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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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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2일 03시 15분 등록

내 인생의 시집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33편의 시와 22명의 시인과 함께 상상하다

 

들어가며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같은 명반을 만들고 싶었다. 33편의 시를 모은 지금 손수레에서 팔던 해적판 그레이티스트 히트 테이프 정도밖에 안 된 기분이다. 하지만 어쩌랴 언제 들어도 좋은 음악같이 주옥같은 시들이 아니더냐. 그냥 시만 써서 붙이기엔 아쉬워 시인에 관한 이야기, 나에 대한 이야기, 시에서 떠오르는 나만의 상념들을 군데군데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보기 좋게 붙여 졌으면 좋으련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올해 들어서 나의 자서전도 쓰고 내 인생의 시집도 엮고 나니 든든한 지팡이를 한 쌍 얻은 기분이 든다.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던 걸 덜컥 저질러 버린 기분이다.
나는 시와 인연이 있다. 시는 나의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에 함께했다. 고등학교 시절 축제에 시를 내고 여학생들에게 내 시를 설명한답시고 뛰어다녔다. 반면 대학 시절 방황할 때 홀로 낙서 같은 시를 끼적였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란 영화에 이런 말이 나온다.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늘 꾸준히 반복한다면, 의식과도 같이 행한다면, 세상은 변할 것이다.’ 시와 함께하는 나만의 의식을 상상해 본다. 이러한 의식은 먼저 나를 변하게 할 것이고 내 가족을 변하게 할 것이며 결국 세상이 변할 것이라 상상해 본다. 나의 꿈은 이렇다. 매일 저녁 10시에 우리 딸과 함께 잠들고 새벽 4시에 벌떡 일어난다. 찬물에 세수하기 전에 먼저 고릴라처럼 가슴을 여러 번 두드려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면 나탈리 골드버그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얘기했듯이 갑자기 나타나서 행복하게 주름진 큰 눈을 굴리면서 ‘너는 세상을 사랑하니까 글을 쓰는 거야’라고 속삭여 준다. 나는 말똥말똥해진 눈을 크게 뜨고 책상에 앉는다. 책상에 앉아서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오늘을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으로 시를 한 편 나직하게 나에게 읽어주는 것이다. 오늘의 시가 뭘 의미하는지는 전부 다 이해가 가진 않더라도 나는 내 속의 또 다른 ‘위대한 결정자’가 영감을 줄 것임을 전적으로 믿을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마치고 그 시는 살아 꿈틀대는 잉어같이 싱싱한 상상을 계속 내게 줄 것이다. 나는 나를 풀어주고 아주 쉽게 단순하게 손을 계속 움직여 나갈 것이다.

 

그렇다. 시는 내 시작의 의식이다.

 

시와 함께하는 새벽 의식의 실천을 무수한 생명의 흐름에 대고 맹세하면서 서문을 대신한다.

 

2012. 3. 12 새벽에 이준혁 쓰다

 

