리히 슐리만은 이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어요. 내가 어른이 되면 트로이를 찾겠어요. 그리고 왕의 보물도 찾을 거예요!” 아버지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59

 

메클렌부르크 출신의 목사 아들은 자신의 사업가 기질을 아메리카 대륙의 개척자 수준으로 계발했다. 61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무역 사업에서 손을 뗐다.” 62

 

머릿속이 호메로스 이야기로 꽉 차 있던 그 사람은 역사성을 의심하던 학계의 견해에 맞서 호메로스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62

 

메두사의 머리가 박힌 아가멤논의 방패, 머리 셋 달린 뱀의 모양을 한 방패 띠, 극도로 상세하게 묘사된 전차, 무기들, 슐리만은 이 모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리스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 64

 

슐리만은 그들 개개인이 실존 인물이었다고 믿었다. 이 점에 있어 슐리만의 생각은 위대한 역사가 헤로도토스나 투키디데스와 일치했다. 이 두 사람은 트로이 전쟁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고, 전쟁에 참여했던 모든 인물은 실존 인물이었다고 줄곧 주장했다. 64

 

그는 휴대용 온도계로 샘의 수온을 쟀다. 마흔 개 모두 똑같이 17.5도였다. 66

한 손에는 시계를, 다른 한 손에는 호메로스의 시를 들고 슐리만은 트로이를 에워쌌다는 언덕과 아카이아 군이 배를 댔다는 산자락 사이를 걸었다. 67

 

미케네와 티린스는 이미 2335년 전에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남은 유물을 보면 앞으로도 1만 년은 견딜 것 같아 보인다.” 트로이는 고작 722년에 파괴되었다. 67

 

일리움 노붐의 유적지 아래 다른 유적지가 있었고, 그 아래로 또 다른 유적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 언덕은 마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야 하는 거대한 양파와도 같았다. 각 층은 서로 다른 시대의 유적으로 보였다. 민족들이 살고 또 죽었다. 도시들이 건설되고 다시 몰락했다. 칼과 불이 광란했고,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을 교체했다. 이렇듯 멸망한 도시 위에 새로운 도시가 일어서기를 거듭했다. 71

 

호메로스의 트로이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던 슐리만은 시간이 흐르면서 동료들과 더불어 무려 일곱 개의 몰락한 도시를 발견했고, 여기에 훗날 두 개를 더 보탰다. 71

 

슐리만이 고고학 분야에서 거둔 성공은 세 번에 걸쳐 절정에 이른다. 그 첫 번째가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을 찾은 일이고, 두 번째는 미케네의 왕실 고분을 발굴한 일이다. 76

 

8년 후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이고, 아버지를 살해한 아이기스토스도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77

 

고대의 작가들이 쓴 기록은 바로 그 자리가 살해당한 아가멤논과 친구들의 무덤이 있는 곳임을 슐리만에게 알려주었다. 78

 

슐리만이 발굴한 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황금 마스크와 황금 가슴받이였다. 전승에 의하면 마스크와 가슴받이는 왕의 시신에 끼칠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얼굴과 가슴에 덮는 도구였다. 84

 

빙켈만의 업적은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그 영향력이 교양 있는 소수의 사회에 머물지 않고 그 시대의 사회 계층 전반에 미치기 위해서는 작가 또는 저술가라는 중간 매체가 필요했다. 슐리만은 중간 매체없이 직접 나섰다. 자신이 발견한 모든 유물을 발표했고, 본인도 자신이 발굴한 유물에 매우 감탄했다. 87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 아웃사이더는 정식 교육이 거는 브레이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학문의 전통이 설치한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이런 아웃사이더 가운데는 독학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90

 

아들의 이름은 안드로마케와 아가멤논이었다. 100

 

그는 주 관심사였던 문자에 대해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증거를 찾기 위해서 크레타로 갔다. 101

 

에반스는 슐리만이 그린 그림에 액자를 둘렀다. 동시에 수많은 다른 그림의 스케치도 발견해냈다. 101

 

경제적 번영은 곧 문화적 쇠퇴의 시작이었다. 105

 

이 경험이 에반스의 이론을 뒷받침했다. 에반스는 크레타가 유럽에서 가장 지진이 심한 지역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갑자기 땅을 흔들고, 가르고, 인간이 지은 집을 집어삼키는 무서운 지진이 아니고서는 미노스의 왕궁이 그토록 철저하게 파괴될 수 없었을 것이다. 111

 

