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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1일 21시 42분 등록
 

니체와 살로메의  짧은 사랑


  11월을 닮은 남자를 기억하고 있다. 11월을 닮은 남자는 얼굴선이 가늘고 어딘가 아픈 듯 창백했다. 인디언들이 11월을 가리켜 ‘기러기 날아가는 달’,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꽁꽁 어는 달’, ‘많이 가난해지는 달’ 등의 이름을 붙였듯이 그 남자에게도 이런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한 느낌의 이름이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담배연기 가득한 지하의 ‘왕궁다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11월을 닮은 남자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친구의 친척오빠쯤으로 소개받은 우리들은 그 심약하게 생긴 남자가 하는 말에도 끌렸지만 검은색 긴 코트며, 도통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듯 초탈한 표정에 이끌렸다. 마음속으로 ‘뭐야 이 남자는 여기에 나왔으면 우리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야지’이런 불평을 했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11월을 닮은 남자는 ‘니체의 광기’를 이야기하면서 ‘니체의 죽음’을 심각하게 말했다. 니체 같은 심오한 작가를 읽을 생각도 하지 않은 우리들에겐 자존심 상하는 대화였다.

   겉멋이 잔뜩 들어 철학책을 옆에 끼고 다녔으나 머리 아픈 철학책들은 읽기 싫었고, 달콤한 연애소설에 더 끌렸다. 지적허영심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까뮈와 카잔스키를 이야기했지만 핵심을 찔렀다기보다는 그 언저리를 맴돌았다. 11월의 남자는 우리들이 지적 허영심에 들뜬 그렇고 그런 여자들이라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11월을 닮은 남자는 니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니체는 아침에 하숙집에서 나오다가 광장에서 한 마부가 말을 때리는 장면을 보고서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광장을 가로질러가 그 말의 목을 껴안았다. 니체는 곧 정신을 잃고 고통 받는 말을 껴안은 채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후로 니체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으며, 죽을 때까지 정신병을 앓았다’는 이런 요지였다. 그는 마치 니체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되는 듯 무척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때 덩달아 슬픈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지식으로 무장한 11월을 닮은 남자가 무척 멋져보였으니까.

  11월을 닮은 남자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헤어졌다. 11월을 닮은 남자가 ‘니체’사상에 경도되어 있기에 나도 ‘니체’를 알고 싶었다. 서점으로 달려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한 권 샀다. 첫 장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인으로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의 독일식발음이 ‘짜라투스트라’인데, 그에게서 왜 초인사상을 차용했는지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언젠가 만난다면 나의 지식을 내보이고 싶었는데, 그런 앙큼한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다. 11월을 닮은 남자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그 마음을 포기해야만 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없어 이번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을 샀다. 잠언형식으로 되어 있어 내가 필요한 부분만 펼쳐서 읽곤 했다. 하지만 다시는 11월을 닮은 남자와 마주치는 일도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다. 11월을 닮은 남자는 그렇게 니체를 남겨놓은 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 서가에는 누렇게 변색된 니체의 책 두 권이 아직도 꽂혀 있다. 마당문고에서 1983년 6월 15일 펴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청하출판사에서 1983년 2월28일 펴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 두 권이다. 결혼을 하고 이사를 하면서도 이 두 권의 책을 끌고 다녔으며, 몇 년 전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면서 수레 2대분의 책을 버렸을 때도 이 책들만은 버리지 않았다. 11월을 닮은 남자 때문이 아니라 ‘니체’의 책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나만의 금기사항 때문이다. 니체는 나에게 있어 지적 권력자이다. 니체는 권력자에게 쉽게 동의하거나 종속되는 것을 싫어했는데.

  니체의 <즐거운 지식>을 읽으면서 다시금 11월을 닮은 남자를 떠올렸다. 지금도 어디선가 심약한 얼굴로 니체를 이야기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스쳐지나갔다. <즐거운 지식>을 읽으면서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니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했다. 지식의 습득이란 세월과 무관함을 알았으며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함을 깨달았다. 니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이진우 교수의 철학적 기행문집인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찾아서>를 읽었다. 니체의 행적을 따라 그의 철학을 풀어놓은 책이라 어렵지 않으면서도 니체의 일대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니체가 로마에서 ‘루 살로메’를 만난 지 몇 일만에 사랑에 빠져 청혼을 하게  되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가슴 아팠다. 그 당시 21살의 루 살로메는 긴 다리, 가는 허리, 크고 맑은 눈, 작고 뾰족한 코, 매력적인 입술, 황금빛 머리칼을 지닌 미인이었다. 뭇남성들이 첫눈에 반해 버리는가 하면 살로메로 인해 인생이 파탄나거나 자살하는 남자도 있었으니 그녀는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었지만, ‘팜므파탈’로 분류되기도 한다. 루는 19살에 취리히대학에 입학하여 비교종교사, 미술사, 철학 등을 공부했다.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 병약함으로 피를 토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21살 때 이탈리아 로마로 요양을 하러 떠났다.       