시를 모으면서 적은 단상들


시인 박남준은 1957년 법성포에서 태어나 전주대 영문과 졸업 후 서울의 직장에서 일하다가 좀 쉬려고 모악산 자락 빈집에서 지내다가 거기가 좋아서 아주 정착했다고 한다. 시인을 알려면 그의 시를 보아야 한다. 고독 속에서 자연과 마주하며 단단히 영근 시는 묵직하다. 
그의 시 ‘나무, 폭포, 그리고 숲’을 읽었다. 내가 그리워했던 건 항상 강 건너의 것이었다. 대학에 가기 전에는 학과 공부는 하기 싫고 마냥 컴퓨터 공부가 하고 싶었다. 막상 대학에 가서 컴퓨터를 전공하게 되니 수업은 너무 어렵고 수업 대신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영화 관련 일이 하고 싶었다. 나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영화를 할 수는 없어서 내가 선택한 것은 애니메이션 관련된 기술적인 부분인 컴퓨터 그래픽스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취업을 하면서 이쪽 길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강 건너의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본 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그리워했을 뿐 징검다리를 건널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시인은 숨을 놓고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폭포처럼 사느냐고 나에게 물어온다.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어 고이지 않고 비워내며 이 모든 것을 담아낼 그릇을 갖고 있느냐고 물어온다. 나는 당당했던가 최선이었던가? 가장 쉬운 길 남들이 미리 다 지나가서 미래가 쉽게 예측되는 길로 따라간 건 아닌지?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이제 나도 숲에 누워 나무를 쳐다보고 다시 한번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바라본다. 저 멀리 나뭇가지가 갈라진 모습을 보면서 그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갈 자신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북한산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다. 창문에서 머리를 빼고 옆을 보면 산자락이 치마폭처럼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산에 관한 관심도 같이 높아져 대학 시절 같은 방을 썼던 친구 녀석과 한 달에 두 번 정도 같이 산에 가게 되었다. 주말에 집을 오래 비우는 건 아내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그래서 새벽 시간을 선택했다. 보통 새벽 5시쯤 집을 나선다. 아파트와 도시의 풍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서서히 날이 밝아 오고 우리는 땀을 닦는다. 어느 날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사찰로 연결된 길을 걷게 되었다. 계단은 계속 이어지고 화장실에 가려고 들렸는데 아침까지 먹게 되었다. 알아서 떠먹고 알아서 씻고 알아서 시주하는 자유로움이 맘에 들었다. 반찬은 나물과 호박 무침이었다. 쓱쓱 비벼서 먹었는데 고기가 없어도 너무 맛깔스러웠다. 절 옆으로 난 높은 계단이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니 작은 암자가 있었다. 그 그늘에 쉬면서 우리는 땀을 닦았다. 식후 담배를 즐기는 다도 그 순간엔 담배생각보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공기에 감사했고 산의 숨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조용함을 즐길 수 있었다.
장정일은 소년원 출신, 중졸의 학력, 여호와의 증인 신도 등의 독특한 이력을 지닌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아담이 눈뜰 때’란 영화를 보고 책을 사 본 이후다. 그의 일탈적이며 어두운 작품은 나의 관심을 끌었다. 2000년 그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에 대해 대법원은 ‘성행위 묘사가 노골적이어서 우리 사회의 보다 개방된 성관념에 비춰보더라도 음란하다’며 그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바 있다. 그의 초기작에 속하는 갓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쓴 ‘사찰나무 그늘아래 쉴때는’을 보면 그의 눈물과 그의 나이에 비해 더 알아버린 삶의 고단함을 엿볼 수 있고 그의 문학의 출발점은 이러한 소년다운 순수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 모음집인 <한국의 명시 - 김희보 평저>를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에 친구의 추천으로 샀다. 이 책을 산 것은 입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에는 시인 183명의 시가 755편이 들어있었다. 1900년대의 최남선 시인에서 1970년대의 천상병 시인까지 수록되어 있다. 물론 이 책을 정독하거나 지금 목표로 삼은 것처럼 하루에 한편씩 시를 읽지도 않았다. 공부하기 싫을 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책을 꺼내 쓱 훑어보는 정도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날이었다. 그날도 책을 꺼내 이리저리 들춰 보는데 시에 숫자가 막 쓰인 시가 보이는 것이었다. 이상의 오감도였다. 그게 나와 이상의 첫 만남이었다.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쉬리얼리즘, 자동기술법 등등 그런 말이 나에겐 너무 매력적이었다. 어린 시절 좋아한 청소년 잡지 '어깨동무'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보는 것 같이 신기했다. 그의 시 대부분은 이해를 못 했지만 오감도와 거울 같은 시를 좋아했다. 나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이상문학상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란 갈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제야 그가 우리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당시에 서울대에 준하는 경성공고를 수석 졸업하였다. 그의 시 오감도는 1934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15회까지 연재되었다. 원래 30회로 예정하였으나 독자들의 과격한 항의에 따라 제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상은 이러한 반응에 대해 2천 점의 작품 중에서 30점을 골랐다고 했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불안함과 공포감이 그 당시에 시험과 등수의 압박에 힘들어하던 나의 정서와 맞지 않았을까? 현실을 초월하고 싶은 욕구가 컸던 나날들이었다.
 