. 피라미드 이야기

나폴레옹 1세와 비방 드농은 이집트를 최초로 고고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사람들이다. 이 두 사람은 황제와 남작, 총사령관과 예술가로서 인생의 일정 구간을 동행했다. 둘은 서로 잘아는 사이였지만 닮은 점은 전혀 없었다. 나폴레옹이 펜을 들면 명령서, 지시서, 법전이 나왔지만 드농의 손에서는 관습을 무시한, 가히 포르노라 할 만한 경박한 소솔과 그림이 쏟아졌다. 117

 

동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관문인 이집트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한 사람은 나폴레옹 이전에도 있었다. 괴테는 이미 수에즈 운하의 건설을 예견했고, 이 사업을 올바른 정책이라 여겼다. 그보다 먼저 라이프니츠는 1672년에 루이 14세에게 보내는 진정서에서 프랑스의 전제정치를 위해 이집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정확히 짚었다. 정확하다는 말은 물론 그 후 일어난 정치적 변하를 가리는 말이다. 118

 

병사들은 넋을 놓고 바라볼 시간조차 없었다. 카이로는 죽은 과거 속에서 마법을 걸어 미래를 손짓하고 있었지만 그들 앞에는 전쟁이라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119

 

나폴레옹은 대중의 심리를 잘 아는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맞선 유럽인이었다. 그 순간 나폴레옹은 외쳤다. “병사들이여! 4000년 역사가 그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119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훗날 이집트를 정치적으로 개척하고 고대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시작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길에서 전함에 실었던 것은 2000문의 대포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이집트 관련 서적을 총동원하다시피 한 장서, 수십 상자에 이르는 과학 기자재와 측량 기구는 물론이고, 선원들과 병사들이 먹물이라고 부르며 얕잡아본 175명의 교양있는 민간인도 종군했던 것이다. 121

 

이집트에서 수행할 학문적 과제를 설명하는 동안 한 손에 카르스텐 니부어가 쓴 두 권짜리 《아라비아 여행》을 든 채 가끔씩 자신의 말을 강조하느라 구부린 둘째손가락 마디로 가죽표지의 뒷면을 톡톡 두드렸다. 121

 

이집트를 총검으로 정복한 나폴레옹은 그 승리를 1년밖에 유지할 수 없었지만, 드농은 파라오의 나라를 제도용 연필로 정복해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의 그림은 이집트 역사에 새로운 영원의 시간을 부여했고, 우리의 의식을 눈뜨게 했다. 123

 

드농은 상형문자에는 문외한이었지만 문자의 체계를 알아내고자 면밀히 살핀 끝에 머지않아 세 가지 새김 형태를 구별해낼 수 있었다. 얕은 음각, 깊은 음각, 낮은 양각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새김 방식이 각기 다른 시대에 속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124

 

조각상의 표정은 드농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25

 

이집트 원정의 결과를 구체적을 제시하여 보존한 최초의 인물은 드농이었다. 126

 

고고학 역사상 유일무이한 이 책은 그때까지 몇 안 되는 여행가들에게만 알려진 수수께끼의 문명을 현대인의 눈앞에 단번에 펼쳐 보였다.(이집트 기록) 126

 

북유럽의 게르만족과 켈트족이 곰과 들소를 사냥하러 다닐 때 이집트는 이미 그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이집트에 최초로 왕조가 탄생했을 때, 그러니까 확인이 가능한 이집트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인 약 5000년 전에 그곳에는 이미 감탄할 만한 문명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왕조인 제26왕조가 몰락하여 사라지고도 500년이 더 흐른 후에야 서기가 시작되었다. 128

 

말똥구리를 신성하게 여긴 이집트 사람들은 스카라베를 배에 붙이고 다녔다. 128

 

1802년에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보의 《지리학》이 훌륭하게 번역되어 다섯권짜리 대형판으로 출간되자, 그전까지 학자들이나 읽을 수 있던 책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29

 

열여섯 명의 아이들이 강의 신을 둘러싸고 노는 바티칸의 대리석 군상은 16엘레가 상승한 나일강의 수위를 상징한다. 강은 포만감에 젖어 서서히 강바닥으로 다시 내려앉는다. 강이 삼킨 것은 사막만이 아니다. 메마름과 황량함도 삼켰다. 갈색 황토물이 흐른 곳에서는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땅에서 곡식이 자라고 수확인 두 배, 네 배가 된다. 그리고 흉년을 멱여 살릴 만큼 풍족한 풍년이 든다. 그곳에서 매년 새로운 이집트가 탄생한다. 2500년 전 헤로도토스가 말했듯이 나일의 선물고대의 곡창이 열린다. 강물이 너무 얕게 흐르거나 너무 큰 홍수가 나면 로마에서는 배를 곯았다. 130

 

