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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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릉개, 우리 고향 동네에서는 흉내내는 이를 이렇게 불렀어요. 따릉개는 감자껍질 긁는 놋숫가락별명이기도 해요. 닳아서 반토막이 나기도 했었죠. 근데 남을 따라 하는 걸 좀 낮추어 부르는 느낌이네요. 중립적으로 보면 ‘창조적 모방’, ’롤 모델을 정해 보고 배움’ 정도 될라나요? 제가 생리를 좀 압니다. 흉내내기 전에 홀려서 눈을 맞추는 불꽃시기가 선행됩니다. 홀림의 시기는 홀릭의 단계로 넘어가고 그 대상으로 가는 눈길과 몰두가 광램급으로 납니다. 그러다 보면 모종의 유사전송이 일어나요. 제가 버퍼링이 느려서 배우는 속도가 늦긴 합니다만 구본형선생님 곳간에는 따라 배울 게 많습니다. 이번에 선동된 건 이 구절입니다.
기록은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아줍니다. 그것은 초혼의 주술이며 시간을 머물게 하는 마술입니다. 나는 물결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매일 달라지는 변화와 특별함을 즐기기 위해 기록을 남깁니다. 나는 그것들을 기록함으로써 하루가 다른 하루와 달리 그 하루로 특별했던 것을 즐깁니다. 내 기록의 일관성을 지키는 유일한 법칙은 하루를 기록하면서 그 하루 속의 생각과 행동 속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 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 속에 구현되는 내 생각 내 행동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원칙, 그러니까 원칙 중의 원칙입니다. 내 마음이 사람이 떠난 빈 집이 되지 않도록 마당을 쓸고, 꽃을 심고, 굴뚝에 연기가 나게 하고, 붉은 고추를 햇볕에 내다 널고, 달빛이 창문을 넘어 방안 가득하도록 하루를 쓰고 싶습니다. 내 하루 속에 사람이 살아 있게 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던 날은 황홀한 일상이었습니다. 황홀한 하루, 그것들이 모여 내 삶을 별처럼 빛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을 잘 사는 것처럼 멋있는 예술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것처럼 훌륭한 자기경영은 없습니다. (구본형 <일상의 황홀> 서문 중에서)
‘저 말이 진짜일까? 내가 직접 실험해서 알아 보고 싶다’고 느낀 건 ‘물결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기록함으로써 하루가 다른 하루와 달리 그 하루로 특별했었다는 걸 즐기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는 구절입니다. 하루를 기록하면 정말로 하루를 즐길 수 있을까요? 그렇고 그런 반복이 아니라 특별한 하루가 연달아 일어나는 식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변하게 하는데 기록법이 유효할까요? 게다가 그게 내 삶을 가꾸는 도구가 될까요? 이미 훌륭한 집을 가꾸셨던 구본형선생님은 빈 집이 되지 않도록 유지한다셨지만 저는 제 마음의 빈 집을 살만한 거처로 가꾸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첫번째 시간을 이 일에 쓰고 싶습니다.
10월 15일부터 11월 30일 오늘까지, 45일간이 일기를 쓰려고 했던 기간입니다. 단식일기를 적게 되어 있어서 시작한 거였어요. 저는 일기를 안 쓴지 아주아주 오래, 그러니까 몇 십년 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모닝페이지를 해 오고 있지만, 그건 내적사건 중심으로 주관적으로 쏟아내는 식이라 일기처럼 소소한 일상을 담지 못합니다. 노트북 옆에 놓인 탁상달력에 동그라미 표를 그려가며 헤아려보니 이 중에서 저는 30일을 썼네요. 그날 저녁에 쓴 날은 3,4일이 안되고요 모두 다음날 새벽에 썼습니다. 모닝페이지 하고서 15분쯤 더 들여서 전날 일을 간단히 기록하는 식이었어요. 저녁에 쓴 날 일기는 글씨가 마구 날라가고 몸과 마음의 에너지 라벨이 바닥인데 억지로 애썼다는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어요. 제게는 한숨 자고 일어난 새벽 시간, 말 거는 사람, 택배, 전화같은 인가의 일상이 내게로 오기 전 시간이 좋은 듯 합니다. 2/3 썼으면 참 잘했어요 도장 꽝입니다. 하하하. 용 썼구만요. 하하하.
해보니 어땠나 말씀드리고 편지를 맺어야겠어요. 얇은 공책 아무데나 펴서 몇 군데 읽어봅니다. 내가 쓴 일기인데 재미가 나서 이어서 읽게 됩니다. 그 날의 여러 가지 일들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눈물이 묻은 페이지는 지금도 짠합니다. 이건 일종의 단서나 부표같아서 그 날을 재생하는빌미가 됩니다. ‘사람이 있었나?’ 같은 위대한 주제를 적용할 엄두는 아예 안 냅니다. 그러다 엎어지거나 가랭이 찢어지는 사단이 나면 어쩔라구요. 안돼요 안돼. 슬로우 앤 스테디! 컴다운 컴다운. 이 놀이를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제 막 시작했어요.
오늘만 보내면 12월입니다. 달력 마지막 장의 감회가 새롭습니다. 빨간 캐롤의 경쾌한 리듬을 즐기며 내내 건강하시기를, 두루두루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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