유하 그는 시인이며, 영화감독이다. 내가 꿈꾸는 직업을 다 가졌다. 그의 ‘말죽거리 잔혹사’는 나의 학장 시절보다 앞선 시대였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공감을 불러일으킨 성장 영화다. 진추하와 아비의 듀엣곡 one summer night이 들리면 이 영화의 장면이 생각난다. 버스에서 훔쳐보던 여학생의 옆모습과 학원이 끝나길 기다리며 여학생에게 편지를 주려고 기다리던 풋풋한 내 옆모습이 겹친다.
학교라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특별한 곳이다. 특히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의 5년 정도의 시간 동안 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도망가기도 했지만,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 시절에 나는 잘사는 동네와 못사는 동네의 차이점을 알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싸움을 잘하는 것의 권력관계를 알았다. 교실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싸움이 벌어졌고 싸움이 난 후엔 학생주임이 싸운 애들을 보란 듯이 때리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가면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뒷산에 가면 본드 냄새가 지독했다.
나는 그때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이 표현이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나에게 사춘기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당시에 혼자 눈물을 많이 흘렸다. 왜 눈물을 많이 흘렸을까? 나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아마도 중학교 일이 학년 때쯤이었다.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하루하루가 너무 버거웠다.
Campus Life란 글자가 들어가 있던 스프링 연습장이 기억난다. 그때 Campus가 뭘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 당시 연습장 겉장에도, 공책 겉장에도, 책받침에도, 심지어 껌 종이에도 홀로서기 시구와 청순한 소녀 그림은 너무나 흔했다. 이 그림이 어느 학교 누구랑 닮았다던가 뭐 그런 얘기들이 떠돌았다. 스프링 연습장을 이용해서 야구게임도 했고 연습장을 채워오는 빡빡이 숙제도 열심히 했다.
그 시절엔 시집을 사서 선물하는 게 유행이었다. 서정윤의 시집이 어떻게 나에게 왔는지 모르겠다. 그의 시를 읽으며 나는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을 하려면 먼저 홀로 서야 한다는 걸 배웠다. 인생이 참으로 힘겹게 느껴졌던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죽음과 신에 대해 진지하게 친구와 토론을 벌였으며 홀로서기의 삽화에 나오는 순수한 소녀와 짝사랑을 했다.
지금 알아보니 그 소녀 그림은 일본의 일러스트 작가인 오오타케이분의 작품이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그 시절의 내가 그립기도 하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게 다행이기도 한 이중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프리다 칼로는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고 열 아홉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척추가 으스러지고 평생 수십 번의 수술과 세 번의 유산의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멕시코 벽화 예술의 거장인 디에고와 함께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녀의 그림은 정물화에도 그녀만의 강인함과 고통이 배어 나온다. 최영미의 시도 그렇다. 숨김없이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오히려 시를 읽는 사람을 숨고 싶게 만든다.
나의 젊은 시절 나는 나의 욕망에 솔직했던가? 나는 오히려 핑계를 댈 어둠이나 시대의 요구가 없어서 방황했던 게 아닌가? 대학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테니스 동호회에 가입했지만, 새벽의 테니스 훈련에는 참가하지 않고 밤에 술 마시는 모임만 열심히 참여했으며 기본적인 테니스 규칙조차 몰랐다. 여자 후배에게 관심이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없었던 나, 도망가기만 했던 나는 돌아보면 얼마나 미숙하고 어리석었는지 너무 부끄럽다. 나의 알몸을 확 드러나게 하는 그녀의 시를 오늘 다시 읽어 보고 싶다.

