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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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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5일 07시 15분 등록

나는 최근 35년간 식물을 키워 본적이 없다. 시골에서 떠난 이후에 집안에는 화분 하나 없었고 사무실에 난이나 화분에도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선물로 들어온 책상화분도 죽어나갔다. 그 당시 나는 스스로를 식물을 죽이는 손을 가졌다고 여겼다.

 

2년 전 옥상텃밭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달라졌다. 묶은 텃밭상자를 정리하고 식물이 좋아하는 흙 상태를 만지면서 내 몸이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춘분과 곡우 사이에 씨앗을 뿌리고 새싹을 키우면서 그린핑거를 가졌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나는 또 다른 손을 가지고 있었다. 고고한 화초보다는 적은 정성에도 스스로 자라는 식물을 키우는 제주가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화초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은 촌스러운 나에겐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다. 사실 지금도 난을 비롯한 고급 도자기 속의 화초는 좋아하지 않는다. 까다롭기 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까이하기 힘든 도시아가씨 같다 

 

옥상 텃밭 가꾸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싹이 트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새싹을 모습을 지켜볼 수 있고 금새 풍성해지는 텃밭에 온갖 곤충이 날아오고 벌레와 사투를 벌이기도 하는 텃밭이 삶을 신나게 만들었다. 구경하고 애지중지 하는 화초가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옮겨 심으며 곤충의 습격에 같이 사투를 벌이는 사건들이 있는 곳이다. 옥상 정원은 우리집 옥상 정원은 꽃보다는 채소가 많다. 직접 보듬어 가꾸는 옥상텃밭은 숲속 산책을 다녀오는 것 보다 자연을 더 가까이서 느끼게 해준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자연의 속살를 보여줄 수 있다. 벌레가 식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물을 얼마나 자주 주느냐, 햇빛을 얼마나 잘 받는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식물의 변화를 실감나게 볼 수 있다.

 

한동안 우리딸과 나의 고민은 깻잎벌레였다. 어느날 넓은 들깨잎이 구멍이 나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자세히 보니 등에 갈색줄무늬가 나있는 작은 벌레가 있었다. 이녀석들은 깻잎의 여린 잎을 좋아해 앞으로 계속 자랄 가운데 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여린 깻잎을 뒤로 둥글게 말아 그물을 쳐 고정하고 그 안에 들어가 비를 피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벌레의 기생을 용인해 줄 마음이 있었다. 이 녀석들이 자라 힘이 생기니 사각의 들깨 줄기를 댕캉 잘라 들깨 한 포기의 목을 잘라버렸다. 이것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 싹을 틔워 키운 들깨인데!

 

고민에 빠졌다. 들깨벌레를 죽여 우리가 깻잎을 많이 먹을것인가, 들깨벌레와 같이 나누어 먹을 것인가? 열 살 난 작은 아이에게 의견을 물었다. 고민도 하지 않고 같이 나누어 먹자고 했다. 나는 벌레를 무서워해 더 커져 더 징그러워질 까봐 또 고민이 되었다. 작은 아이는 그럴 일은 없을 거란다. 아마 나비처럼 무엇인가로 변할 거라며 관찰해보자고 했다. 그러기로 했다. 벌레를 손으로 잡아 멀리 집성촌을 만들어주는 수모를 주었지만 그대로 두고 지켜보았다. 지금은 완전 깻잎이 피폐해졌다. 이것도 못할 짓이다. 넓은 잎을 펄럭이며 싱싱할 깻잎이 쪼그라들고 숭숭 구멍이 난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텃밭을 취미로 하니 망정이지 나를 먹여 살리는 농장이었다면 고민하지 않았으리라. 

작은 아이의 말대로 벌레는 계속 커지지 않고 황토색 나방이 되었다. 올해 우리 집 들깨 밭은 나방사육장이다.

 

정원을 직접 가꾸면 자연은 각별해진다.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아주 작은 벌레들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직접 기르고 가꿀 때만이 깊은 희열을 느낀다. 채소를 먹지 않던 아이들도 자신이 씨앗을 뿌려 키운 것은 먹는다. 봄부터 방울토마토, 그냥 토마토, 부추, 상추, 치커리, 쑥갓, 호박, 강낭콩, 해바라기, 분꽃, 고추, 오이, 패랭이꽃, 봉숭화, 나팔꽃이 봄부터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이 녀석들은 하나같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우리 집 옥상 정원은 지금 장마철을 지내며 초토화되었다. 잦은 비에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잡초가 점령했다. 놀라운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기에는 약하다.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더위가 한 풀 꺾이면 잡초들을 제거 하고 가을 농사를 준비할 것이다.

 

 

IP *.12.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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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6 17:01:08 *.153.23.18

오! 그린핑거! @@

저는 식물이 옆에 있는게 좋은데 채소는 실내에서는 안되더라구요. 가지, 호박, 오이가 안 달리고 진딧물만 끼고요.

대신 실내용으로 개발된 관엽식물들은 살아주고요.  

이 글을 읽으니 저도 옥상텃밭을 할 수 있는 집으로 다음번에는 이사를 가고 싶네요.

 

김서정 <동화가 재미있는 이유> 이 책 읽어보셨어요? 저도 안읽어봤어요. 함 읽어볼라구요.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2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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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6 20:38:02 *.168.23.50

딸들과 옥상 텃밭을 가꾸는 춘희씨 모습이 눈에 선해요. 도시에서도 여전히 아이들을 싱싱하게 기를 방법은 있군요.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이의 현명함을 글을 통해 보니 마음이 훈훈합니다. 나는 그런 걸 잘 못하니, 춘희씨 같은 이웃을 두었으면 좋았을텐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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