거기에 바늘처럼 뽀족한 오벨리스크가 있다. 사원의 수문장이자 왕 신들을 찬양하기 위해 사막에 세운 길이 28미터의 손가락. 130

 

이집트 사람의 삶은 죽을 향한 여로였다.” 이러한 목표지향성은 부조 벽화에 잘 강조되어 나타났다. 현대의 어느 문화철학자는 이집트 미술의 원초적 상징은 로 그 의미는 유럽의 공간이나 그리스의 인체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131

두 사람이 소년시절의 꿈을 실현시킨 방법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슐리만은 전적으로 혼자 공부했지만 샹폴리옹은 정해진 교육의 길을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았다. 138

 

샹폴리옹은 자신의 눈앞에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사상과 정치와 모험이 교차하는 유럽의 중심을 눈앞에 그렸다. 140

 

다른 청년들이 총칼로 싸울 때 샹폴리옹은 죽은 언어와의 한 판 승부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146

 

상형문자가 해독되었다!” 147

 

이 일로 인해 샹폴리옹은 죽어 있는 그림에게 말을 시키는 일과 자신이 이미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49

 

네 밭을 개간하라!” 젠드아베스타(조로아스터교 경전)에서는 24번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보다 황무지 24제곱미터를 개간하는 일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합니다. 저 또한 전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151

 

내 콥트어 사전은 매일 두꺼워져 가는데 그 저자는 야위어간다” 153

 

초기의 상징체계에서 파도는 물을 나타냈고, 아래에 그은 가로선은 집, 깃발은 신을 의미했다. 호라폴론의 추종자들은 이 초기의 상징체계를 훗날 발견된 새김글에도 적용시켜 오류를 야기했다. 157

 

위대한 정신적 발견은 한 가지 문제에 대해 끝없이 사고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정신을 훈련한 끝에 얻는 결과다. 따라서 그 발견의 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 순간은 의식과 무의식, 뚜렷한 집중력과 흐릿한 몽상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번개처럼 스치는 착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160 

 

샹폴리옹이 상형문자의 그림이 자모라는 착상을 하게 된 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161

 

그 체계의 기본원리를 터득한 순간 이미 오래전에 마음을 굳히게 만들었던 착상으로 다시 돌아가 진정한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문자 해독은 왕의 이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62

 

왕의 이름이 있을 법한 자리를 보니 거기에는 타원으로 둘러친 부호군이 있었다. 그 타원의 고리를 사람들은 흔히 카르투시라고 불렀다. 162

 

샹폴리옹은 자신이 연구한 나라를 서른여덟 살이 될 때까지 오직 새김글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다. 165

 

자신의 연구 대상이던 땅에 발을 들인 샹폴리옹은 마치 공롱의 유골과 화석으로 실제 모습을 재현하던 동물학자가 백악기로 돌아가 살아 있는 공룡을 만난 듯했다. 166

 

벨초니는 이집트로 가기 얼마 전까지 런던의 서커스단에서 힘자랑을 하던 장사였다. 173

 

이집트에는 태양력이 있었다. 이집트의 존폐는 나일 강의 범람에 달려 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의 범람에 대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태양력을 이용했다. 183

 

예비지식이 충분한 마리에트의 눈은 가녀린 미나레트를 너머 서쪽 사막의 지평선을 가리는 거대한 기념물의 실루엣을 향했다. 184

 

지구상의 동물 가운데 가장 장엄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동물을 바로 멤피스의 신성한 황소 아피스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아피스를 창조신 프타의 종이라고 생각했다. 187

 

사람들은 죽은 동물을 신이나 왕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기렸다. 188

 

이집트의 땅속 깊이 묻혀 있는 유물을 꺼내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땅속에 묻히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경외심과 지식욕을 잘 조절하여 이집트의 흙 한 알 한알을 긁어내야한다는 말이었다. (고고학계의 위대한 측량가이자 해석가인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피트리) 194

 

피라미드는 올라갔다. 230만 개의 돌덩이를 인간의 힘으로 쌓아올렸다. 바닥을 차지하는 사각형의 각 변의 길이는 230미터, 거기서부터 위로 오른 삼각형의 꼭짓점까지는 146미터를 넘는다. 199

 

이집트인들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인간의 삶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저승에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죽을 때에도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집트인들은 이 점을 매우 중요시했다. 202

 

육신의 죽음 후 자유로이 떠도는 영혼이 한때 깃들었던 육체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이 영혼을 이집트에서는 라고 한다. ‘와 더불어 수호정령인 도 망자의 육신에 찾아든다. ‘는 인간이 타고나는 생명력의 화신을 일컫는데, 육신이 죽더라도 는 죽지 않고 계속 살아서 망자가 저승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을 보존한다. 202