번역 시는 번역마다 느낌이 다르다.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무라카미 류의 69란 성장 소설에서다.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란 표현이 아주 좋았다. 다른 번역을 찾아보면 ‘그것은 태양과 섞인 바다’, ‘그것은 태양와 어울린 바다라오’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 가장 풍경 사진이 잘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해가 기울면서 자신의 빛을 옆으로 비추어 주니 지구 위의 모든 사물이 빛을 받아 빛난다. 특히 여행 중에 보았던 미국 서부의 브라이스 캐니언이 해 질 녘 빛을 받아 그늘져 있는 모습이 기억난다.
하지만 일부러 멀리 바다나 협곡을 향해 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 해가 뜨고 지는 순간 하늘과 닿아 있는 지평선이라도 바라보는 여유를 갖고 싶다.

 

내 가슴 속은 분노로 뒤덮였다. 계속되는 야근과 주말 근무. 내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였다. 석 달만 열심히 하자는 프로젝트는 연기에 연기를 거듭해서 벌써 7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팀원들은 다 지쳐서 삼삼오오 모이면 이 지옥을 어떻게 도망쳐 나갈까 하는 이야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연휴에 뭘 할지 고민하는데 우리는 연휴 중 하루를 쉴 것이나 말 것이냐는 걸로 한 시간 째 미팅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는 평소보다 일찍 저녁 때쯤 퇴근을 하고 일요일 정오에 다시 출근하곤 했다. 토요일 저녁에 퇴근할 때 해가 아직 떠 있으면 가슴이 막 뛰곤 했다. 밖이 밝을 때 퇴근하는 게 너무 어색하고 가슴이 불안했다. 저녁 시간에 간만에 여자 친구를 만나서 닭발에 소주를 마시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 토요일 저녁의 기분은 매일 술을 마실 수 있는 지금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시절도 지나고 나니 가끔 그때가 그립다.

칼릴 지브란의 시는 쉬워서 좋다. 꼭 어렵고 심오해야 좋은 시는 아니다. 쉽게 다가오는 시는 나에게 정말 친구처럼 내 마음을 위로 해 줄 때가 있다. 나는 위로가 되고 쉽게 공감이 가는 편안한 시가 좋다.
그의 시 나그네를 읽으면 내가 여행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서 낯선 곳에서 식사하고 잠을 자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처음으로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은 병역을 마치고 유학을 가기 전에 나 혼자 배낭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도착지는 프랑크푸르트였는데 오사카에서 하루를 묵고 가는 일정이었다. 대부분 여행자는 오사카의 간사이공항에서 잠을 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외국에서 첫 번째 밤을 공항에서 보내는 건 너무 우울했다. 마지막 전철을 타고 오사카 시내로 갔다. 가장 번화한 오사카의 난바 역에 내렸을 때의 그 낯선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영화 속 세트 같기도 하고 나와 같은 듯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물결과 낯선 네온사인들… 예약한 한국인 민박집에서 잠이 안 와서 이름 모를 거리를 배회하던 기억이 난다. 그의 시 속에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


<님의 침묵>은 교과서에 수록된 시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여자친구를 못 만나면서 어찌나 이 시가 가슴에 와 닿던지 내가 처음으로 암기한 시가 아닌가 싶다. 정확히는 암기하려고 노력했던 시인가 보다. 다시 외워보려고 했으나 첫 문장만 머릿속에 맴돌다 사라진다.
비록 ‘키쓰’의 추억은 아쉽게도 없었지만 나를 절망에서 벗어나게 도와준 것은 이 시였다. 이별 때문에 괴로워함은 결국 진정한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며 이러한 슬픔의 힘을 전환해서 새로운 희망을 틔워야 한다는 것이 이 시의 가르침이다. 
고3 시절 어느 날, 나는 머리를 빡빡 깎았다. 물론 머리를 민다고 중이 되거나 만해 한용운 같은 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공부가 잘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머리를 감을 필요가 없어서 좋았고 머리가 조금씩 자라면서 수건을 던지면 머리에 착 붙은 것이 신기해선 친구들이 날 놀려대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유쾌하면서도 쓸쓸했던 고교 3년 시절은 지나갔다.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 2’는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의 화장실벽에 붙어 있는 시이다. 섬진강이란 단어에는 뭔가 내가 모르는 사연이 서려 있는 듯하다. 남도여행을 가본 적이 있다. 거문도의 영국군 묘지를 찾아 걸어가던 길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기억난다. 비쩍 마른 강아지 노랑이를 만났고 해는 저만치 걸려있고 날씨는 청명하고 상쾌한 새소리와 향긋한 섬의 냄새, 부드러운 바람이 기억난다. 우거진 너무도 푸른 잎들 언덕 너머 갑자기 나타난 바닷가의 절경들.
다음번엔 섬진강으로 여행을 가보고 싶다. 낮술을 마시고 정처 없이 긴 강을 따라 걸어가고 싶다.


