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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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파일은 안 열리지? 아휴, 이건 뭐야? 이게 이렇게 되는거야?”
오늘도 A 차장은 자기 자리에 앉아 쉴 새 없이 입으로 일을 한다.
본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머리가 굴러가는 대로 모든 걸 말로 생중계하는 그의 능력은
한국시리즈나 김연아의 경기를 보며 함께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기 내용을 굳이 다시 찬찬히 설명해 주는,
일반적인 말이 많은 수준을 넘어서서
이제 경이로운 수준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우리 팀 직원들은 A차장의 시시콜콜한 가정사에서부터
어제 그분의 술자리는 어땠는지 오늘 기분은 어떠며 저녁 스케줄은 어떤지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
차장이 입으로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
어제의 숙취로 하루 왼종일 본인 자리에서 잠을 청했던 팀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제 저녁까지는 분명히 있었어. 어제 내가 쓴 기억도 없단 말이지.”
떨리는 듯 불안한 목소리로 왔다갔다... 정신이 없다.
가만히 들어보니 법인카드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팀장과 ‘모든 걸 동시중계 하는’ 차장은 한참을 조용히 쑥덕쑥덕.
그러더니 차장이 평소답지 않게 슬그머니 나를 부른다. 분실신고를 해 달란다.
아무래도 어젯밤 택시에서 내릴 때 떨어뜨린 것 같다며 팀장은 낡아빠진 지갑을 탓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카드회사에 조회해보니 방금 전에 누가 삼청동 밥집에서
카드를 7만7천원어치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
이제야 생각난 듯 눈을 똥그랗게 뜨던 팀장은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숨을 죽인다.
오늘 아침 팀장 본인이 우리 팀 위원에게 손수 카드를 빌려준 걸 기억 못하고
그 소란을 피웠던 거다.
덕분에 모든 팀원은 그 위원이 오늘 오후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삼청동의 한 유명 밥집에서 본인의 지인들에게 거하게 한 턱 쏜,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뜩이나 팀 내에서 미움을 사고 있는,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을 타고 강림하신 그 위원은 다시 한번 구설수에 오른다.
시끌벅적했던 사무실은 잠시 고요를 찾는다.
그 적막을 깨트린 것은 대치동 사교육계의 살아있는 대모인 B 선배의 요란한 휴대폰 벨소리.
“여보세요~ 아, OO엄마. 그렇지 않아도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50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사람이 늘어나는데, 돈은 계속 그대로일 수가 없지, 선생님한테도 죄송하고......”
고2 아들의 새로운 그룹 과외를 모으고 계시는 중인가보다.
사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는 엄마들의 열정을 조금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쓸 수만 있어도
이 나라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 거라는 신문 사설의 한 구절이 머리를 스친다.
통화가 끝날 무렵 옆자리 과장이 어기적어기적 사무실로 들어온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한 달에 한 번 생길까 말까하는 그에게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사무실로 복귀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다.
그래도 오늘은 좀 태도가 다르다. 자리에 앉자마자 뭔가 서류들을 뒤지는 듯 하더니,
비장한 얼굴로 모니터를 쳐다보고 천천히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는다.
그러더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라도 치는 양 키보드를 가열차게 두드려댄다.
오늘. 드디어 일 좀 하시나보다.
그렇게 사무실은 다시 시끌시끌.
이들이 만들어내는 하루가 이제는 익숙하다.
조용하게 적막이 흐르는 심심한 사무실보다는 훨씬 나은 거겠지?라고 위로하며
인사적체의 최대 피해자인 난 (입사 8년차, 여전히 팀 막내)
오늘도 나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영수증을 정산해서 딱풀로 고이고이 붙이고, 프린터에 걸린 종이를 빼내며
엑셀과 한글의 기본 기능들을 선배들에게 설명해주고 칭찬받으며
그렇게 또 나의 하루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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