 

단 한 사람의 망자에게 영원한 안전과 영원한 삶을 주기 위해 수천의 산 사람이 부역에 희생되었다. 10, 15, 20년 에 걸쳐 자신의 무덤을 짓게 만든 파라오는 민족의 힘을 파괴했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2, 3대에 걸쳐 부담해야 할 엄청난 빚을 졌다. 파라오는 죽어서까지 나라의 재정을 약화시켰다. 203

피라미드는 본질적으로 파라오만을 위해 지은 건축물이다. 오직 그의 죽은 육신과 그의 와 그의 를 위해. 203

 

거대 피라미드는 흔히 돌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진다. 207

 

그들에게는 역사적 시간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208

 

파이는 이집트 사람들이 피라마드를 지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208

 

투트모세 1세는 이집트의 왕들 가운데 최초로 자신의 무덤을 1.5킬로미터나 되는 자신의 장례신전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217

 

투탕카멘의 무덤은 경우 사후 10년 또는 15년 만에 약탈당했다. 220

 

람세스 3세는 세 번이나 무덤에서 끌려나와 다시 매장되었다. 226

 

왕가의 계곡은 전통적으로 왕의 집이자 도둑의 집이었다. 228

 

아브트 알 라술의 고향 마을인 쿠르나 전체가 전문 도굴꾼의 마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가업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이어졌으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 성업을 이루었다. 추측컨대 기원전 13세기부터 끊이지 않고 그 명맥을 이어왔으리라. 전 세계를 통틀어 이런 도둑 가문이 또 있었을까? 234

 

미라 16세기와 17세게 유럽에서 매우 활발하게 거래되었으며, 19세기까지도 약국에서 부러진 데나 다친 데 쓰는 치료제로 팔렸다. 240

 

심장을 들어내고 대신 돌로 만든 스카라베를 넣는다. 242

 

화려하게 꾸민 망자의 세계에 산 사람이 남긴 흔적. 이승과 저승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상다한 시간이 흘러갔다. 262

 

그것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작은 화환이었다. 청상과부가 된 왕비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작별의 인사였다. 이 초라한, 아직 한때의 고운 빛을 희미하게나마 간직한 몇 송이 마른 꽃잎 앞에서 호화롭고 화려한 황의 자태와 번쩍이는 황금은 그 빛을 잃고 말았다. 그 화환은 수천 년 세월의 무상함을 가장 절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277

 

오늘날 우리의 지식이 허용하는 확실한 사실은 투탕카멘 왕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사건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과 매장되었다는 사실뿐이다.” 280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미라 가운데 3300년 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유일한 미라였다. 281

 

. 탑 이야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비판이 시작되면서 모든 유물철학이 성서를 비판했고, 그 결과 성서의 구절은 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성서의 핵심에 얼마나 많은 사실이 담겨 있는지 밝혀주는 증거도 나타났으며, 후대의 기록자들이 많은 부분을 멋대로 과장했을 가능성도 인정하게 되었다. 293

 

알라와 그이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는 그들은 이 땅을 가리키는 성서 구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일에는 어떤 예감과 의구심, 서구인의 추진력이 필요했다. 삽을 들어 땅을 파는 사람 말이다. 294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제왕들》의 서문에서 마이스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중을 상대로 이름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을 풍부한 색채로 물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색채를 구하기 위해서는 전승된 자료가 필요하다.” 295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기록은 성서뿐이었다. 303

 

보타의 발견은 메소포타미아에 적어도 고대 작가들이 쓴 만큼은 오래된 문명이 실존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서를 더 믿기로 한다면, 그보다 더 오래된 옛날에 문명의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303

 

그는 1802년 괴팅겐의 시립학교 보조교사이던 시절에 설형문자의 첫 자모 10개를 읽을 거라고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시대를 통틀어 마땅히 천재적이라 할 만한 방법으로 내기에서 이겼다. 308

 

설형문자의 사본을 맨 처음 유럽에 보낸 사람은 이탈리아의 여행가 피에트로 델라 발레였다. 308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헬레니즘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이 사건을 두고 비범한 재능으로 역사를 희생시켜 역사를 만든 일이라고 평했다.(알렉산더 대왕이 술자리에서 이성을 잃고 다리우스/크세르크세스왕의 궁전을 불태운 일을 두고) 310

 

이 사람의 일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실한 삶이었다. 어떤 탈선이나 별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로테펜트가 스물일곱 살 때 어느 술자리에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내기를 하게 되었다. 설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312

 

그로테펜트는 지금까지의 연구로 얻은 결과들을 검토하면서, 새김글의 첫 부분을 차지하는 쐐기 부호군이 자신이 가진 모든 새김글 사본을 통틀어 오직 두 가지 형태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316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한 위대한유물에 그 역사적 의미를 조명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발견을 꼽자면 단연 그로테펜트의 설형문자 해독이며, 최초라는 수식어는 오직 그에게만 해당된다. 320

 

그는 세상에 처음 난 장사였다.

