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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0일 17시 56분 등록

Viva La Vida.JPG

 

행인들은 나에게 눈길을 주고 한마디씩을 하지.

이 옷이 어울릴까.

저 옷이 어울릴까.

그 시선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닌 나의 허상에 뒤집어씌워져있는 또 다른 형식을 바라보는 것.

 

나의 삶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아. 오로지 사람들을 위한 겉치레적인 옷장식의 역할로 인식되어져 있을 뿐이지.

애초부터 나는 그렇게 태어났어.

생명이 없기에 나의 각성이 없기에 나를 인지할 수 없기에 오로지 당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삶으로 살아가도록 설계가 되어있어.

그런 나에게 그들은 한마디씩을 건네지.

“이 옷 한번 걸쳐 봐줘요. 맵시가 나나.”

“조금 작은 것 같은데 큰 치수로 줘보지.”

“와우. 옷 괜찮은데 한번 돌아봐줘요.”

사람들의 눈길이 내 온몸의 위아래를 훑을 때에는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런 감정조차도 외부로 표현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어.

왜냐고.

나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객만족을 위한 첨병으로써의 역할만이 부여되어있기 때문이야.

물론 진정한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지만.

‘나도 당당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줘요.’

‘나도 하루 8시간 근무를 보장해줘요.’

‘나도 남이 입혀주는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선택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싶어요.’

‘남의 대리자가 아닌 나로써 살고 싶어요.’

하지만 그것은 그네들이 바라는 삶이 아니었어.

왜냐고.

나는 당신들로부터 창조된 피조물 이었기에 할당된 의무만이 허락될 뿐이었지.

 

내가 주인인 삶.

서툴지만 아장아장 아기의 걸음마를 걷고 싶은 그런 날을 고대하던 어느 날.

한낮의 뜨거운 태양아래 명동대로였어. 사람들의 인파가 하늘을 찔렀지.

눈요기를 하고 있던 중 쏟아지는 잠을 참느라 한동안 고생하다가 하품을 하기 시작했어.

웃기지 않아. 내가 하품을 하다니.

그러면서 갑자기 왼쪽 밑바닥에서 뛰어오르는 묵직한 소리를 듣게 된 거야.

쿵.

쿵.

얼마나 놀랐던지 숨이 (애초부터 없던 숨이었지만) 멎는 줄 알았어.

진정을 시키면서 조심스럽게 가슴을 에워싸는 팔의 근육에 힘을 줘보았지.

다음으로 손가락을 가지런히 쥐어보고 발가락도 까닥거려 보았어.

어라. 움직인다. 움직여.

세상에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쇼윈도의 창문을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어.

나의 살아온 과거가 모두 사람들에 의해 길들여져 있기 때문 이었지.

어떻게 해야 하지. 나가도 되나. 괜히 불길한 징조가 아닐까.

아니야. 더 이상 나빠질 일도 없지.

한참동안을 망설이다가 나는 조심스러운 헛기침과 함께 주위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오른발을 떼 보았어.

인간처럼 자연스러운 걸음은 아니었지만 뻐거덕 거리며 서툴게 내딛는 배꼽과 연결된 신경 가닥들.

기적은 이루어졌어. 그렇게도 바라는. 나도 당신들처럼 드디어 걷게 된 거야.

깨질 것만 같은 유리문을 열고 나왔어.

바람을 맞으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른 발걸음을 내딛었어.

모양은 어설펐지만 이게 어디야.

한발 한발 천천히 다시 내딛는 발자국.

가장 곱게 차려입은 나의 의상에 젊은 여인들의 시선이 내리 꽂히고 있었지.

상상할 수 있니.

마네킹이 아닌 나로써 주목받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쏟아지는 질투어린 시선들.

이제까지 살아온 역사의 바라봄과는 전혀 달랐어.

무언가. 나의 의미를 인정해준다고 할까.

드디어 해방이야.

살아있음의 느낌.

존재한다는 느낌.

나도 드디어 드디어…….

삐리리~

 

깨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영업이 끝난 상가의 모든 불이 꺼진 이 새벽. 나는 백일몽을 꾸었던 거야.

뭐야. 꿈이잖아.

…….

…….

허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나에게 무슨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지만 그 장면은 생생했다. 정말로 나는 갇혀있던 그곳을 헤집고나와 나의 이 두발로 걷고 뛰었다니까.

숨을 쉬었고 주체하지 못하는 웃음도.

그런데…….

이제 다시 익숙한 공간.

긴긴 밤이 깨어지려면 긴긴 시간이 일어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지나야 할 것인가.

또다시 찾아올 흑백의 필름들.

또다시 기다려야할 그날들.

그럼에도 나는 오늘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인간들은 모를 거야.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치밀어 오르는 실현의 마음을 손가락꼽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도 나팔을 분다.

사람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Viva La Vida.

 

 

p.s

: Viva La Vida는 스페인어로 ‘인생 만세’라는 의미.

IP *.130.104.63

프로필 이미지
2012.05.24 12:51:52 *.114.49.161

영화에서 만화에서 본 적 있어요.

낮동안 꼼짝 않고 서 있던 마네킹들이 디스플레이 자리에서 걸어내려와

쉬고, 이야기하고, 모험하고, 사랑하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장면이요.

제목은 기억이 안나요. 정말 그런지도 모르지요.

저는 어디선가 저 아름다운 몸매의 그녀를 지켜보고 사랑하는 마네킹이 있을 것 같네요.

101번째 단상이 뭔가 의미심장합니다.

오빠선배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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