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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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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1일 11시 28분 등록

 

<이번부터 저의 글쓰기의 주제는 그냥쓰기입니다. 부제나 목차 없이 떠오르는 장면을 일단 써본다라는 생각으로 쓰는 글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그래서 #1 입니다.>

 

 

길수야!

 

배추부침개 할건데 먹으러 올래?

 

엄마의 전화다. '배추부침개 먹으러 올래'는 엄마가 나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스물 여섯에 결혼을 하고 지금은 오십이다. 곁을 떠난 딸이 보고 싶을 때면 전화를 해서 하시는 이야기이다. ‘보고 싶다라는 말은 하지 않으신다. 시간이 맞아서 갈 때도 있고 가지 않을 때도 있다. 결혼을 한 후 3년 정도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내 집이라는 느낌이 확실하지 않았다. 누가 나를 불편하게 한 것도 아니고 시챗말로 시집살이를 시킨 것도 아니지만 어딘가 남편하고 사는 집은 낯설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에는 작은 무거움이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잘 모르겠다. 적당한 표현을 내가 하지 못하는 거다. 26년 동안 살아온 공간을 떠나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이제는 이곳이 나의 집이라고 생각하며 남편이 살고 있던 집으로 들어갔다. 친정집에 대한 특별한 그리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살갑지 않는 남편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남편은 적당히 부드러웠지만 그리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본인은 늘 주장하지. 착한 사람이라고. 착한 사람이란 단어는 좋은 단어가 아니다. 일단 내 기준에는 그렇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익숙하지 않은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까. 두고 온 가족이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인가.

 

나는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일명 중매 반 연애 반 이다. 나의 아버지는 한약상가가 밀집해있는 곳에서 부자재를 파는 일을 하고 계셨고, 같은 동네에 친구처럼 지내던 어르신이 계셨는데 그분은 연탄배달 일을 하는 분이었다. 자신의 연탄가게가 세 들어 있는 주인집아들을 아버지에게 소개 시겼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아버지는 약속을 잡아서 내게 알려주셨다. 내 나이는 25, 야간대학을 졸업한 다음해이다. 소개를 받은 남자는 대학 졸업반이라고 했다. 자그만 아파트도 한 채 마련해놓았다고 했다. 내 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매조건에는 나쁜 조건은 아니다. 제기동에 있는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다. 위치는 생각나지 않지만 한약상가가 많은 동네라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는 다방이었다. 우리의 맞선자리는 객이 많았다. 전형적인 동네 다방에는 낮은 탁자와 소파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의 부모와 작은아버지 큰엄마 우리 쪽에는 이렇게 5, 상대편은 맞선보는 당사자와 그의 부모 그리고 그의 큰어머니, 고모 5명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렇게 10명이었다. 요즘처럼 간단한 소개팅 정도의 자리가 아니라 온 가족이 총 출동한 그런 자리이다.  25의 앳된 남자가 앉아있다. 커피가 배달되어왔다. 맥심커피였을까? 둥그런 접시에 나즈막하고 하얀 커피잔이 놓여있다. 프림과 설탕 그릇도 함께 왔다. 커피잔 손잡이 앞에는 작은 스푼이 놓여있다. 앞에 앉는 남자는 한약 같은 검은 커피에 프림 두 스푼과 설탕 두 스푼을 넣는다. 프림그릇에서 커피잔까지의 거리는 50센티 정도 될까. 그보다 더 가까웠을지 모른다. 그 짧은 거리를 프림을 옮겨오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라도 되는 것일까. 이 남자는 프림을 줄줄 흘린다. 떨고 있다. 수전증이 걸려있는 노인도 아닌데 말이다. 스물 다섯이면 나는 입사6년차 였다. 회사생활 6년이란 시간은 더 이상 순진한 여자인 채로 나를 남겨두지 않았나 보다. 앞에서 떨면서 프림과 설탕을 커피잔으로 옮기고 있는 이 남자에게 관심이 갔다. 편하지 않은 자리인 것 만은 분

