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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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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3일 10시 04분 등록
사느라고 살았는데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허허로울 때면, 새벽 3시 목욕탕에 가시게. 딱히 꼬집어 불만이 없는데도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확신이 안 설 때면, 그역시 새벽 목욕탕이 제격일세.

얼마전 혼자 찜질방에서 밤을 지낼 기회가 있었지. 여성전용이라 불편하지 않았는데도 왠지 잠자고 싶지 않았어. 그냥 목욕탕에서 밤을 새기로 했지.

간헐적으로 드나들던 사람들이 딱 끊기고 순간 목욕탕에 정적이 돌았어. 갑작스러운 정적에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지. 둥글거나 네모난 탕과, 녹색이거나 갈색의 물에 내리쪼이는 반조명이 무슨 세트장같았어. 샤워기나 의자같은 소품나부랭이들조차 엄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 마치 먼 뒷날 내가 도달해야 할 재판정에 미리 와 있는 기분이었어.

뜻하지않게 나의 실존에 부닥뜨린거지. 시계를 보니 정각 세시더군. 거울을 보았어. 허걱! 거기에 나는 어디로 가고 친정어머니가 계시더군. 내가 생각하는 나는 아직 젊고 대책없이 낭만적인 모습인데, 거울이 진실을 알려주는거야. 완연히 쇠퇴하기 시작한 모습을 확인하는 일은 절망스러웠지. 이제 소멸은 실제상황이야. 세상에 태어날 때의 모습그대로 너는 무엇이냐, 과연 네가 가진 것은 무엇이냐. 너무도 초라한 대답에 울다가 웃다가 꼭 미친 것같았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보니 정화의 순간이 오대.

왜 목을 놓아 울고나면 카타르시스가 되잖아. 그런거였겠지. 조금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거울을 보았어. 젊은 날의 나는 통 거울을 보지 않았지. 너는 그렇게 걷는게 멋인줄 아니. 천생 여자인 언니가 혀를 찰 정도로 나는 머스매같은 아이였지. 당연히 거울을 볼 일도 없었어.
요즘 나는 거울을 자주 봐. 그것은 내가 나를 보는 일이고, 남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이기도 하지. 사람이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되었다는 뜻이기도 해.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사라지니 차분한 설계가 가능하대. 지금의 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나는지금의 모습이 아니고는 어떤 모습으로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어. 그러니 더욱 나답게 걸어갈수밖에, 도대체 그밖에 무슨 방법이 있겠어?

마치 커다란 의식이라도 치룬 사람처럼, 새로운 전의가 다져졌어. 샤워기를 틀어 멀리서 얼굴에 대고 뿌려댔지. 시원하게 포말이 부서졌어. 아주 시원해서 싱긋 웃음이 나왔어. 웃고나니 마음이 아주 좋더군.

비가 한 소끔 지나간듯 새벽 플라타너스 거리는 젖어있었어. 그 역시 시원하고 상쾌했어. 혼자놀기의 목록에 하나가 추가되는 순간이었지. 새벽3시의 목욕탕을 발견하는 일.
IP *.108.8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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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2007.08.24 07:52:54 *.150.49.57
선생님 글 읽고 댓글 써야지 하다가 시간을 놓치고... 번번이 그럽니다^^
밤12시에는 목욕탕 가 봤는데 새벽 3시는 아직 못 가봤습니다ㅎㅎ
목욕탕가기를 저는 무지 좋아하거든요^^
일종의 저만의 스트레스해소법이기도 하고.
우리교실 바로 앞에 24시 큰 목욕탕이 있기도 하구요( 사실 목욕탕 새벽에 갔다오다가 교실을 발견하기도 했고)
새벽 3시 목욕탕에서 목놓아 울고
샤워하기^^

시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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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8.24 08:36:38 *.209.98.128
나경씨 고마워요. 무플의 서러움에서 구제시켜줘서. ㅠㅠ
목욕탕에서 글감 잡은 게 하나 더 있는데, 이 공간에 안 어울리나보네요. 자제해야겠네요. ^^

더위에 밥 하느라고 수고많지요?
이번 주면 더위도 한 풀 꺾일테니, 조금 더 버텨요.
가을에는 가을의 바람이 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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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8.24 08:40:03 *.152.82.31
쇠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삶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월요일에 뵐 수 있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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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8.24 10:06:28 *.209.98.128
당근 가서 축하해야지요. 책이 아주 예쁘고 고급스럽게 나왔어요.
그러고보니 자로님 본 지 너무 오래 됐네요.

'내식대로 나이들기' 그거~~ 내 주요과제인데
흔들리며 가는거지요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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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08.24 13:46:02 *.46.151.24
그냥 그대로도 차분해서 좋은신데...

그렇지요... 가끔씩은 ... 돌발이 필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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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8.24 15:59:54 *.128.229.230
육체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네. 내 오른 쪽 무릎의 상처는 부산 살때 연탄재 집어던지기 놀이를 하며 살았던 가난한 어린 소년 시절을 떠 올리게 하고 내 오른 손 위의 이제는 희미해진 상처는 그 상처가 생지자 마자 그녀가 나를 아주 사내다운 남자로 여겨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기도 하다네. 몸은 훌륭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많은 미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글을 쓰다 갑빠 운동을 하러 간다. 배에도 빨리 '왕'자를 새겨야 할 텐데. 쇠퇴해 가기 때문에 참으로 안타깝게 아름다운 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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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8.24 16:38:19 *.209.98.128
성렬님, 저 절대로 차분하지 못하네요 ^^
나잇값 할 생각도 능력도 없이, 대책없이 출렁거리는 속내라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장님, 너희들 다 어디 있다 왔느냐고, 또 한 번 행복에 겨웠을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몽골 사진 여기저기에서 훨씬 날렵해지신 것을 확인합니다.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선연한 아름다움 한 번 뿜어봐야 할텐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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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곤
2007.08.25 21:51:53 *.227.204.81
늦은 밤을 훌쩍 지나 아직 미명이 오지 않은 오묘한 시간 3시. 그 야리꾸리한 시간에 한바탕 푸닥거리(?)인가? 1인 관객을 위한 멋진 쇼를 하셨네요. 그리고 그렇게 힘찬 새벽이 왔고...아~ 찡합니다. 졸음이 확 달아납니다.

저는 새벽 3시에 제일 많이 한 행동이 아마도 포장마차에서 국수 한 그릇 말아먹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끔은 찜질방에서 아무 생각없이 널부려져 있고 싶은데 그게 맘처럼 잘 안되네요. 갑자기 변경연 식구들과 단체로 찜질방이 가고 싶어지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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