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장재용
  • 조회 수 2344
  • 댓글 수 9
  • 추천 수 0
2012년 9월 17일 11시 18분 등록

1997, 리더

 

근래만큼 1997년이 주목을 끈 적은 없었다.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로부터 촉발된 90년대 후반의 향수는, 절정을 구가하고 있는 가수, 싸이의 ‘77학개론과 지상파 방송을 제외한 최고의 시청률이라는 응답하라 1997’라는 드라마로 인해 본격화 되고 있는 모양이다. 미디어에 무심했던 나는, 지난 주 우연찮은 기회에 이 모든 것들을 접하게 되었다. 사람에게서 구하라는 구세주다. 간만에 두껍지 않은 책으로 불안한 호사를 누렸다. 그 때의 음악, 문화, 소품, 의상, 정치, 경제 상황 등의 디테일한 재연에 회상하듯 미소를 흘렸다. 내 안에서 이미 박제되었던 시간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기억을 난반사 시킨다. 얼마간 괴로웠던 적도 있었던 것 같고 슬프고 화나는 기억들도 많았는데, 신기하게도 좋은 기억들만 되살아 난다. 이러저러한 기억과 사유들이 지나간 다음, 내 마음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들을 톺아본다.

 

나는 그 때의 사회적 상황들이 미화되는 것을 경계한다. 인문학적 배경이 빈약한 자가 나라의 수장이 되어 국가 부도 사태는 초읽기에 들어가 있던 상황이었고 근래의 자살자를 능가하는 노동자들이 죽어나갔던 때였다. ‘이익이라는 개념이 사회 전체의 도덕 불문율을 압도해 나가기 시작한 때였고 외압이든 내압이든 비즈니스에 가 사라졌다. 단명함의 파탄을 무능한 국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떠 안겼다. 오늘의 불행이 시작된 때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게다. 그 해 봄, 나는 나라를 이 꼬라지로 만든 수장을 타도한다는 명분과 한총련 6기 출범식을 핑계 삼아 상경했다. 하다가 곧 사복경찰에 붙잡혀 만 하루 콩밥을 먹고 훈방되지만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들을 처음으로 체험한다. 어설픈 리더 하나가 공동체 전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습을 목도한 것은 나 개인으로 치자면 잘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우리를 생각할 때는 아픈 일이기도 했다.

 

그 때 나는 또 하나의 리더를 보았다. 이 땅의 마루금산의 능선 을 누비며 열 대여섯 되는 무리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未知의 가치를 추구하던 산악부장.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정하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애써 택하여 전 대원을 사고 없이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데려다 놓는 일, 남녀를 평등하게 대하고 산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관계를 조율해 내던 일, 날씨와 천기를 읽어 진퇴를 결정하고 칼날 같은 판단으로 모두를 死地에서 구해내던 일, 같이 자고 같이 걷고 같이 울던 리더. 이념과 종교, 이익과 탐욕으로 탁해진 사회적 공기는 이 곳에서 진공상태가 되었다. 나는 빠져들었고 이 무호흡의 인큐베이터에서 기뻐했다.

 

두 개의 다른 세계, 그 세계를 이끄는 각각의 리더는 이렇게 달라 있었다. 한 사람은 나에게 콩 밥과 분노를 먹였고 한 사람은 삶의 양식과 기쁨을 맛보게 했다. 천박한 이익에 눈먼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과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는 가슴을 가진 사람. 무엇이 인간에 가깝고 사람에 가까운가. 리더는 리더가 되기 전 이 땅에 사람들이 연민으로 연대하는 자연의 하나임을 알아야 할 터.

 

봄을 보라. 잔인하고 냉혹하지 않지만 꽃을 피우지 않는가. 그 부드러움은 자신에 대한 수양이었으니 혹독한 겨울도 이겨 낸 것이다. 가을을 보라. 모든 것을 버리고 서서 겨울을 견딜 준비를 마친다. 자연처럼 스스로 수양하지 않고는 자신을 좋은 리더로 창조해 낼 수 없다.

IP *.51.145.193

프로필 이미지
2012.09.17 21:13:55 *.39.134.221

1997년의 리더. YS. 기억난다.