그리고 야훼도 알아주는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336

 

태수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다스릴 땅을 오로지 착취의 대상으로만 보고, 백성들은 젖소나 닭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으며, 그 닭이 황금 알을 낳기를 바랐다. 337

 

양각 부조는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모든 나라, 모든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관람객들은 대부분 잠시 흘끗 보고 지나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부조는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부조에 표현된 내용은 극도로 세밀한 부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몇십 점만 자세히 관찰하면 성서에서 전하는 극악무도한 사람들의 삶, 특히 그 통치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341

 

니네베의 이름은 메소포타미아의 위대한 여신 에서 나왔다. 362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로마였다. 막강한 도시, 대도시, 세계적인 도시였다. 어마어마한 궁전과 거대한 광장, 넓은 도로가 건설된 도시였고, 전대미문의 신기술이 승리를 자랑한 도시였다. 또한 극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한 도시였다. 363

 

예루살렘 앞에서 그의 군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히스기아 왕의 조언자인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그는 이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성을 향해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할 것이며, 방패로 막으며 돌진하지도 못할 것이며, 흉벽을 쌓아 성을 포위하지도 못하리라. …… 이때 하나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 나타나 185000명의 병사를 쳤다 그들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오직 주검들뿐이었다.”(센나케리브 왕) 365

 

이 점토판들 가운데 고대 메소포타미아 세계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문학작품이 있었다. 세계사 최초의 장면 서사시인 그 작품은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길가메시는 3분의2가 신이고 3분의1이 사람인 존재였다. 370

 

그 서사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과거에 환한 빛을 던지는 대단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370

 

스미스가 해독을 시작하자마자 그의 온 마음을 빼앗은 것은 그 이야기, 내용이었다.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이었다. 일어난 사건이었고, 형식이 아니었다.(조지 스미스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발견한 일) 373

 

우트나피슈팀은 노아였던 것이다! 375

 

화려했던 신전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초라한 잔해들 옆으로 바짝 옆으로 바짝 붙어 철길이 지나갑니다. 신전의 기둥 몇 개는 몇 군데 현대식 외양간이 들어서 있습니다. 잘못 된 말이 아닙니다. 외양간 맞아요.(로베르트 콜데바이가 히메라의 신전 유적지를 둘러보고) 384

 

그토록 화려한 색체는 중탄산나트륨의 스펙트럼에서나 본 것 같다. 385

 

콜데바이가 발굴한 이 성벽은 세계 역사상 단연 최대의 도시 방어 시설이었다. 이 성벽은 바빌론이 중동 전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니네베보다도 더 큰 도시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94

 

다니엘서에 왕중의 왕” ”황금의 머리라고 묘사된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역사에 길이 남을 바빌론 재건사업을 시작했다. 395

 

,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397

 

피라미드는 통치자가 자신의 일생에 걸쳐 지었다. 그들 가운데는 짧은 생을 마감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자신을 위해, 자신의 미라와 자신의 를 위해 피라미드를 지었다. 그러나 계단식 탑은 여러 통치자가 세대를 이어 쌓아 올렸다. 399

 

이곳의 통치자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지구라트를 지었다. 지구라트는 민족의 성전이었다. 399

 

그 도로는 교통로가 아니라 위대한 주신 마르두크를 위한 행렬 도로였다. 402

 

또다시 성서에 담긴 사실의 핵심이 전설의 껍질을 벗어 던졌다. 이곳 바벨에서 사자의 골짜기에서 들어간 다니엘은 야훼의 기적을 경험했고, 신 앞에는 용도 무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 신은 더 위대한 신, 천 년이 지나면 세상의 신이 될 신이었다. 405

 

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할수록 비빌로니아의 문화는 그곳의 셈족보다 더 오래된 민족, 심지어 이집트인들보다 더 오래된 민족에게서 유래됐으리라는 가설을 부정하기 어려워졌다. 408

 

수메르 문명은 바빌로니아 이전으로 멀리, 훨씬 더 멀리 이어졌다. 그 민족의 시원은 실제로 인류의 발생과 거의 일치하는 듯했다. 성서에 나와 있듯이 신이 내린 대홍수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 시대의 인간들과 일치하는 듯 보였다. 413

 

