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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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제자하나가 저녁에 사과 몇 알을 들고 찾아 왔다. 자신이 키운 딱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서 딴 장수 사과란다. 함께 차를 한 잔 마시다 문득 인생의 날씨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천둥과 벼락이 뿌리 뽑듯 몰아치는 날도 있고, 청명한 가을 휘영청 커다란 달 같은 밤도 있다. 이 간단한 비유가 왜 그리 사무쳤는지 모른다. 그래, 내 마음이 하나의 우주이니 모든 격동이 그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달이 뜨면 이 세상의 모든 이슬에 달빛이 내려앉는다. 하나의 이슬은 자신 속에 온전한 달 하나를 머금게 된다. 나는 이슬에 불과하나 내 속에 온 우주를 껴안는다. 그러니 나는 하나의 소우주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모든 우주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는 평화로운 호수다. 나는 풍랑이다. 나는 두려운 번개이며, 고요한 숨결이다. 나는 온 우주에 흩어져 녹아들어 존재하며, 또한 나는 온전한 한 방울의 나로 분리된 듯 존재한다. 갑자기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묻고 있는 듯하여, 여기 하나의 설명을 첨부한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간단한 통 실험 결과를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우리가 분리된 개체가 아님을 보여준다. 실험도구는 안에 작은 원통이 들어가 있는 회전용 투명한 원통이었다. 원통과 원통 사이에는 글리세린처럼 점성이 높은 투명한 액체로 채우고, 이 속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잉크는 글리세린 속에 한 점으로 떠 있다. 이때 부착된 손잡이로 원통을 돌리면 잉크 방울은 가는 실모양을 그리며 서서히 글리세린 안으로 퍼져든다. 바깥쪽 원통이 안 쪽 원통 보다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잉크 입자들은 점점 엷게 퍼져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된다. 이제 손잡이를 아까와 반대로 돌려 보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사라졌던 잉크의 입자들이 다시 서서히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한다. 아까와 반대의 경로를 거쳐 한 점의 잉크 방울로 되돌아 온다.
데이비드 봄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잉크 방울은 여전히 질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잉크 방울이 가진 질서가 글리세린 안에 접혀 들어가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물리학에서는 그런 질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잉크방울을 하나의 고정된 존재 상태로 보지 않고 여러 번의 회전 속에 접혀 들어가 있는 작은 물방울의 조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란 결국 기본적으로 전체 속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국소적 방식으로 자신을 들어 내 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존재 자체가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
나는 한 방울의 잉크처럼 지금의 나로, 응결된 실체로, 가장 국소적인 방식으로 나를 표현하고 있지만, 또한 나는 온 우주에 여러 번의 회전으로 접혀져 들어가 있는 미세한 미립자로 나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속에 분리되지 않은 우주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날 불현듯 우주적 공명에 내가 떨림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기쁨에 내 영혼이 환호하는 이유도 그렇다. 숨이 멎을 듯이 아름다운 어느 풍광에 압도되어 오직 감탄만이 내 입술에 머물 때도 나는 우주적 존재로서의 나를 기억하고 있을 때 일 것이다.
나는 이제 겨우 깨닫게 되었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혀 온 근원을 알 수 없는 그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말이다. 나는 넓은 바다의 잔물결처럼 무수히 생각이 들고 나는 사람이며, 감정이 거친 격랑처럼 엎어지고 자빠지는 폭우같은 사람이다. 한 마디로 웃기는 짬뽕인 것이다. 그걸 50년도 넘게 데리고 살았으니 마음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이제 그게 또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물결들이 오히려 내가 글을 쓰게 된 연료였음을 깨달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마음의 평화를 구했으나, 그 또한 날씨와 같아 평화로운 날도 있고 그렇지 못한 날도 있다. 우주적 균형은 늘 살아 있는 균형이니, 하나의 균형이 무너질 때 이미 새로운 균형을 향해 움직이게 된다. 그것을 변화라고 한다. 하나의 균형 상태에서 또 다른 균형으로 이행하는 것 말이다. 변화란 결국 끊임없이 그 존재 방식을 바꾸어가는 삶의 본질인 것이다.
(change 21 원고)

통째로 배껴서, 새겨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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