명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삼십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정해진 수순에 따라 어른들은 모두 자리를 비켜주셨다. 너른 다방에 우리 둘만이 남았다. 처음 만나서 대면 대면한 상태에 너른 공간은 불편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식사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방을 나와서 한약상가 골목을 따라 걸어내려 오다가 왼편 2층에 있는 경양식 집으로 올라갔다. 음악은 조용했고 다른 자리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안정감이 있는 곳이었다. 입구가 보이는 곳에 내가 자리를 잡았다. 앉아서 보니 내 자리에서 도로에 접해있는 유리창이 보인다. 이층이라 지나다니는 차량은 보이지 않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삼,사층 짜리 건물만 보였다. 높은 건물이 많이 있는 곳이 아니다. 내 시야에 유리창과 맞은편 건물, 그 위로 하늘이 보였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제기동전철역 출입구 계단이 보이고 청량리 미도파 백화점의 앞 마당이 보인다. 맞은편의 남자에게 집중을 안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네...생각해보니 그렇다. 오늘 맞선을 본 남자. 다방에서 커피잔에 프림과 설탕을 넣으며 떨던 남자. 이런 만남은 사전에 정보가 많다. 학교는 어디를 나왔으며 가족은 어떻게 부모님은 무얼하시며...이런 것들은 이미 들은 터이다. 다음의 대화꺼리가 없을 때는 주변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앞에 사람을 앉혀놓고 딴짓을 하는 것은 예의가 이니지만 말이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이 남자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다음해에 우리는 결혼을 하고 지금도 나는 이 남자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부모로부터 분가를 하고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 결혼에 대하여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혼자 살아본 경험이 없다. 여행을 혼자 다니기는 해도 혼자서 살림를 해 본 적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들어가고 삼수를 해서 대학을 진학하고, 졸업하던 해에 전직고시라는 이상한 시험을 봤다. 주경야독. 맞다 삼수를 했으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부터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입시학원엘 다녔다. 재수 첫해에는 회사일을 끝마치고 학원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으면 그때부터 졸기 시작한다. 한참을 졸다 깨다 하면서 무거운 눈꺼풀과의 싸움이 끝나갈 무렵이면 수업은 벌써 반은 지나간 상태이다. 반은 자고 반은 공부하며 일년을 보냈다. 학력고사를 보았다. 시험을 보고 나서 내가 든 생각은 입시원서를 들이밀어볼 학교가 없을 것이란 것을 생각이다. 사실 열심히 공부를 하지 못한 것도 맞다. 신입사원으로의 피곤함이 저녁시간의 졸음과의 사투로 바뀌었다. 다음해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첫해보다는 훨씬 나았다. 회사 일도 손에 익어가고 회사에서 잡무처리나 공식행사에도 과감하게 빠졌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주의 깊게 듣지 않고 흘려버렸다. 이것저것 모든 것을 다 챙기면서 공부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행인지 일년의 회사생활이 지나면서 지점을 옮기게 되었다. 새로 개점하는 곳이라 잡무가 좀 덜했다. 요즘 같은 온라인 시스템이 아니라 모든 것이 수기로 업무를 보던 시절이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지점에는 그 만큼 복잡한 업무가 있기 마련이다. 낮 시간의 일이 조금 수월해지니 저녁시간의 공부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과정에서 배우지 못한 수학은 넘지 못할 벽이었다. 빼곡한 책상과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가며 앉아서 수업을 했다. 학원에 의자는 왜 이리 작고 좁다란지.... 맨 앞자리에서 분필가루를 마시며 공부를 했다. 수학은 거의 포기상태였고 영어도 비슷한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과목에서 만점을 받지 못하면 왠 만한 대학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상황이겠다. 할 수 없다. 들어도 알아듣기 힘든 과목을 가지고 끙끙거릴 시간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과목만 열심히 하자' 로 전략을 바꾸었고 아주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야간대학을 갈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이 나와주었다. 학원에서 입시상담을 하고 내 성적에 갈 수 있는 학교를 골랐다. 전공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지 모른다. 아무 대학이나 아무 전공이나 그저 학사학위가 중요했었나 보다. 그렇게 정해진 학교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이다. 나는 어학인지능력이 좋지 못하다. 그런 사람이 그것도 아주 생소하면서도 어렵기로 소문난 아랍어과를 선택했다. 순전히 학교하나 보고 진학결정을 한 결과이다.

