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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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어제 이사짐 견적을 보고 갔다.
책이 140박스로 계산되어 5톤 2대와 1톤 1대가 와야 한단다.
우리는 거의 5년 단위로 사는 동네를 바꾼다.
가족회의를 거쳐서 살고 싶은 동네를 정하고 가장 설득을 잘하는 사람의 뜻을 따라 집을 고른다. 언제나 좀 익숙하고 편안해지면 또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흙 벽돌로 지어 만드신, 도심 한복판이면서도 경관이 좋았던 곳에서 오래오래 살았다. 그 집에서 동생 두 명이 태어났고 시집 장가를 다 갔으니 우리가족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대학을 다닐 때는 명동 성당 아래에 있던 카톨릭 여학생관에서 4년을 살았으니 잠바차림으로 옆집 나들이를 하신 김 추기경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차담을 하는 기회도 많았었다.
강원도 춘천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나서는 나무가 있고 공기가 맑은 조용한 곳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엔 이렇게 달라진 환경이 무척 좋더니....결국은 도심으로 되돌아왔다.
하고 싶은 얘기는 도대체 이 많은 책을 왜 이렇게 무겁게 들고 다녀야 하느냐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갈 때 선택한 2권의 책이 무엇이었더라? 그때 잠시 나는 무슨 책을 선택할 것인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골라내지 못하고, 책들을 솎아내지도 못하고 이삿짐 회사의 사람들만 고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온 집안 식구가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책을 사들고 들어오니 책을 읽는 속도가 당연히 책을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책을 좀 나누려고 하면 아직 그 책과의 인연을 정리하지 못한 탓에 차마 떼어놓지도 못하는 것이다.
3주째 우리에 갇힌듯 책을 읽고 있다. 이렇게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서 나의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저자의 거죽만 읽던 옛날의 독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마치 부모가 골라준 사람과 평생을 살아야하는 신혼의 밤에 독신주의자였던 사람이 하는 생각들이 이와 비슷할까? 그래도 열심히 살다보면 오경웅의 말처럼 살아가는 동안 천사가 된다는 말을 믿고 참을성 있게 최선을 다해 살아봐야겠지?
재미있는 것은 칼럼이라도 쓸까하고 자리에 앉으면 정리하지 않은 채 머릿속에 뒤죽박죽 들여 놓은 웬 남의 글들이 자꾸 올라오고 유행가 가사들은 원색적인 감정이입으로 정곡을 파고 든다. 마치 유원지에 있는 두더쥐 잡기처럼 망치로 두드리면 또 튀어나오고 누르면 또 나오고... 통제할 수가 없다.
이럴 때 “ 평상심으로 말하듯이 써 보세요.” 누군가 말을 해준다. “고맙습니다.” 우주의 시절 인연이 맞아 든다.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존재 이유인 자유가 있다. 차별 없는 참사람을 보겠다고 , 그것도 이번 생애에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고 ,지금 있는 그대로 이미 부처의 몸인 자기를 혹독하게 내 몰 필요는 없지. 그래 그래, 이러다가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떠돌게 될거야. 방랑 삼천리 김삿갓 처럼. 좌삿갓이 되고 말겠어....정말...
그래 잠시 숨을 고르고
이사 가기 전에 익숙한 산책 길과의 결별을 준비하자.
집을 나서서 송시열의 옛집 앞을 지나 과학 고등학교를 지나 아름다운 골목길로 접어들고, 다시 최순우 고택을 지나고 선잠단을 지나고 성북동 성당을 지나고 길상사까지...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이 길을 홀로 간다.
오월 초파일의 길상사는 어찌 그리도 아름답던지... 커다란 느티나무에 매달린 오색 등불은 하늘을 향해 한참동안 살아있는 기쁨을 감사하게 했었지. 우연히 마주치던 법정스님의 자비로운 눈빛은, 또 우연히 맞닥뜨린 백장선사에 관한 스님의 법문은 정말 감동이었어.....
이제 곧, 봄이 오면 이번에는 다른 길을 따라 길상사를 찾아가 조용히 선방에 머물면서 선의 숨결을 느껴 보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