나는 항상 멍하니 걷는 걸 좋아했다. 방황이라고도 하고 과학도를 꿈꾸는 대학교 시절 친구들은 브라운 운동이라고도 불렀다. 혼자 다닐 땐 주로 가고자 하는 길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데 탁월한 감각을 발휘하여 의도치 않은 방황을 즐기곤 했다.

 

교보생명빌딩의 광화문 글판은 1991년부터 시작되었고 1997년부터 시적인 글귀로 바꾸어 현재는 계절마다 마음을 울리는 글귀가 바뀌고 있다. 그 중 인상 깊은 글귀 몇 개를 뽑아 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2011 여름, 정현종의 <방문객>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
- 2010 가을, 괴테의 명언 변용
눈과 얼음의 틈새의 뚫고 가장 먼저 밀어올리는 들꽃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 2010 겨울, 곽효환의 <얼음새 꽃> 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 2009 겨울, 문정희의 <겨울 사랑> 중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 2009 가을, 장석주의 <대추 한 알> 중
찬 가을 한자락이 은은히 내 안으로 스며든다. 고마운 일이다.
- 2008 가을, 조향미의 <국화차> 중
봄이 속삭인다 꽃 피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 2007 봄, 헤르만 헤세의 <봄의 말> 중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
- 2005여름, 김규동의 <해는 기울고 ‘당부’>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 2005 봄, 정현종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 2004 봄,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떠난 사람들 모두 돌아와 다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사랑하자
- 2004 겨울, 고은의 <강설> 중
  

내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문집에서다. 그 당시 여중고교생들은 시가 주인공인 문집을 만들어서 교내 축제에 내는 게 유행이었다. 그녀의 문집에 이 시는 여러 번 반복해서 그림과 함께 나타났고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이 내 머릿속에 남았다. 초등학생 또는 중학생 꼬마였던 나는 잘 이해는 안 갔지만 뭔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크면 이렇게 멋지고 예쁜 문집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문집을 만들었던 누나는 뭘 하고 있을까? 그 문집은 어머니의 동료교사였던 국어선생님께서 제일 잘된 문집 같다고 나에게 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워 넣고 강에 투신자살한다. 그녀의 유서엔 그녀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과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던 남편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 울프가 청혼했을 때 그녀는 보통 사람 같은 부부 관계를 하지 않을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고 요구했고 그는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그녀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박목월의 <불국사>를 소리 내어 읽어 본다. 그의 시의 단순성과 함축성이 아주 좋다.
시를 느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는 적어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여유 있는 아침 시간에 이러한 시를 나직이 나에게 들려주고 싶다.