 

회사에 입사하고 몇 달의 근무 끝에 나는 대학을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 학력은 어디에도 내 밀수 없다는 현실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인생을 열심히 살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밑에서 그들이 시키는 일만 하고 살기에는 내 성향은 맞지 않았었다. 사무실에서 선배들과 다툼도 심심챦게 일어났다.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일년도 채 다니지 않은 상태에서 퇴직을 고려하게 되었다. 낮에 일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해보니 도저히 당시 상황으로는 진학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열심히 입시 준비해서 진학하고 또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받아서 학교다니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엄마를 조르기 시작한다. "나 회사 안 다니면 안돼?" 당시에 엄마가 내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회사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라고 하신 것 같다. 계속해서 조르든가, 내 주장을 꺾지 않았다면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걸 보면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실업고에 진학을 했다.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의견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집안 형편은 일반고를 보내서 대학을 꿈꾸기에는 역부족상태였다. 고등학교를 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엄마 혼자서 가내수공업으로 생계를 꾸리던 시절이다. 같은 동네 친구들 중에는 중졸이 학력인 친구도 꽤 되었다. 그나마 학업을 놓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상황. 중학교 선생님과 진학상담을 통하여 신당동에 있는 실업고에 원서를 넣었다. 연합고사를 보던 시절. 나름 괜챦은 상고는 일반고보다 성적이 우수해야 진학하던 때이다. 당시 일반고는 대학진학을 하기 위한 학생들과 상고나 공고를 들어갈 실력이 되지 못한 학생들이 함께 진학했다.

 

중학교는 걸어서 다녔었다. 좀 멀기는 해도 걸을만한 거리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는 걸어갈 수 있는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30분에 한번씩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50분 정도의 시간을 타고 가야 했다. 다행히 한번에 학교부근까지 가는 버스노선이 있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내게는 큰 고역이었다. 차 멀리를 많이 하는 학생이었다. 배차간격이 멀어서 한대의 버스를 놓치고 나면 낭패인 상황이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는 태릉쯤에서 내렸다. 길 모퉁이 후미진 곳에서 아침에 먹은 것을 확인하면서 쭈그리고 앉아있곤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고. 몇 달이 지나니까 멀리는 좋아졌다. 고등학교진학 후에 일년 반은 놀았고 일년 반은 공부를 했다. 놀았던 기간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주산 부기 타자로 구성된 학교수업이 흥미가 없었다. 재미도 없었고 의미도 없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당연히 성적은 바닥을 기었고 그렇다고 용기를 내서 다른 짓을 하지도 않았다. 2학년 중반 정도부터 학과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고, 그 친구를 따라 학원을 가기 시작했다. 방과후에 열심히 실기학원을 다니면서 그 동안 뒤져진 자격증을 보충했다. 졸업 즈음이 되니 나의 내신성적은 중위권 정도가 되었다. 학교성적으로 취업을 하던 시기에 나의 성적은 좋은 직장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좋은 직장이라 하면 일 순위가 금융기관이었다. 여자로서 안정되고 무난한 직장이란 인식이었다. 국책은행을 제일 선호했다. 성적이 전교에서 1~2%수준에 있어야 갈 수 있는 회사여서 꿈도 꾸지 못할 상활이었고, 다음 순위를 생각해도 만만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82년 당시 대한민국은 고도성장중인 나라였다. 상고나 공고를 졸업하면 취업은 걱정이 없던 시절이다. 아주 형편없는 학교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무난하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때였다.

 

운이 좋았던 나는 투자신탁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까지 학교성적으로 직원을 뽑다가 조직이 갑자가 확장 되던 시기였는지 한 해에 두 번 신입사원을 뽑았고 나중에는 시험으로 직원으로 선발했다. 내신이 좋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어렵사리 구한 입사원서로 시험을 보고 일을 구하게 되었다. 대기업보다 처우가 좋았던 회사이다. 어떤 일을 하는 회사인지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선택한 일이다. 은행은 아니었지만 제2금융권이란 곳은 당시 은행보다 월급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근로자에게 급여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투자신탁에 입사원서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내게는 큰 행운인 상황이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 회사에 입사할 때 모두 엄마의 판단이 나의 길이 되었다. 취업을 하고 재수를 하고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월급봉투는 모두 엄마에게 드리고 용돈을 받아서 생활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던 시기이긴 했는데, 유독 나는 엄마 말에 특별히 항의를 해보거나 한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때까지는….

 

얇지 않았던 내 월급봉투가 나의 가족생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도 사실이다. ‘없는 살림에는 맏이가 살림밑천이다라는 말이 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는 나는 대학을 가겠다고 회사에 다니기 싫다고 징징거리면서 살았다. 아주 나중에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철이 없는 딸이었는지를. 대학졸업 후 2년 만에 결혼을 하면서 엄마로부터 독립을 한 것인데, 당시 내가 마음 한 구석이 그리 개운하지도 산뜻하지도 않았던 이유 중에는 월급을 엄마에게 가져다 드리지 못한다는 사실도 조금은 차지했던 것 같다. 결혼즈음에 친정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 나오기를 고대하는 딸도 있지만 못내 아쉬워서 분가를 못하는 딸도 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만기가 된 재형 저축금을 엄마에게 가져다 드린 것을 보면 나의 독립이 미안한 마음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던듯하다.