    루는 로마에서 니체의 친구인 ‘레’를 만나게 되었고, 레는 루에게 반하여 청혼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때 루는 ‘레’에게 남자 두 명과 자신이 함께 공동생활을 할 것을 제의했고, 루를 놓치고 싶지 않은 레는 니체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니체가 루 살로메를 보자마자 던진 말은 “우리는 어느 별에서 떨어져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된 걸까요?”라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촌스런 멘트였다. 공부만 했던 샘님 니체의 어리숙하고 세련되지 못한 연애본색은 이렇게 처음부터 여지없이 탄로나버렸다. 

  서른일곱 살의 니체는 장미꽃이 만발한 오월의 어느 날 루체른공원에서 스물한 살의 루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한다. 루는 니체의 지적인 분위기에 매력을 느꼈지만 결혼이라는 구속이 싫었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여자는 하나의 소유물로서 얻어지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소유>, <소유된다>라는 개념으로 성립되어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누군가를 원하며 자기 자신을 주어 포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라고 했다. 루는 여자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사상과 신념을 철저히 배반한 것이다. 루 역시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지성인이었으며, 사회의 관습과 인습을 부정하는 그런 여자였다.

  청혼을 거절당했지만 니체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적절하게 토론도 할 수 있는 이 여인, 꿈과 같은 창조물’인 루에게 완전히 빠져있었다. 그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사랑에 빠진 것이다.

  루는 니체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또 그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니체와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와 루, 이 세 사람은 타우텐부르크에서 집 한 채를 세내어 한 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여동생 엘리자베트는 루를 너무나 싫어하여 두 사람은 앙숙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니체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루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 당시 루의 일기장엔 “우리는 니체가 새로운 종교의 예언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는 많은 영웅을 제자로 삼는 사람이 될 것이다”고 썼다. 니체에 대한 루의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살로메의 열정적인 추진으로 라이프치히에서 니체와 레와 살로메의 작업공동체 즉 동거가 시작되었다. 살로메는 훗날에  ‘책과 꽃들로 가득 찬 쾌적한 작업실, 그리고 양쪽에 딸린 두 개의 침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명랑하지만 진지한 동아리로 뭉친 작업 동료들’이라고 회상했다. 세 친구의 작업공동체는 3주간 지속되었고, 겉으로 보기엔 충분히 즐거운 나날이었다. 루는 니체, 레, 동양학자 안드레아스, 릴케 등과 동거를 했지만 냉정하고 혹독할 정도로 육체적인 접촉을 피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의문을 낳고 있다.

  니체는 레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한 라이벌이었기에 레는 니체를 따돌리고 루와 동거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니체는 절망에 빠졌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데 근 일 년 남짓 걸렸다. 이들은 헤어지기 직전에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을 찍었다. 니체가 주도해서 스위스에서 찍었는데, 니체와 레는 충실한 마부가 되어 수레를 끌고 루는 채찍을 들고 서 있는 사진이다. 루는 사진에서처럼 평생 동안 남자들 위에 군림하는 작은 여왕으로 살았다. 루와 헤어진 후 일 년 남짓 동안 니체의 심정이 어땠을까? 니체는 다른 여자에게서는 품어 본 적이 없는 열렬한 애정을 루 살로메에게 바쳤다는 것과 그녀가 조용히 떠나가 버렸다는 것에 크게 상처받았고,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니체는 루와 레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의 폭발하는 과대망상증과 상처받은 허영심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마시오. 설사 내가 격한 감정을 못 이겨 어느 날 자살을 하더라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나의 공상이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저 나는 결국 고독에 빠져 완전히 정신이 돌아 버린 반미치광이라는 것만 명심해 두시오.”


  니체에 대해 미련이 없지 않았던 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존심 강한 루는 오랜 친구인 ‘에른스트 파이퍼’에게 니체와 몬테사크로 숲에서 키스를 했다고 털어놓았지만, 그녀의 회고록에서는 이 내용이 빠져있다. 이것으로 두 사람 사이에 정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대해서 상상하게 된다.