 

엮고 나서

처음 연구원 레이스를 시작할 때 네 번째 과제인 내 인생의 시가 가장 쉬울 것 같았다. 시를 외우는 것은 자신이 없었지만 33편의 시는 그냥 모으면 될 것이라 생각 했다.
이 과제야말로 가장 자유도가 높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과제라 생각한다.
첫 번째 과제에서 세 번째 과제까지 시간 내에 사부님의 말씀대로 분량을 채워서 내긴 했지만 자신을 돌아봐도 탁월하게 한 것은 없었다. 돌아보면 레이스 중간에 8일간의 여행이 끼여 있어서 좀 곤란한 점이 있었고 야근과 휴근이 껴있었지만, 야간에 글 쓸 수 있는 시간이 다행히 좀 나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학교 졸업 후 처음 해보는 숙제로 신경을 썼더니 계속 소화불량에 걸려서 고생했다. 네 번째 과제를 탁월하게 해서 반드시 연구원으로 뽑히겠다는 각오로 쓰고 또 썼다.
사부님은 2차 합격자를 발표할 때면 자신이 뽑는 게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추천한 것이고 시간을 많이 쓰고 절실히 노력한 사람은 기쁨이 클 것이고 그렇게 하기 어려웠던 사람은 마음속으로 선발되지 않은 것에 안도할 것이라 했다. 나의 마음 한구석에 떨어졌을 때의 우울함 뒤에 안도감이 있진 않았는지 자신을 깊이 반성할 뿐이다.

IP *.236.3.233

프로필 이미지
2012.03.13 18:19:47 *.123.71.120
언제 섬진강 같이 걸어요^^ 낮술도 한잔하고... 1차 과제였던 자기소개서가 생각나는 글이네요..^^
프로필 이미지
2012.03.13 18:45:23 *.97.72.114

가장 깜짝 놀라게 할 분이라고 예상했는데, 본인은 레이스를 어떻게 펼치셨나요?

 

그랬군요. 그 가슴에 스며있는 남다른 詩心이 있었군요.

 

까도남?

 

그러나 알고보면??   

 

  ....   

   

 

수고하셨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  

 

프로필 이미지
2012.03.17 09:52:23 *.154.223.199

안녕하세요? 준혁님 저 왔습니다.^^

작가소개, 감상에 개인적인 사연까지 풀옵션 장착된 시, 게다가 시와 인연이 있는 분이 고른 시 잘 읽겠습니다.

책받침의 저 소녀를 저도 기억하거든요. 저와 연대가 그리 멀지 않으신듯?!ㅋㅋㅋ  

 

서문에서는 '나는 시와 인연이 있다'는 말하고요,

'시는 내 시작의 의식이다. 시와 함께 하는 새벽 의식의 시작을 무수한 생명의 흐름에 대고 맹세하면서 서문을 대신한다'는 말이 쿵 합니다.

 

'엮고 나서'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요

준혁님의 <깊은 인생> 저자에 대해서를 읽다가요 준혁님의 존경하고 삼가는 마음이 느껴져 저도 단정히 앉게 되었거든요.

오늘도 스승님께 영향받고 있으리라 추측하며 그 영향이 어떤 식으로든 준혁님을 아름답게 이끄시리라 믿습니다. 

머,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레이스 한 달 같이 한 인연밖에 없지만요, 그리고 암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드리는 말은 500원짜리입니다.

구운 계란 사먹으려도 천 원이 필요하고, 새우깡도 700원은 있어야 하고, 버스 카드 잊어먹고 나왔을 때 차도 못타는.... 

또 저지르는 맘으로 써놓아봅니다. 많은 분들이 아끼는 마음으로 침묵으로 지켜보시겠다 짐작합니다.

저는 작년에 단군의후예 프로그램 들으러 온 하룻강아지라 하룻강아지의 특권으로 마구 찧고 까부느라 이런 말씀을 드려봅니다.  

 

그리고 낮술에 취해서 혼자 섬진강 걷는 거 저도 해보고 싶습니다. ^^

어쩐지 술 병 차고 걷고 있는 내 옆에 어떤 여자와 남자가 홍조 띤 얼굴로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걷고 있을 것 같다는ㅋ

그 어떤 여자는 하늘, 강, 꽃나무를 보고 팔랑팔랑 걷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저기요' 말을 걸 것 같다는 ㅋ 

그 어떤 남자는 하늘도 땅도 아니고 머릿속 상념을 따라 걷다가 엉뚱한 동네로 접어들 것 같다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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