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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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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9일 10시 18분 등록
엄마는 일이 없다. 어쩌다 동네 친구들과 100원짜리 고스톱을 치는 것이 유일한 낙일뿐, 도무지 할 일이 없다. 자손들 집을 빙 둘러보시지만, 며칠 지나면 심심한 것은 마찬가지. 자연히 TV시청이 길어져, 화제의 대부분을 TV가 차지한다. 어느 지역에 비가 몇 미리 내린다는 식으로 숫자까지 붙여 뉴스를 전달하신다. 일흔 셋, 엄마의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엄마, 뜨개질 같은 건 싫어요? 응, 애들 때부터 흥미가 없었어.

엄마의 행동반경은 형편없이 축소되었다. 그러니 유용한 화제가 있을 리가 없다. 모기를 한 마리 잡았는데, 이 놈이 얼마나 사람을 뜯어먹었나 피가 빨갛더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얘기하실 때면 나는 우울해진다. 화제는 계속해서 축소되는데, 반복하는 습관은 더해지니 점점 대답을 듣지 못한다. 같이 나이들어가는 내게 잔소리를 하실 때, 혼잣말을 하시는 것이 안쓰러워 대답한다는 것이 퉁명스럽게 나올 때도 있다. 그래놓고는 한참동안 마음이 언잖다.

엄마는 딸 셋 중에 내가 제일 편하다고 하신다. 큰 딸은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인데, 어찌나 깔끔하고 바지런한지 노인네가 불편할 정도인가 보다. 반면에 나는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을뿐 집안일에는 도통 관심도 없다. 요리에 시간을 들이는 것을 싫어해서 초간편 식단을 선호한다. 오죽하면 엄마는 큰 딸과 둘째 딸 사이에서 헷갈린다고 하신다. 셋째딸은 막내답게 받는 것은 당연시하고 베풀줄은 모른다. TV를 보다가 무언가 말씀이 하고싶어서, 내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다가오는 엄마. 조금 상대를 해드리면 끝도없이 펼쳐지는 엄마의 수다. 어디쯤에서 끊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나.

이제 엄마는 달라졌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가 아니다. 아들을 낳을 때 절개수술을 하느라 난생처음 수술실로 밀려가는 내게 소리치던 엄마. “나는 배수술 두 번이나 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겁내지마” 언제나 능숙한 해결사요, 천군만마처럼 든든하던 엄마가 갈치조림 하나에도 자신없어 하는 걸 보면, 세월이 무서워 진저리쳐진다. 산책 중에 내 손을 꼭 잡으시며 어린애처럼 의지해오는 엄마. 이제 우리의 역할이 바뀌었구나.

아버지는 오남매 중에서 나를 제일 이뻐하셨다. 표현할 줄 모르는 옛날 아버지였지만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내가 존귀함을 알았고, 무슨 일을 할 때나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버지는 10년전 가벼운 수술 끝에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요즘은 아버지가 나에게 엄마를 맡기고 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급속도로 자신감을 잃고 노화하기 시작한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의 일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엄마도 지금보다 훨씬 의연하지 않았을까.



노부부


별실에서
어머니 아침밥 드시고
눈 붙이시는 것 보고
화장실 가는 길
몇 걸음 앞서 느릿느릿
노부부가 간다
할아버지는 한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할머니는 링거병을 들고
함께 화장실을 간다
내가 앞질러 화장실에 들어앉아 있는데
바로 옆에 그 할아버지 들어오고
할머니는 링거병을 들고 문 밖에 서서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눠
잘 나와?
묽어? 되?
다 쌌어?
시원해?
물내리지 말고 그냥 나와 말하는데
할아버지는 음 음 할 뿐 거의 대답이 없다
내가 화장실을 나와 병실로 돌아오는데
그 노부부 복도 저만치
그림처럼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 윤재철 --


자신을 위해 돈쓸줄도 모르고, 자기를 위할줄 모르는 엄마, 엄마에게는 도통 ‘개인’의 영역이 없다. 자식들만을 해바라기 하다보니, 해드리는 것도 없이 답답하다. 엄마는 엄마대로 서운한 것이 많겠지. 아직 엄마가 건강하실 때 본격적으로 엄마의 시간에 신경써 드려야겠다고 마음이 바빠진다. 무엇이 되었든 소일거리를 하나 마련해드려야 할텐데 관심을 가져주실지. 스킬자수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함께 여행을 가야겠다. 그러면 엄마의 화제가 조금 풍부해지겠지. 엄마의 총기가 흐려지는 일은 상상도 하기싫다. 엄마가 먼저 가실 뿐 우리 모두 걸어가야 할 무서운 세월.


안부 1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 황지우 --
IP *.209.98.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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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보이
2007.08.09 11:24:54 *.143.152.23
그 "무서운 세월" 비껴가는 방법, 같이 연구 좀 해 볼까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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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8.09 14:47:12 *.209.98.251
좋지요. 나는 세월을 비껴가는 방법으로
'창조'와 '커뮤니티'의 두 가지를 선택했구요,

그 어디쯤에서 내 1인기업의 아이템을 찾으려고 하지요.
시니어세대의 평생학습이나, 치유로서의 글쓰기 언저리가
되지않을까~~ 싶어요.

일벌리고 책임지기 꾀나서 그렇지, 앞으로는
주거공간 - 공동주택의 다양화에도 굉장한 기회가 숨어있다고
생각해요.

바야흐로 변태의 창의력과 추진력이 필요한 시점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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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8.10 01:15:41 *.72.153.12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나고 엄마 생각 나네요.
엄마가 할머니처럼 조용하고 지리한 삶을 사는 것이 싫은 데, 엄마는 자꾸 그 길로 가요.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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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주
2007.08.10 06:51:48 *.233.198.5
얼마 전 고향에 계신 노부모님을 뵙고 왔어요.
한 없이 가슴 아리고 죄스럽고....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몇 번이나 될까...
다시 고쳐 못할 일이 이 말고 어디 또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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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곤
2007.08.10 15:52:05 *.116.198.114
짠하네요.~
가벼움에 대해선 말하지 말자라는 구절이 한참을 맴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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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7.08.10 17:22:35 *.57.36.18
누구나 겪는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내가 즐거운 세월 속에 있을 것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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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2007.08.10 18:46:07 *.218.253.65
명석언니의 글을 읽다 보면..
가끔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맛깔스럽고 진솔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긴 하지만..
엄마에 대한 제 느낌이 꼭 이렇거든요.
엄마한테 좀더 잘해드려야겠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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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08.13 23:36:09 *.131.127.120
병곤이는 짠하다지만 전 찡하네요...
말년에 솜털처럼 가벼워지신 어미니를 안아 올리던 때에 느끼던
가슴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는 군요...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는 거 다 들어드리고 있었는데
후 일엔 그냥 퀭한 눈만 내게 보내셔서 더 슬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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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8.14 00:38:19 *.209.100.184
성렬님은 착하셔서 굉장히 잘해드렸을 것같아요.
어머님께서 돌아가셨군요.

어느 책에서 보니까,
"부모님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
그리고 그 언젠가는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동시에 수원에서 막내아들이 부모살해한 사건을 보면서
진저리를 칩니다.
무서운 사람, 무서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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