   니체는 철학자요 예술가였기에 자살을 택하는 대신 고독의 고통을 창작으로 돌렸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작품을 열흘 만에 완성했다고 하니 그의 광기와 열정이 이룩한 성과물이다. 루에 대한 충격인지 이 책에는 에로틱한 이미지들이 넘쳐나며, 결국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여자는 우정을 나눌 능력이 없다. 고양이고 새고 기껏해야 암소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루에 대한 복수가 될까?

  11월을 닮은 남자가 들려주었던 니체의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말을 끌어안고 쓰러진 후 니체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는 정신적으로 붕괴된 채 11년을 더 살다가 생을 마쳤다. 니체는 11년 동안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머물면서 살아있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니체가 매독으로 몸과 정신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 죽었다는 것은 깊숙한 곳 어딘가에 감추어두고 싶다.

  철학자이자 천재적인 작가에서 인격이 결여된 광인으로 11년을 살았던 니체는 루에 대한 한 조각의 기억도 되새길 수 없었음이 가슴 아프다. 그들의 사랑에 대해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니체는 루와 단 한 번의 키스로 그렇게 열에 들뜬 듯 광기에 사로잡혔을까? 아, 난 중년 여성이 가지는 관음증 환자일까? 그들의 사랑에 왜 이렇게 호기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사랑의 방식에 서툰 철학자 니체에게 일어난 순결한 사랑의 열병이었기에 애잔한 마음이 남아있다. 살아서는 가난에 쫓겨 추운 겨울에 난방도 없이 찬 방에서 지냈건만, 죽어서는 온갖 찬사를 듣는 니체에게 국화 한 송이 보낸다.   

  그러고 보니 11월을 닮은 남자는 또 다른 니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니체를 흠모하다 니체가 짊어지고 있던 고뇌를 이어받았을 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 쌓인 산을 바라보는 11월에, 많이 가난해지는 11월에, 눈 내리는 11월엔 니체를 읽기에 좋은 달이다. 니체를 읽되 니체를 좋아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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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2 13:39:52 *.51.145.193

아, 그랬구나. 니체를 읽으며 두줄 박박그은 부분이 있는데

니체가 말을 끌어안고 연민을 느꼈던 인간인 줄은 몰랐습니다.

 

'동물도 인간에 뒤지는 일 없이 그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동물도 자유롭게 뛰어다녀도 좋다. 그리고 친애하는 인간이여, 그대도 결국 동물이다. 어떻게 표현해도 그렇다. 나는 이것이 당면한 문제의 도덕이며 남국적인 인간성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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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10.22 22:06:24 *.85.249.182

니체는 참으로 연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때 니체는 말에게 내리치는 채찍을 온 몸으로 맞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한 것까지도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이었으니

연약한 사람이 살기에 이 세상은 너무 거칠고 험난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니체를 읽는 내내 생각햇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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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2 15:04:40 *.196.23.76

와! 니체가 사랑한 살로메가 21살이었구나. 니체는 37살이었고.

여신님 글을 통해 니체에 대해 더 알게 되었어요.

사실 책은 읽었지만 뭔말인지 모르고 있는 제게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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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10.22 22:10:11 *.85.249.182

세린 고마워.

나도 이해하는 부분은 이해하고 못하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그렇게 읽었어.

니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햇단다.

우리는 사회라는 틀에 맞추어서 살려고 노력하고,

니체는 사회라는 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 사람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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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10.22 22:12:38 *.85.249.182

살로메의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나>는 자전적인 소설이죠.

저는 오히려 살로메 평전을 읽고 살로메를 알게 되었어요.

니체를 접근하는 방법으로 '사랑' 을 택하는 것이 가장 쉽다고 생각했어요.

독자들이 재미를 느낄 것 같기도 하고요.

올리브의 무한한 발전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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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3 17:41:48 *.114.49.161

여신님의 사랑이야기는 흥미진진해요. 단숨에 읽었어요.

루 살로메의 자전적 소설을 읽으셨군요.

우와!!!! 언제 그런 걸 다 읽으셨대요?

 

제임스 조이스 버나클이 궁금했을 때도 여신님의 글에서 읽었지요.

앞으로도 작가의 사랑 이야기를 언제나 빠뜨리지 않고 다루실 거라는 기대가 있어요.

 

쓰실 사랑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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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10.24 02:59:11 *.85.249.182

콩두의 관심과 댓글이 깔에게

큰 힘이 된단다.

옆에서 이렇게 뜨겁게 응원해주니

저럴 힘이 나네.

니체 책이 힘들면 루살로메의 책을 읽었는데

굉장히 얇아서 그냥 술술~~ 읽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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