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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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리더
근래만큼 1997년이 주목을 끈 적은 없었다.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로부터 촉발된 90년대 후반의 향수는, 절정을 구가하고 있는 가수, 싸이의 ‘77학개론’과 지상파 방송을 제외한 최고의 시청률이라는 ‘응답하라 1997’라는 드라마로 인해 본격화 되고 있는 모양이다. 미디어에 무심했던 나는, 지난 주 우연찮은 기회에 이 모든 것들을 접하게 되었다. ‘사람에게서 구하라’는 구세주다. 간만에 두껍지 않은 책으로 불안한 호사를 누렸다. 그 때의 음악, 문화, 소품, 의상, 정치, 경제 상황 등의 디테일한 재연에 회상하듯 미소를 흘렸다. 내 안에서 이미 박제되었던 시간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기억을 난반사 시킨다. 얼마간 괴로웠던 적도 있었던 것 같고 슬프고 화나는 기억들도 많았는데, 신기하게도 좋은 기억들만 되살아 난다. 이러저러한 기억과 사유들이 지나간 다음, 내 마음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들을 톺아본다.
나는 그 때의 사회적 상황들이 미화되는 것을 경계한다. 인문학적 배경이 빈약한 자가 나라의 수장이 되어 국가 부도 사태는 초읽기에 들어가 있던 상황이었고 근래의 자살자를 능가하는 노동자들이 죽어나갔던 때였다. ‘이익’이라는 개념이 사회 전체의 도덕 불문율을 압도해 나가기 시작한 때였고 외압이든 내압이든 ‘비즈니스에 道’가 사라졌다. 그 ‘단명함의 파탄’을 무능한 국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떠 안겼다. 오늘의 불행이 시작된 때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게다. 그 해 봄, 나는 나라를 이 꼬라지로 만든 수장을 타도한다는 명분과 한총련 6기 출범식을 핑계 삼아 상경했다. 하다가 곧 사복경찰에 붙잡혀 만 하루 콩밥을 먹고 훈방되지만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들을 처음으로 체험한다. 어설픈 리더 하나가 공동체 전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습을 목도한 것은 나 개인으로 치자면 잘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우리를 생각할 때는 아픈 일이기도 했다.
그 때 나는 또 하나의 리더를 보았다. 이 땅의 마루금산의 능선 을 누비며 열 대여섯 되는 무리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未知의 가치’를 추구하던 산악부장.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정하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애써 택하여 전 대원을 사고 없이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데려다 놓는 일, 남녀를 평등하게 대하고 산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관계를 조율해 내던 일, 날씨와 천기를 읽어 진퇴를 결정하고 칼날 같은 판단으로 모두를 死地에서 구해내던 일, 같이 자고 같이 걷고 같이 울던 리더. 이념과 종교, 이익과 탐욕으로 탁해진 사회적 공기는 이 곳에서 진공상태가 되었다. 나는 빠져들었고 이 무호흡의 인큐베이터에서 기뻐했다.
두 개의 다른 세계, 그 세계를 이끄는 각각의 리더는 이렇게 달라 있었다. 한 사람은 나에게 콩 밥과 분노를 먹였고 한 사람은 삶의 양식과 기쁨을 맛보게 했다. 천박한 이익에 눈먼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과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는 가슴을 가진 사람. 무엇이 인간에 가깝고 사람에 가까운가. 리더는 리더가 되기 전 이 땅에 사람들이 연민으로 연대하는 자연의 하나임을 알아야 할 터.
봄을 보라. 잔인하고 냉혹하지 않지만 꽃을 피우지 않는가. 그 부드러움은 자신에 대한 수양이었으니 혹독한 겨울도 이겨 낸 것이다. 가을을 보라. 모든 것을 버리고 서서 겨울을 견딜 준비를 마친다. 자연처럼 스스로 수양하지 않고는 자신을 좋은 리더로 창조해 낼 수 없다.
'무엇이 인간에 가깝고 사람에 가까운가. 리더는 리더가 되기 전 이 땅에 사람들이 연민으로 연대하는 자연의 하나임을 알아야 할 터.'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입니다. :)
나는 1997년에 중2였나...
친구관계에 얽히고 섥혀 피곤한 한 때를 보냈던 청소년 시절.
그때를 기억하면 수학이고 뭐고, 난 사람과의 관계에서 처음 갈등이란 것을 경험했던 때 인 듯.
그때 나를 이끌어주는 리더가 있었다면, 그냥 그 친구랑 놀지 말라는 처방 말고, 다른 것이 있었으면
좀 더 나았으려나? 겪어야 했던 사건이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듦
힘 있는 오빠 글에 또 푹 빠져 있다 갑니다.
산=재용 (수학은 등가로 여길 수 없는 개념들을 시원하게 등가로 만들어 버리는 요술이 숨어 있지요. ㅎㅎ)
산*재용= 훌륭한 책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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