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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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수 0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얻은 게 참 많다.
어쩌면 ‘엄마’라는 자리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부족한 엄마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아이들을 미워하고 귀찮아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이가 0살 이라고 생각하라”는 어떤 육아 지침서의 가르침은 내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갓난아이라는 가정은 엄마인 나 자신에게도 적용이 가능했고 내 구멍 난 기억에도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돌보며 내 거울인 아이들과 함께 요즘도 가끔 “0살”이 되곤 한다.
요 며칠 TV 뉴스에 아이들을 때려죽인 사람들 보도가 있었다.
지금 우리 곁에 미친 사람들이 그렇게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한때는 미쳤었다.
아마도 미치고 싶었던 게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못 자고 못 먹은 채로 어린아이를 보듬어야 했던 그때는 정신을 차릴 여유가 없었다.
가난한 대학 졸업반이었던 남편과 졸업식도 하기 전에 결혼식을 한 우리 부부는 화장실도 없는 지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었다.
혼수를 많이 할 필요가 없어 돈 안들이고 시집보냈다며 환하게 웃으시는 아빠를 보며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내 부모형제를 벗어난 합법적인 독립에 만족했었다.
곧 큰아이를 낳았고 일주일 넘게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가 하루 다녀가셨었다.
입원한 날 잠깐 다녀가시고는 며칠 뒤 얼굴이나 보러 들르셨는데 상황이 그렇지 못해서 밤을 새고 아침에야 가셨다.
그런데 며칠 뒤 퇴원하고 친정에서 만난 엄마는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동생들 말로는 병원에 다녀온 일로 아빠와 다투다가 맞았다고 했다.
내 아랫배의 칼자국만큼이나 선명한 상처를 가슴에 새기고 2주를 가시방석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는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원망하면서 갓난아이와 함께 지하실 방에 꽁꽁 처박혀 엄마에게 미안해하며 잠든 아이 곁에서 눈물을 삼키며 살았더랬다.
정신을 차릴 때쯤 둘째를 만났고 여유 없는 일상을 이어가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을 보냈다.
한참 뒤에야 나눈 얘기 중에, 남편은 그 당시 집이 불편하고 어색했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처자식을 부양한다는 것이 사랑도 잊게 하고 술과 친하게 했었나보다.
술에 취해 기어들어와 자다가 옷만 갈아입고 나가버리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삶에 대한 미련을 앗아가기엔 충분하고도 남았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죽고 싶었고 불쌍한 아이들만 남겨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러기엔 아이들이 너무 예뻤다.
이 예쁜 아이들도 모르는 남편이 불쌍했고 내 부모가 불쌍했다.
아마도 그렇게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나 보다.
감사한 일이었다.
고마운 아이들.
나를 ‘엄마’라 불러주는,
나를 다시 살게 한,
두 아이들.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얻은 게 참 많다.
이제는 그걸 안다.
아이들을 때려죽인 그 사람들..
천사 같은 아이들을 때려서 죽인 그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불쌍한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명복을 빈다..
IP *.239.124.122
어쩌면 ‘엄마’라는 자리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부족한 엄마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아이들을 미워하고 귀찮아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이가 0살 이라고 생각하라”는 어떤 육아 지침서의 가르침은 내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갓난아이라는 가정은 엄마인 나 자신에게도 적용이 가능했고 내 구멍 난 기억에도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돌보며 내 거울인 아이들과 함께 요즘도 가끔 “0살”이 되곤 한다.
요 며칠 TV 뉴스에 아이들을 때려죽인 사람들 보도가 있었다.
지금 우리 곁에 미친 사람들이 그렇게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한때는 미쳤었다.
아마도 미치고 싶었던 게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못 자고 못 먹은 채로 어린아이를 보듬어야 했던 그때는 정신을 차릴 여유가 없었다.
가난한 대학 졸업반이었던 남편과 졸업식도 하기 전에 결혼식을 한 우리 부부는 화장실도 없는 지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었다.
혼수를 많이 할 필요가 없어 돈 안들이고 시집보냈다며 환하게 웃으시는 아빠를 보며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내 부모형제를 벗어난 합법적인 독립에 만족했었다.
곧 큰아이를 낳았고 일주일 넘게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가 하루 다녀가셨었다.
입원한 날 잠깐 다녀가시고는 며칠 뒤 얼굴이나 보러 들르셨는데 상황이 그렇지 못해서 밤을 새고 아침에야 가셨다.
그런데 며칠 뒤 퇴원하고 친정에서 만난 엄마는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동생들 말로는 병원에 다녀온 일로 아빠와 다투다가 맞았다고 했다.
내 아랫배의 칼자국만큼이나 선명한 상처를 가슴에 새기고 2주를 가시방석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는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원망하면서 갓난아이와 함께 지하실 방에 꽁꽁 처박혀 엄마에게 미안해하며 잠든 아이 곁에서 눈물을 삼키며 살았더랬다.
정신을 차릴 때쯤 둘째를 만났고 여유 없는 일상을 이어가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을 보냈다.
한참 뒤에야 나눈 얘기 중에, 남편은 그 당시 집이 불편하고 어색했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처자식을 부양한다는 것이 사랑도 잊게 하고 술과 친하게 했었나보다.
술에 취해 기어들어와 자다가 옷만 갈아입고 나가버리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삶에 대한 미련을 앗아가기엔 충분하고도 남았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죽고 싶었고 불쌍한 아이들만 남겨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러기엔 아이들이 너무 예뻤다.
이 예쁜 아이들도 모르는 남편이 불쌍했고 내 부모가 불쌍했다.
아마도 그렇게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나 보다.
감사한 일이었다.
고마운 아이들.
나를 ‘엄마’라 불러주는,
나를 다시 살게 한,
두 아이들.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얻은 게 참 많다.
이제는 그걸 안다.
아이들을 때려죽인 그 사람들..
천사 같은 아이들을 때려서 죽인 그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불쌍한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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