 

나의 엄마가 나에게 짠한 마음을 가지고 있듯이 나 또한 엄마에게는 엄마로서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를 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다.

 

2011 1231 백사마을에 다녀왔다. 백사마을, 나의 고향이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나는 첫돌이 지나고 서울로 올라왔고, 백사마을에 살기 시작한 것은 서너살 때부터 라고 한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고 명명되어지는 곳. 서울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 이곳을 요즘은 백사마을이라고 부른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이곳을 찾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19살까지 살다가 나온 마을이다. 나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보냈던 곳이니 마음바탕 대부분이 이곳의 기억들이다. 첫사랑도 그곳에서의 추억이고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할 때까지, 그러니까 미성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유년의 모든 기억은 이곳에서였다. 떠나오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 한동안은 잊고 싶었고 잊고 지냈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은 자꾸 나는데 가 볼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간간히 엄마로부터 소식은 듣고 있었다. 지금도 엄마는 그 동네 아주머니들과 친목모임을 하고 있다. 누구네 누가 이랬다더라. 그 집 어르신은 벌써 돌아가셨다. 네 친구인 누구누구는 지금 뭘하고 있다더라. 아주 가끔씩 들려주는 이야기들 속에 내 어린 시절이 담겨 있었다. 특이한 것은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거다. 국민학교때 살던 아카시아나무집 뒷집에 병국이라는 키가 큰 아이가 살고 있었고, 그 아카시아나무집은 골목 끝 막다른 집이었다. 하늘과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집. 봄이면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를 듯이 진동하던 곳이다. 우리가 살던 방 뒷 편으로 병국이네 집이 있었고 그 뒤로는 교회가 있었다. 해질녘까지 그 교회마당에서 아이들과 사방치기, 구들치기, 자치기, 공기놀이 등을 하며 놀았던 곳. 우리가 세 들어 살던 그 집의 주소는 63반이다. 같은 블럭에 세 집 아래쪽에 내가 기억하는 또 다른 아이집도 있었다. 마당에는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그 아이의 누나는 쌍둥이 였고 그 누나들은 자주 싸우곤 했다. 백사마을에서 처음으로 우리집을 사서 이사를 한 곳은 45반이다. 엄마가 일터에 계신 시간에 나와 동생들은 밖에서 놀다가 해가 질무렵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끔 방에서 놀 다 보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찾아오곤 하셨는데 방에서 그렇게 뛰면 방구들이 내려 앉는다고 잔소리를 하고 돌아갔다. 그 집에서 내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막내의 생일은 음력으로 814일이다. 다음날이 추석이다. 가을볕에 한참을 놀다 와 보니 엄마가 출산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막내는 줄곧 내 등에 업혀있곤 했다. 집에서 일을 하던 엄마는 내 등에 동생을 업히고 포대기를 묶어 주셨다. 그 상태로 길가에 앉아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다 보면 동생은 땅에 있는 흙을 집어먹곤 했다. 한참을 정신 없이 놀다가 일어서려는데 등에 업혔던 동생이 포대기아래로 빠져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린아이들은 머리가 무겁다. 떨어지면서 이마를 모래 바닥에 찧었다. 굵은 모래가 이마에 박혀버렸다. 피를 흘리고 있는 동생을 엄마가 안고 동네약국을 찾았다. 백사마을에는 병원이 없다. 약국도 시장 통에 딱 하나 있었다. 약사아저씨가 핀셋으로 동생의 머리에 박힌 모래를 꺼내주셨다. 지금도 남동생의 이마에는 그날의 훈장이 남아있다.