한때 수메르 땅을 어마어마한 홍수가 덮쳤던 것이 틀림없다. 두께 2.5미터의 진흙층을 만들어낼 정도라면 바다가 밀려 오고 하늘의 모든 수문이 열렸을 것이다. 418

 

수메르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이 우리에게 남긴 문화유산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나쁜 유산은 미신이다. 그들은 미신을 통해 매우 사소한 일과 행동을 신비성의 좁은 틀에 가두었다. 421

 

인간의 노력을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평가한다면, 수메르인들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은 저 위에 올라 마땅하다. 423

 

이 모든 민족들에 앞서 수메르인이 있었다. 423

 

 

. 층계 이야기

1519118,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의 수도에 첫발을 디딘 역사적인 날이었다. 427

 

두 사람은 눈빛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말로만 번드르르한 인상를 주고 받으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두 세계가, 두 시대가 마주 보고 선 순간이었다. 429

 

몬테수마를 앞에 둔 코르테스의 이 만남은 브룩시 베이가 다이르 알-바흐리 골짜기에서 갑자기 람세스 대왕과 마주치거나, 콜데바이가 바빌론에서 산책하는 네부카드네자르 왕을 만나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 일과 같았다. 429

 

이 문화의 소멸은 폭력에 의한 파멸의 유일한 예다. 그 문화는 시들지 않았다. 억압당하거나 저지당하지도 않았다. 절정의 화려함을 뽐내던 시기에 목이 잘린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꺾어버린 해바라기꽃처럼!” 430

 

이성과 종교, 정치와 모험이 제시하는 과업은 서로 비슷했다. 천문학과 지리학의 발달과 그로 인한 항해술의 발달은 해가 지지 않는유럽 제국의 확장 정책에 수단을 제공했다. 광적인 신앙 또는 신성한 깃발을 앞세우고 달리는 모험가를 낳기에 충분했다. 꿈꾸기에 지친 이달고(스페인의 하급 귀족)들은 서슴없이 이 꿈을 좇아 내달렸다. 431

 

전체적으로 보아 다신교였지만, 우이칠로포크틀리와 케트살코아틀 두 주신을 중심으로 일신교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역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특징이 매우 뚜렸했다. 역학은 아스텍 문명의 바탕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세계에서 이와 같은 종교는 세계종교나 구원종교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444

 

아스텍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개입되는 한 굴욕을 참지 않는 민족이었다. 스페인 군대는 무서운 무기를 앞세워 온갖 잔혹한 행위를 일삼고도 아스텍의 신전과 신들을 모독하지 않는 한 무사할 수 있었다. 445

 

고대 세계에서 발생한 위대한 문명의 흐름이 닿지 않는, 유럽에서 뚝 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적으로 독자적인 문명을 발달시키는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475

 

멕시코 초대 대주교 돈 후안 데 수마라가는 대규모 화형식을 통해 문서를 닥치는 대로 없앴고, 후임 주교들과 신부들 역시 그를 따라했으며, 병사들도 이들 못지않은 열정으로 기록 말살에 동참했다. 482

 

마야의 모든 석조 건축물은 돌로 만든 달력이었다! 어떤 배치도 우연이 아니었다. 미학은 수학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있었다. 그전까지는 무시무시한 석상의 얼굴이 반복되거나 갑자기 단절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이상스럽게만 생각했다면, 이제 그 현상이 특정한 수나 달력의 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87

 

이제 학자들에게는 건축물들을 시간적인 관점에서 분류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연대별로 묶고 하나의 모둠이 다른 모둠에 끼친 영향에서 기법의 변화를 밝혀내는 일이었다. 간단히 말해, 역사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489

 

마야에는 시민에 속하는 중간계층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귀족계급은 매우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알메헤놉이라고 일컬었다. ‘조상이 있는 사람들’, 즉 족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계층에서 시제도 나왔고 세습영주도 나왔다. 세습영주는 흘라치 우이닉’, 진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들 조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온 백성이 일했다. 농부는 수익의 3분의1을 귀족에거, 다른 3분의1은 성직자에게 바치고 나머지 3분의1만을 자신이 가졌다. 495

 

마야 학자들의 예리한 사고력은 점점 더 하늘의 별만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탱해줄 힘의 원천인 농경지는 잊어버렸다. 무서운 재앙을 막을 도구를 고안하는 일도 잊었다. 그토록 훌륭한 학문적, 예술적 업적을 이룩한 민족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간단한 연장 하나가 없었다. 마야에는 쟁기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에 대한 설명은 오로지 마야 지식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정신적 자만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495

 

