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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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탄생
지난 수요일 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둘째 조카가
오늘 나온다는 것이다. 원래 내가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에 있을 때쯤 나오기로 되어 있던 아기였다. 회사가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갔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빨리 가야한다’는 초조함이나 ‘내가
좋은 이모가 될 수 있을까?’와 같은 불안함은 없다. 단지
새로운 조카를 만나는 게 기대되었다. 빨리 만나고 싶었다. 병원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렸다. 표지판을 읽었다. 왼쪽은 66병동 신생아실이 있고,
오른쪽은 난임클리닉이 있다. 환생의 문과도 같군.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갈지 정해지는 거야. 나의 무의식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내 차례는 아니었다. 나는 왼쪽으로 갔다.
마침 아이가 병실에 와있었다. 언니는 힘들어 보였다. 아이는 미숙아라 마르고 작았다. 꼬물꼬물 작은 입을 달싹거리고, 가끔 눈을 떴다.아이를 몇 번 안아 달랬는데, 품에 안으면 쏙 들어왔다. 쿨쿨 자는 모습이 귀엽다. 아기는 어딘가 불편하면 얼굴이 빨개졌다. 때되면 잠에서 깨 밥을 달라고 보챈다. 아기의 생존법이다.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자신이 살아남는지 알고 있다. 생명체는 자연스럽게 삶의 방향으로 향한다.
지난주는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산모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데서
에어컨을 틀거나 창문을 열지 못해 무척 더웠다. 비가 많이 내리는 7월의
한여름. 나는 무더위 속에서 아기를 안고 내가 태어나던 날을 자주 상상했다.
_낭떠러지
시작과 마주보면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시작’이라는 감각은 다양한 사건을 통해 흘러 들어온다. 그것은 조카의 탄생처럼
축하 받을 일일 때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실패나 불운이기도 하다.
‘내 인생이 그렇게까지 잘못될 리는 없을 거야’라는 막연한 평온함을 바탕으로 사람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
대학 합격이나 취직성공으로 세상의 주인이 된 듯한 자부심을 가지기까지 한다. 이런 경험에
의해 소소한 불행들은 이겨낼 수 있다. 학점이 나빴다든지, 친구와
싸웠다든지 하는 것은 순간 기분이야 나쁘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절대적 절망에 갇히면 거기 끼어버린다.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모든 상황과 맥락이 한 목소리로 ‘너는 틀렸다’고
외친다.
한 남자가 있다. 그가 젋었던 1970년 5월5일 어린이날, 재판을 죽 지켜본 호송 헌병의 호의로 그는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울 상대에 독서동아리를 만들어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을 번역했다. 매일 같이 세미나를 돌았다. 그런데, 그가 틀렸다고 모두 말했다. 중앙정보부의 책상에서, 법정에서 그는 민족해방전선을 남한에 이끈 주동자가 되었고, 그 죄값을 요구 받았다. 세태가 눈앞에 들이대는 이념과 거짓정의와 ‘강사’라는 직업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가는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가 그렇게 잘못했는가? 20년이나 징역을 살만큼? 이 남자는 그가 소속되었다고 한 그 모임의 이름조차 몰랐다. 수장조차 전부 만난 적이 없다. 그의 죄목은 어딘가 과대 포장된 부분이 있었다. 단지 정황상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불운에 그는 끼어버렸다.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세계에 그는 발을 디뎠다.
_살아남는 방법
나는 그가 억울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 나인가?’ 분명히 생각했을 거다. 개인의 인생에서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내게 주어진 불운에는 분노가 치미는 것이 자연스럽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 중에 책임질 사람이 없다면 운명의 여신이라도 찾아가 따지고 싶다. 일
똑바로 안 할래. 부당함에 대한 분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의 책에서는 그런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평온하다. 그는 불운의 마침표에서 끝내지 않았다. 그는 부모님에게 부탁해 동양 고전을 감옥으로 들여왔다. 그리고 글에서 끌어온 추진력으로 새로운 삶을 일궈나갔다. 대단히 참신한 발상이다. 결국 책으로 만나는 그에게는 집착이나 후회 같은 것이 읽히지 않는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강의에도 그는 담담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어조로 책을 풀어간다. 그가 이토록 분노를 정제해냈다는 것이 놀랍다. 또한 그가 거칠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반갑다. 그 말은 같은 인간인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물론 모든 사람의 해소 방식이 책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 것은 아닐 터이다. 다만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작은 온몸을 떨며 울던 아기를 보며, 고전에서 자기를 고쳐 세우던 신영복 선생님을 떠올린다. 고전. 이것은 나의 생존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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