 

백사마을은 그린벨트지역이다. 수 십 년 동안 개발이 묶여 있는 곳. 이곳은 내가 살던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대부분의 집은 담이 없고 골목 골목에는 낮은 천장과 곧 쓰러지기 직전의 집들이 옹기종기 있다. 골목은 사람하나 지나다닐 정도의 크기이고 눈이오면 도로에는 염화칼슘이 아니라 연탄재를 사용한다. 서울시에서 지난해에 재개발에 착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제 백사마을을 볼 수 없을 거란 뉴스가 나왔었다. 마음으로 늘 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매번 무슨 이유인지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다가 이런 뉴스가 나오니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왜 그곳에 엄마와 같이 가고 싶은 걸까. 혼자는 왜 나서지 못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그 곳에 뭐 볼 것 있다고 갈라고 그러냐?" 이러시면서 동행할 생각을 안 하신다. 연말에 카메라를 챙겨 들고 엄마 집을 찾았다. 오늘은 꼭 가보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던 길이다. "엄마! 내년에는 104번지가 개발이 되어서 없어진대. 그러기 전에 가보자..." 몇시간을 턱밑에 앉아서 설득한 끝에 엄마는 움직이셨다. 백사마을 뒷편 언덕 밑에 차를 세웠다.

 

낮이고 추운 날씨라 동네는 횡 했다.

먼저 63반의 위치를 찾았다. 절반은 도로가 점령했고 나머지 절반은 집들이 그대로 있었다. 내가 살던 아카시아나무집은 헐려서 아래로는 도로가 지나가고 그 자리는 정자가 하나 있다. 혼자 갔더라면 아예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자에 앉으시며 "이곳이 우리가 살던 그 아카시아나무 집이란다." 엄마의 말이다.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며 예전 앞집 옆집이야기를 해 주신다. 자그만 골목길을 오른쪽으로 가로지르면 작은 도로가 나오는데 그곳은 삼거리이다. 삼거리 한 코너에는 담뱃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다른 한 코너는 구멍가게가 있었고 나머지 한 코너가 나의 외삼촌댁이었다. 국수집을 하고 계셨다. 국수, 수제비를 많이 먹은 탓에 나는 지금도 일부러 국수를 만들어 먹지 않는다. 성년이 되고도 한참은 아예 먹지를 않았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먹고 싶어서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평생먹고 남을 만큼의 양을 그때 다 먹었을 게다. 예전 담뱃집을 끼고 우측으로 올라가면 구로에서 철거민으로 백사마을에 들어 올때 처음 정착했던 집이 있다. 그 위치는 나도 가보니 알아볼 수 있겠다. 군용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부엌바닥이 깊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 몰래 설탕물을 타 먹겠노라고 찬장에서 설탕을 찾다가 찬장에 매달린 채 부엌바닥으로 엎어진 적이 있었다. 바닥이 깊던 부엌이라 나는 밑에 깔렸지만 무사했다. 내가 찾던 하얀 설탕은 사실은 미원이었다고 했다. 천막을 쳤던 집을 뒤로하고 언덕을 올라가다가 왼편 샛길로 접어들면 사십만원에 샀던 45반 우리가족의 집이 나타난다. 주인 아주머니의 핀잔을 들으며 지내던 국민학교시절을 생각하며 우리집이 생긴다고 하니 가슴이 마구 뛰었었다. 아마 내가 중학교3학년 때로 기억된다. 엄마로부터 이사를 할 것이고 세 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집을 샀다고 해서 엄마 몰래 가보았다. 기대했던 파란대문은 보이지 않았다. 언덕에 있는 집이라 왼편담장은 언덕이 구실을 하고 있고 오른쪽 담장은 밑에 집이 낮은 위치라 없어도 자연스럽게 담장같은 상황인 집이다. 입구에 재래식 화장실이 하나 있다. 마당을 가로지르면 일자형 집이 보이는데 가운데가 부엌이고 양쪽에 방이 있는 구조다. 그나마 방 한 칸은 세를 주고 한 칸만 우리가 쓴다고 한다. 우리식구가 쓰는 그 방에는 다락방이 딸려 있었다. 그곳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긴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엉금엉금 기어야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매우 가슴 뛰는 일이다. 얇은 베니어합판으로 바닥을 대었는지 바닥을 기다 보면 바닥이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었지만 아주 추운 겨울이 아니면 나는 그곳에서 지내곤 했다.