치첸이트사에서 발굴된 황금 유물의 고고학적 가치는 금세기에 발굴된 유물 가운데서는 투탕카멘의 황금 다음으로 크다. 514

 

고고학의 역사에서는 엄청난 역경 속에 겨우 완성된 역사의 그림이 새로이 발견된 사실로 인해 한 순간에 일그러질 위기에 처하는 사건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519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거의 모든 나라가 기존의 문명들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을때에야 비로소 멕시코의 학자들이 자국의 고대문명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521

 

건축물에 새겨진 달력으로 52년마다 외피 한 겹을 지었으며, 이 건축물 하나만을 짓는 데도 400년 이상 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522

 

세 민족의 문화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세 민족 모두 신, 태양, 달을 향해 층계를 쌓은 피라미드를 지었고, 이 모든 피라미드는 밝혀진 바와 같이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역법의 철칙에 따라 축조되었다. 525

 

달력의 순환은 세 민족의 머리 위에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칼처럼 매달려 있었다. 이들은 52년만에 한 번씩 세상이 멸망한다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사제들의 권력을 낳았다. 위협하는 재앙을 막을 사람은 사제들뿐이었다. 526

 

마야 문명과 아스텍 문명 이전에 발생한 문명의 창조자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톨텍인이라고 부른다. 526

 

번영의 절정에서 스페인에 의해 목이 잘린 수도 멕시코는 페르시아에 의해 목이 잘린 아시리아의 호화찬란했던 수도 니네베와 같다. 528

 

 

. 아직은 할 수 없는 이야기

미지의 말이 미지의 글로 새겨진 경우 같은 내용을 잘 아는 다른 언어로 쓴 글이 없으면, 즉 번역본에 해당되는 글이 없으면 해독이 불가능하다는 문헌학의 기본명제는 그 사이 부정되었다. 536

 

보써트는 1947년에 현재 터키의 카라테페 산에서 두 언어로 쓴 새김글 부조를 발견하고, 학계에서 3세대에 걸친 연구로도 풀지 못했던 히타이트어 상형문자를 해독해냈다. 536

 

고고학 전문가와 아마추어들이 유물이라고는 나올 것 같지않은 대도시 중심부나 얼음으로 덮힌 산꼭대기에서 발굴에 성공해 대중을 놀라게 하는 일이 거듭 일어났다. 540

 

멕시코의 알베르토 루스는 이집트의 모든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이지만 고대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신전의 받침돌일 뿐이라는 확실해 보이는 명제에 도전했다. 543

 

현대인들을 질식시킬 듯한 일상의 문제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탈진 상태에 이른 현대인들은 과거로 눈을 돌렸고, 지난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551

 

발굴은 전 세계에서 계속될 것이다. 미래의 100년을 차분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5000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552

 

 

▶ 내가 저자라면

 책의 장점

이 책의 컨셉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아마추어가 쓴 고고학 이야기. 여기서 아마추어란 고고학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학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책을 기획할 때부터 학자와 아마추어는 타깃이 다르다. 학자는 자신이 이룩한 학문적 성취와 가치를 학계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책을 쓴다. 그래서 사람은 배경으로 밀리고 이론과 사실이 주인공이 되기 일쑤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책을 쓴다고 해도 한번 고정된 관점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고고학 책이 흥미진진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따분하게 읽히는 이유다. 아마추어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학계의 관행이나 서술방식을 굳이 따를 필요가 없다. 일정 수준의 전문성을 갖추고 고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발화점을 정확히 짚어낸다면 아마추어가 고고학자에 비해 대중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오히려 유리하다.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은 모험과 낭만의 결정판인 고고학이 소통이 없는 글쓰기로 인해 홀대받는 현실을 참다 못한 체람의 자기구원이다. 그는 고고학이 과거를 발굴하는 학문일지언정 일상을 압도하는 어드벤처임을 알고 있었다. 체람은 그 느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이야기에 적용했다. 첫 번째로 그가 찾은 키워드는 사람이다. 피라미드가 상형문자가 아무리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라 해도 그걸 느끼는 것은 사람이다. 유물의 스토리는 사람이란 매개체를 통해 긴장과 희로애락으로 變調되어야 독자에게 동조를 일으킬 수 있다(초보독자에게는 실감나는 중계방송이 중요하다). 서술의 중심이 인물의 내면이 되자 인디아나 존스를 보는 것 같은 감정이입이 느껴진다.

 

두 번째는 묘사방식이다. 그가 가장 먼저 읽기를 권한 <피라미드 이야기>를 보자.

