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에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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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두려워 마라.
산과, 그리고 인간이 사는 사회 사이에는 꽤 넓은 강이 흐른다. 사회는 산을 침해하지 못하고 산은 인간 사회의 사태들에 동요하지 않는다. 인간의 시간은 산의 호흡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산의 들숨으로 평안을 찾고 날숨에 엎드린다. 일출, 일몰, 그리고 가끔씩 연출하는 산과 우주의 드라마는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 인간은 그런 무한의 공허를 바라보는 일을 또한 두려워한다. 한편, 인간은 산을 이해할 수 없으나 산은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인간의 원시가 살아있는 곳이며 인류의 신화적 동경을 품고 있는 곳이 산이다. Axis mundi! 제 사는 야트막한 뒷산의 신화적 가치는 세계의 중심이 그곳에서 비롯됨을 역설한다. 유한을 인식함으로 무한을 가늠하듯 존재 너머의 무엇은 인간이 인간의 시간을 극복해야 함을 산을 통해 힌트 내린다. 산과 인간, 건너지 못할 그 큰 강물의 크기를 가늠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과제로 넘어온다.
산이 가진 열쇠는 탈인간, 탈시간 이다. 신의 존재를 역설한 김용규 선생이 말한 변화와 시간과의 관계를 산과 인간의 관계로 조금 비틀어 표현하자면 ‘산은 탈인간화된 자연의 모습이며 인간은 탈자연화된 모습의 산’이지 않겠는가. (남의 말을 빌려 가져다 쓰는 일은 이렇게 위험하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거친 비유가 되어 버린다.) 인간의 시선으로 산을 이해할 수 없다면 구만리 장공에서 붕새를 타고 노니는 장자적 시선을 빌려보자. 우주의 가장 왼편에 무한의 퍼텐셜을 놓아보고 가장 오른쪽에 유한의 인간을 놓아본다면 그 사이 어딘가에 산이 자리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가장 오른편의 인간이 제 존재의 연원을 알기 위해 시간을 무한 소급하는 과정에 최초의 진공이었던 퍼텐셜의 상태로 가는 그 언저리에 산이 걸리적 거릴 수 있다는 이야기겠다. 결국 산의 시간을 이해하는 일은 인간이 ‘존재’를 인식하는 교두보가 되는 셈이다.
산과 인간을 엮어보려, 그 사이에 흐르는 거대한 강물의 크기를 조금은 매꿔 보려 무리한 억지가 동원되었지만 결국 둘은 떨어진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게다. 오래고 광막한 시간의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이리도 그리워하는 것은 분명 둘 사이 이어진 ‘같은 존재’에 대한 운명의 끈이 있어서다. 산이 없으면 허전해서 살지 못하는 나 같은 인간이 있는 한은 이리 엮어두고 싶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허전함을 채우려 끊임없이 비벼대며 오르고 산은 인간의 땀을 받아내며 둘은 합일의 경험을 치른다.
그런데 19세기 산의 황금시대 (전에 없던 고봉의 답파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대를 말한다. 인간이 분류한 산에 대한 천박한 시간적 구분이다) 를 살았던 프랑스 산악인 에밀 자벨 emile javelle이라는 사람도 나와 같이 실없고 한가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존재가 부여한 이 과제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는 말한다.
시간이 상처 입힐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대에게는 필요하다. 서슴지 말고 걸어가라. 그대는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다.
조잘대던 나는 다시 입을 닫는다. 곱씹어 보니, 이 짧은 세 문장이 나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어퍼 컷이었다. 에밀 자벨의 말은 수천 미터 솟아있는 설산의 준봉들과 깎아지른 검은 빙벽, 겁에 질릴 듯 압도하는 봉우리의 위용 앞에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최소이며 최대다. 나는 자벨의 말을 ‘인간이 현세를 ‘탈세계’하여 과감히 산을 향해 걸어 들어 간다면 시간 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했다. 이로써 모든 것은 명징해진다.
단지 평지에서 지각운동으로 솟아오른 것에 지나지 않는 산에 필요 이상의 과도한 의인화는 경계해야 하며 인간의 사회적 습속인 정치, 사회적 가치가 산에 덧씌워지는 일은 볼썽 사나운 일이지만 나는 이제 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가 익숙해 마지않던 사회적 사유를 중단하기로 한다. 적어도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회를 벗어나는 노력은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세계에서 벗어나고 사회에서 벗어나라.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자. 이것은 도피하는 폐잔병의 모습이 아니다. 적극적 일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들어가는 영혼 수호의 방편이다. 남들과 비교하고, 있어 부러워하며 없어 부끄러워하는 일련의 의식들을 지워버리자. 저도 모르게 경쟁에 익숙해져 있는 삶의 양상들은 적어도 오르는 자의 내면에서는 설 자리를 잃게 해야 한다. 힘들면 쉬어가고 무거우면 내려놓고 오르는 자 내려오는 자, 서로간에 일면식 없어도 인사하며 향기로운 미소를 건네자. 제 살기 위한 생각들로 공고하던 감정의 옹벽들은 흐르는 땀과 함께 씻어내자. 사람아, 두려울 것 없다. 산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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