 

지금도 그 집은 그대로이다. 예전에는 마당이 넓었는데 그것은 내가 몸집이 작을 때 봐서 그런 것 같고 그린벨트에 주택에 손을 대지 못하는 상황때문인지 지붕에는 온갖 종류의 덮개가 덧 쒸어져 있었다. 내 기억에는 집보다 마당이 훨씬 넓어서 그곳에 배추 무우 호박 고추 같은 것을 심어서 먹던 곳인데 지금은 마당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유일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45반의 그 집 뒷길로 나오면 다른 블럭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중학교시절 소미를 사서 먹던 구멍가게였는데 지금은 가게는 없고 가게의 흔적은 그대로 있다. 벽을 대신하는 커다란 유리문이 있고 그 문에는 전면을 가리는 커튼이 쳐져 있다. 구멍가게의 유리문은 그 안의 상품진열상태를 보여주기 위한 디자인이리라.

 

그곳에서 방향을 틀어 동네 입구 쪽으로 내려오면 시장이 있다. 중학교 졸업식을 하고 엄마하고 먹던 짜장면 집이 있던 곳도 그곳이고 시장에 좌판을 펴고 수저 등 주방용품을 팔던 곳도 그곳이다. 남동생의 머리에 박힌 모래를 꺼내주던 약국이 있던 곳도 그곳이고 당시 제일 번화했던 골목이다. 지금은 약국도 짜장면 집도 없어졌다. 아직 기름집은 남아있고 닭 집도 남아있다. ‘생닭있음이란 글씨가 가게 유리창에 붙어져 있다. 이제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다. 다시 담뱃가게와 외삼촌댁이 있었던 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예전에는 공중화장실은 없었는데 지금은 몇 군데 화장실을 설치해 놓은 것이 보인다. 그것 말고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변했을까. 삼십년 이상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는 이도 다 바뀐 것은 아니다.

 

요즘은 이곳 백사마을을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한테 매력적인가 보다. 1960년대 개발을 위한 방편으로 철거민이 발생하고 그들을 집단이주 시켜놓은 곳이 이곳이다. 아직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살림살이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지금은 40%가 빈집이라고 한다.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아마 대규모의 개발은 하지 않을듯하다. 전면철거방식이 아닌 기존 것을 살리는 방향으로 재개발을 한다고 하니...언제고 찾아갈 곳으로 남을 것 같기는 하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내 기억에는 없는, 엄마의 기억 속에만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 어 시간의 투어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백사마을을 찾을 때는 큰 아이를 데리고 갔다. 여기서 어디야? 아무런 설명 없이 동행한 터라 이렇게 묻는다. 응 엄마가 예전에 살던 곳. 2012년의 백사마을은 전년도보다 더 추웠다. 겨울이 추운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유난히 추운 날이 많은 겨울이다. 같은 장소에 차를 세우는데 눈이 많이 와서 바닥사정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골목길은 연탄재를 깨트려놓아서  미끄럽지는 않았다. 차를 주차하는 곳은 마을 뒷 편의 산자락이라 아무런 조치도 취한 흔적이 없다. 다행히 어떤 차가 밤새 세워두었다가 아침에 빠져나갔는지 한대의 차가 주차할 만큼 네모나게 바닥의 흙이 드러나 있다. 그 곳에 차를 세우고 아이에게 카메라를 주고 투어를 시작했다. 지금은 잘려 나가고 사라져 버린 아카시아나무집을 설명해주고 골목을 끼고 블럭을 옮기면서 옆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이 걸을 수 없는 길이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다시 삼거리 담뱃집을 설명해주고 처음으로 이주해서 자리를 잡은 천막집이 위치했던 곳에 위치한 알루미늄 대문집 앞에서 기념사진을 하나 찍었다. 고소미를 사먹던 구멍가게가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어 시장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는데 동네의 아저씨들 서너명이 연탄보일러위에 석쇠를 걸고 삼겹살을 굳고 있다. 연탄을 지필수 있는 곳이 두 군데인 보일러이다. 옆에는 하얀 알루미늄쟁반 위에 김장김치와 서울막걸리, 노란 막걸리 잔이 서너 개 놓여진 것이 보인다. 이제 막 요리를 시작한 모양이다. 석쇠에 누워있는 삼겹살은 아직 육즙이 나오지 않았다. "삼겹살에 한잔 하시려나 보다" 아이와 나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중인 아저씨를 조금 바라보다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약국과 짜장면 집이 있었던 시장 통을 돌아 메인 도로로 방향을 틀었다. 동네 중간에는 연탄을 기부 받기 위한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백사마을의 안내판도 세워져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처음에 투어를 시작한 그 곳에 도착했다.