 

이집트에서 수행할 학문적 과제를 설명하는 동안 한 손에 카르스텐 니부어가 쓴 두 권짜리 《아라비아 여행》을 든 채 가끔씩 자신의 말을 강조하느라 구부린 둘째손가락 마디로 가죽표지의 뒷면을 톡톡 두드렸다. 121

 

이집트의 땅속 깊이 묻혀 있는 유물을 꺼내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땅속에 묻히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경외심과 지식욕을 잘 조절하여 이집트의 흙 한 알 한알을 긁어내야한다는 말이었다. 194

 

그의 묘사는 훔쳐보기의 매력이 있다. 쥐스킨트의 향수를 떠오르게 하는 감각적 묘사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고 독자에게 추격자가 된 듯한 설렘을 안겨준다.

 

세 번째는 역사적 사실과 작가적 상상력의 균형이다. 저널리스트이자 문필가로서 축적한 글쓰기감각과 유물 발굴에 실제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소설과 같은 극적 긴장감과 흥미를 유지하도록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일반독자의 관점에서 고고학 들여다보기라는 컨셉도 한 몫 했지만 고고학에 대한 깊은 식견과 그 특유의 글쓰기역량이 없었다면 이 책의 성공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용 구성 및 편집

이 책은 머리말, 5개의 장, 부록(연대표 및 참고문헌), 자필 이력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말에서 책의 집필 의도를 충분히 숙지하고 저자가 권한 대로 두 번째 장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금새 책에 몰입할 수 있었다. 풍부한 자료사진과 부록 또한 방대한 내용을 이해하는데 길잡이 역할을 해 주었다. 각 장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 읽고 나니 그 시대의 문명을 대표하는 유물임을 알 수 있었다. 독자의 호기심을 끝까지 잡아 놓기 위한 장치로 보여 나쁘지 않았다. 차례구성이나 편집 등은 지금까지 접한 커리큘럼(2차 레이스 포함)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았다. 자필 이력서까지 첨부한 체람의 커뮤니케이션 감각이 교감의 수준을 한층 올려놨고, 출판사가 번역 및 편집에 상당히 공을 들인 덕분이다. 김해생의 번역은 명료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은 나 처럼 책쓰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보석 같은 시사점들을 던져주는 교과서이다. 주제 잡기, 서술방식, 내용 구성, 편집 등. 무엇보다 독자가 무엇을 목말라하며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그 성과를 훌륭히 제시해준 역작이다. 

IP *.64.5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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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4.19 07:41:03 *.227.177.59
날카로우세요. 체구는 우람하신데, 작은 틈을 놓치지 않으시네요. 

예전 글쓰는 업을 하셔서인지, 참고자료를 충분히 활용하시는것 같습니다. 표정훈'이라는 출판 컬럼니스트가 있는데, 그는 인터넷을 검색하며 글을 쓰기로 유명하지요. 저는 제가 충분히 숙지하지 않은 정보는 사용하지 못해요. 상현 형은 상황을 단칼에 쳐서, 그 단면을 여러 양념을 곁들여 요리하는 실력이 있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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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04.19 09:18:12 *.219.109.113
고고학이란 생선 한 마리를 눕혀놓고  칼을 갈아 사시미를 떴구나!

일본에 칼 솜씨 하나로 회를 다 뜨고 뼈만 남았는데 생선이 몇 분간

수영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너의 칼 솜씨는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회를 뜨는 그 주방장 처럼

부드러우면서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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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4.19 09:44:25 *.236.3.241
솜씨 좋은 주방장을 얘기하시니 과찬에 감사하고 송구스럽습니다^^

부족한 점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사시미를  떠 주시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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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04.19 10:39:11 *.236.70.202
과거를 통한 미래학

상당히 흥미롭기는 한데..그래서 뭘?
마지막 순간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불만이었죠.
그런데 정말 딱 마지막 순간에 제 커져만 가던 불만을 한방에 날려버리더라구요.

'미래의 100년을 차분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5000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빠 말대로 체람의 커뮤니케이션 감각, 정말 탁월함 그 자체였습니다.
더불어 길고 긴 책속에 담긴 그의  의도를 단 8자에 담아내는 오빠역시
그 감각면으로 보잠 결코 뒤지지 않는 공력이신듯 합니다. 

앞으로도 더욱더 예리한 칼날 만들어가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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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9 12:00:59 *.106.7.10
'내가 저자라면'이 제일 어려운데, 오빠 글을 읽으니 정리가 쏙 되네요.
많이 배웠어요. 일관성있는 글과 관점, 그리고 식상하지 않은 표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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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4.19 18:41:26 *.30.254.28
명쾌함.

상현의 리뷰를 읽으면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정확히 들어온다.

체람의 자기구원이라..!
이제 스스로를 구원할 일만 남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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