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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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아마도 9호선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교향곡 작곡가들은 9번 정도까지 작곡하고 죽곤 한다. 한 인생을 살면서 9를 이룬다는 것은 열심히 살았다는 뜻이다. 말러는 10번까지 작곡을 했다. 말러가 10번의 초연을 끝냈을 때 사람들은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한 관중은 생각했다. ‘작곡가의 얼굴에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 그런 글귀를 어디에서 읽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이다. 죽음을 직시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느낌일까?
내가 지하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날은 좀 이상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하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전동차 안에서 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얼룩덜룩한 영상이 거울처럼 반사되어 내 얼굴을 비추었다. 내 얼굴은 유독 인디언 크리스가 심하다. 위로부터 떨어지는 조명은 주름을 낱낱이 그렸다. 나도 이제 많이 살았다. 그러나 그리 나이가 든 것은 아니다. 그냥 나는 거기에 있었고 나의 얼굴을 정지한 채, - 보았다. 지하철은 창문 배경에 선을 만들며 직선을 달렸는데 나는 그 것이 시간의 흐름처럼 생각되었다. 결국 역에 도착하는 것처럼 시간은 흐를 것이다. 이것은 거의 절대적인 운명이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미래는 올 것이고 그 미래의 모습은 하나일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확률론인데
생각보다 확률은 잘 맞는다.
살아보니 확률 5%의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내가 억만년을 산다고 하였을 때나 가능할 확률을 기대하기엔 나는 100년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하는 순간 순간들은 사실은 더 짧은 시간만을 제공할 뿐이다. 결국 확률을 아는 과학자는 운명론자와 그리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나는 확률을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과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자주, 습관적으로 그를 생각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루어질 확률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왜 나는 이미 결정된 미래 대신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가? 아아 어리석은 짓이다. 지하철은 달리고 있었고 그와 나의 직선이 서로 엇각을 이루며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머릿속에서 보였다. 결국 확실해지는 순간이 오겠지. 그 때 나는 마음이 참 아플 것 같았고 그것은 달콤한 슬픔이라기보다는 예상치 못한 사고처럼 심대한 고통일 뿐 – 그러한 아픔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꽤나 방어적인 매커니즘이다. 가끔 사람들은 인생의 유한성을 깨닫는 순간,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시달린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회사를 그만둔다. 해본 후에 후회하는 것이 하지 않은 후회보다 낫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만약 내일 자신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날뛰는 것이 아닌 바에야 삶의 내용이 달라져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다.
죽음은 수시로 일어난다. 내가 누군가와 연락을 하다가 그와 더 이상은 사정이 생겨 연락하지 않기로 한다면 그는 내 인생에서 죽은 것이다. 내가 만약 이 곳을 떠나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후 이국으로 향했다면 나에게 조국은 죽은 것이다. 물론 작은 확률로 그들이 살아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거의 없을 가능성에 기대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망상이다. 이런 망상이 삶을 지속시키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 – 사람들은 영화관이라든지 소설이라든지 그런 것을 통해서 첫사랑과의 조우라거나 부유함의 만끽, 예쁜 여자와 멋진 남자와의 사랑 등을 상상한다. 그것은 현실이 얼마나 시시한 것인지 반증한다. 그런 망상을 즐기는 것이 현실이다 – 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아니라. 그냥 삶의 속성에 대한 이 날의 깨달음이다. 삶은 알 수 없는 것이라지만 어느 부분은 생각보다 꽤나 정해져 있고 사실은 많은 부분이 죽었으며 또 새로운 삶이 탄생하는 중이다.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렇다면 이제 과감히 죽은 부분은 잘라내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아주 많은 확률에 근거하여 내가 상상하는 미래 따위는 오지 않는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건 알 수 밖에 없다.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 볼 나이는 지났다. 이제는 더 이상 천둥벌거숭이 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나이 드는 것이 좋다.
10대에는 왜 살아야 하는가를 많이 생각했었다. 꽤나 고군분투하였고 이 시기의 나는 오히려 지금보다 철학자 같았다. 의외인지 당연인지 이 문제에 답을 하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떤 층위에서 설명을 해내야 하느냐 – 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러저러한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불가지론보다는 확실히 흡족한 답을 얻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에서. 나는 즐겁지 않았던 유년기와 방탕함의 죄책감에 대해 생각한다. 마구 사는 것이 결코 답은 아닐 것이고, 죽음 앞에서 모든 삶이 용서받는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시시하고 있으니만 못한 모든 것들을 경멸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나보다 나은 듯 여겨진다. 나는 말이 번지르르할 뿐 인격적 수준과 내용의 건실함이 없다. 나는 탕아와 패배자, 그리고 쓰레기...에서 자유를 느끼면서 쓰레기보다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나태함의 죄에 대해 채찍질을 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기대감이다.
이 모든 것이 삶의 정점에서 내가 회피하는 문제에 대한 변명에 불과할까?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 까마귀처럼 내 삶의 어떤 부분을 지켜 본다. ‘가장 슬픔 감각은 시각.’ 그 죽어가는 것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행여 툭툭 발톱 박힌 발로 건들여대는 짓 따위는 비겁하다! 나는 말하곤 했다. 지드의 <좁은 문>에서 알리사는 제롬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그에게 편지를 쓴다. 그녀는 잔인하다. 나는 알리사 따위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이 역에 도착했다.
나는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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