 

동네라고 해봐야 지금은 천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판자촌, 달동네 모습 그대로이다. 한집 건너 한집은 빈집이고 유기견이 동네를 지키고 있는 곳. 굳게 닫혀있는 문틈 사이로 실내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간간이 골목길에 연탄재를 버리러 나오는 사람들. 연탄을 난방용을 사용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그의 가난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해준다. 동갑내기인 남편도 연탄을 갈아본 경험이 없으니 아이야 두말해야 무엇할까. 연탄을 피우는 방법, 아래 부분을 차지하는 연탄이 90%가량 타면 그 연탄을 아래에 넣고 새로운 연탄을 위에 구멍을 잘 맞추어 올려놓아야 한다. 자칫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불이 꺼져 버리거나 아래에 있는 연탄의 화력이 너무 세면 붙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가 한겨울 미끄러운 골목길의 훌륭한 염화칼슘역할을 하는 것도 설명한다. 연료비를 아껴야하기 때문에 연탄 아궁이 조리개를 잘 조절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말도 잊지 않는다. 연탄가게에서 집에까지 연탄배달을 시키면 배달료를 더 받았다. 배달료때문에 한꺼번에 여러장의 연탄을 주문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하루에 필요한 서너장의 연탄을 사서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경우에는 시간여유가 많은 아이들이 연탄을 사서 집으로 들고 간다. 한 장을 사는 경우에는 한장용 집게를 사용하거나 한쪽 밑둥에 매듭을 지운 새끼줄을 연탄의 정 중앙 구멍에 끼워서 들고 간다. 새끼줄이 운송수단이 될 때는 자칫 매듭을 잘못 묶어서 연탄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면 한나절 추위를 없애줄 연탄이 사라져버리는 거다. 연탄심부름의 최고 낭패다. 이미 아궁이에 들어간 연탄이 거의 다 타가고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면 무지하게 엄마한테 혼난다. 돈도 이중으로 들어가고 타이밍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집게로 연탄을 옮길 때도 손가락의 힘 조절이 잘못되어 연탄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빠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아직 피워보지도 못한 검은 연탄이 길가에 깨어진 상태로 나뒹구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이 먼저 생긴다. 아이고...아까워라.  피워보지 못한 청춘처럼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한 상태라 안타깝고 누군가가 저지른 실수로 곤란을 겪었을 상황이 가늠이 가기 때문이다.

 

다시 연탄소비가 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연료를 대체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달 동안 쓰는 기름값에 비하면 연탄보일러의 연료비는 착한 편이다. 66 주택을 기준으로 한 달 난방비는 기름보일러 50~70만원, 연탄보일러는 10~15만원 수준이다. 연탄 한 장은 배달료포함 소비자들이 450원정도 지불한다. 한 달에 50만원 정도의 난방비를 줄일 수 있다면 관리의 번거로움은 감수하게 된다. 연탄재배출량이 늘고 있다니 불경기에 유난히 추운 겨울은 빠듯한 살림살이에는 동장군이 미울 따름이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는 겨울이 추워야 한다고들 이야기한다. 추운 겨울은 의류나 겨울레저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한테는 호재다. 적당한 강설량은 이듬해 농사에서 좋다. 겨울의 제 맛을 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겨울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유난히 추운 날은 날씨에 투덜거리다가도 이런 날에 밖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겨우 출퇴근길에 춥다고 이리 호들갑을 떠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집에서 버스정류장, 지하철역까지 더 가깝게는 집에서 주차장까지 사실 하루 종일을 살아도 외부출입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아파트에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지하주차장으로, 자동차를 몰고 일터로 다시 건물의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사무실로. 매서운 겨울바람을 쏘일 일이 하루 종일 한번도 발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면서 아이가 묻는다. "근데 왜 달동네야? 글쎄..." 왜 그럴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달동네라고 부르니까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질문을 듣고 보니 궁금할법하다. "아마 달이 제일 먼저 뜨는 동네, 이런 뜻 아닐까. 보통 지대가 높은 곳 구릉에 자리를 잡은 동네를 이르는 것으로 보아 서산에서 떠오르는 달을 제일 먼저 보는 곳이라는 의미인듯하다." 아이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엄마가 같이 가자고 하니 그냥 따라 나왔을 것이다. 큰아이는 어딘가를 동행하자고 청하면 군소리 없이 따라 나선다. 이날도 그런 경우이다. 엄마가 살던 달동네를 함께 걸으면서 한나절의 문화체험 정도가 되었겠지. 내가 엄마와 걸으면서 당시를 회상하는 마음하고는 다른 경험 일 테니. 한사코 백사마을에 가기 싫어 하는 엄마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한다.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 곳일 게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있다. 동네를 둘러보고 난 후 함께 앉은 식당에서 엄마는 예전 이야기들을 더 이어간다. 40년이 더 지난 이야기지만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이 말은 시대에 대한 화도 아니고 스스로에 대한 화도 아니다. 지금은 생존해 계시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다. 누군가의 신을 대신 신고 걸어볼 수 없는 삶이다. 그래서 타인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엄마와 나의 아버지. 두 분의 삶이 내게 영향을 주었겠지만 지금 엄마가 말하는 화의 근원을 내가 얼마나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다. 한참 이야기를 하시다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서 뭐하겠니...하며 말을 끊는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들을께 하고는 주문했던 아구찜을 먹었다.