나는 그때도 일터에서 일하는 일꾼이었고, 국가부도사태를 맞이한 리더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했었지.

아마 채권 시가평가도 그때 부터 였던것같다.

그랬구나. 일터에 있던 나도 그것들이 갑작스러웠지만

학생이던 재용이는 다른 면에서 분노하고 있었네.

너의 분노가 튄곳이 산이었네. 산이란 놈은 충분히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고 품기도 하지.

 

보아하니 재용을 품어줄 만한 놈이 산정도는 되어야 하는 듯하다.

이제 글의 시작이네...책의 시작.

 

프로필 이미지
2012.09.18 14:14:42 *.51.145.193

행님께서도 산에 가면 기쁘시지요?^^

비슷한 DNA를 타고 난 것 같습니다.ㅋㅋㅋ

프로필 이미지
2012.09.18 06:27:22 *.194.37.13

나의 1997년은 무엇이지?

군에서 상병을 달고 있었고, 재용이처럼 좋은 리더를 만나서

멋진 군생활을 보낸 것 같아. 공부하라고 배려해 준 상사가

흔치 않았었는데 말이야.

그래서, 1997년은 울창한 숲에서 나를 키운 시간으로 기억하고 싶다.

프로필 이미지
2012.09.18 14:16:11 *.51.145.193

저는...좋은 리더는 아닌 것 같습니다.^^

행님같은 덕장을 이 시대는 바라고 있지요^^

프로필 이미지
2012.09.18 09:21:59 *.196.23.76

'무엇이 인간에 가깝고 사람에 가까운가. 리더는 리더가 되기 전 이 땅에 사람들이 연민으로 연대하는 자연의 하나임을 알아야 할 터.'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입니다. :)

나는 1997년에 중2였나...

친구관계에 얽히고 섥혀 피곤한 한 때를 보냈던 청소년 시절.

그때를 기억하면 수학이고 뭐고, 난 사람과의 관계에서 처음 갈등이란 것을 경험했던 때 인 듯.

그때 나를 이끌어주는 리더가 있었다면, 그냥 그 친구랑 놀지 말라는 처방 말고, 다른 것이 있었으면

좀 더 나았으려나? 겪어야 했던 사건이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듦

 

힘 있는 오빠 글에 또 푹 빠져 있다 갑니다.

산=재용 (수학은 등가로 여길 수 없는 개념들을 시원하게 등가로 만들어 버리는 요술이 숨어 있지요. ㅎㅎ)

산*재용= 훌륭한 책

되기를 ^^

프로필 이미지
2012.09.18 14:18:18 *.51.145.193

근데 수학선생님이 쓰는 +, * 연산자는 확실히 포스가 남달라~~

벌써 책 된 기분^^

프로필 이미지
id: 깔리여신
2012.09.18 22:48:11 *.85.249.182

난 재용이의 글을 읽으면 고래뱃 속에 들어온 느낌이야.

뭔가 넓은 공간인데도 어둑신하고, 넓은 가 싶어 마구 뛰놀려고 하면 그 방종을

턱하니 막아주는 그런 글.

재용이의 글을 통해 1997년을 되돌아보게 하네.

나는 서실에서 먹갈면서 이럴까 저럴까 햄릿이 되어 맣이 고민하고 그랬을 거야.

드디어 재용이의 산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듣게 되겠구나.

기대 기대!!!!

프로필 이미지
2012.09.19 09:29:59 *.114.49.161

저런 산사나이를 만났으면 내가 마구 따라다녔을텐데...나는 지하에 있느라 멋진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광장으로 나를 못 데려갔었네. 아쉽구만요. 재용의 글이 점점 더 멋져지는 듯 해요. 아마도 성실한 북리뷰를 통해 마구 진화하고 있어서겠지요. 잘 읽었어요.

프로필 이미지
2012.09.19 10:57:35 *.93.117.147

남녀를 산에서 평등하게 대하다니..

그 문구에서 확걸리네?

담에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재용아 ~

네 글은 늘 힘이 느껴져서 좋다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