 

대체적으로 경상도 음식은 맛이 좋지는 않다. 친정엄마의 음식솜씨도 마찬가지이다. 그다지 탁월하지 않은 솜씨지만 그래도 엄마의 맛이란 것은 있다. 어린 시절의 입맛이 고스란히 내 DNA로 남아있어서 일 게다. 배추부침개, 필요재료 김장 통 배추, 밀가루, 소금, , 식용유, 간장(양념간장)음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치고는 매우 간단하다. 말이 그렇지 배추 한 통이면 된다는 말이다. 나머지 재료는 재료라 할 것도 없다. 아무리 가난한 집 살림이라도 있는 재료이다. 이렇게 간단한 재료로 만드는 것이지만 누구의 손맛이냐에 따라서 맛은 천차만별이다. 후라이펜에 식용유를 조금 두르고 씻어서 물기를 빼낸 배추잎을 두 장을 나란히 바닥에 깔고 묽게 개어놓은 밀가루를 배춧잎 위에 살짝 바른다. 배춧잎이 숨을 죽이기 시작하면서 식용유와 배춧잎 그리고 밀가루막이 조화를 이루어간다. 잠시 후에 뒤지개로 떨어지지 않게 뒤집는다. 뒤집은 후 밀가루를 다시 한번  배춧잎 위에 입힌다. 밀가루가 노릇하게 구워지면 꺼내면 된다. 커다란 접시에 한 장의 배추부침개를 그대로 올려놓고 양념간장과 함께 내어 놓으면 먹는 사람은 젓가락으로 찢어가며 먹으면 된다. 따뜻한 것도 좋고 식어도 그 맛 또한 괜챦다. 배추한통이면 부침개를 10장 이상은 만들 수 있다. 김장배추로 해야 제 맛이 난다. 배추의 달착지근한 맛과 밀가루의 담백한 맛이 어우러지고 양념간장의 고소함이 더해지면 한끼의 식사로 훌륭하다. 이 음식의 노하우는 밀가루와 물의 농도이다. 너무 되게 만들면 부침개가 두꺼워져서 맛이 없고 너무 묽게 만들면 부침개가 찢어져버린다. 서로 잘 어울리도록 적당한 농도의 밀가루 물 소금 그리고 배추의 조화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엄마는 배추부침개를 잘 만드신다. 이 맛이 생각나면 나는 가끔 전화를 한다.

 

"엄마. 배추부침개 안 만들어?"

 

"? 먹고 싶니. 와라 만들어 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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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2:14:11 *.9.168.103

어 ~ 나도 먹고 싶다 길수야..배추부침개

나도 행님이 보고싶으면..길수야 부치미 안만들어? 해야지...ㅋㅋ

 

오늘 같은 날 딱인데..

술술 잘 읽혔어

시간이 없어 건너뛰고 수원 다녀와서 마져 읽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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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2 07:26:46 *.229.239.39

글 읽으며 , 뭔가 했어~

 

이리 길게 글을 쓴 데는 이유가 있을거야!

글이 신 들렸나?, 아님 쌓였던 이야기가 봇물을 맞았나?

 

아마도 작가로 변신하기 위한 용트림이 아닐까?

 

 

"엄마. 배추부침개 안 만들어?"

 

"? 먹고 싶니. 와라 만들어 줄께

 

나에게도 친숙함이 느껴지는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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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2 11:28:18 *.217.210.84

일단쓰기용으로 쓴겁니다. 어떤글의 모습이 될지는 아직 저도 모르겠구요.

매번 제목, 목차, 주제가 바뀌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선정도 어렵고 해서

써보고 얼개를 잡을까 싶은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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