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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2일 10시 00분 등록

내 것이 소중함을 깨닫기까지

10기 김정은

 

 

남들보다 낫기보다는 다르게 되자.

이 화두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는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사물을 새롭게 보기 위해 혹은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때때로 낯선 세계를 거닐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우리 자신에게 그것을 강요해야 한다.

- 찰스 핸디 <코끼리와 벼룩>, 273 -

 

 

당신의 조언이 필요해.”

남편이 말했다. 남편의 회사는 힘들다. 고로 남편은 힘들다. 그렇다고 이제 막 백수의 삶에 접어들어 일상이 우울한 내가 해 줄 조언이 있을까. 어쨌든 나에게 조언자의 역할을 부여하는 남편이 고마웠다. 그래서 난 남편이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지지와 격려로 답할 것이라 다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발 금융 위기로, 유럽에 본사를 둔 외국계 금융 회사인 남편의 회사는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 받는 사람들은 이미 안정적인 국내 금융권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옮겨 가는 추세였고, 남은 사람들은 다가올 구조조정에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회사는 업무를 확장시킨다기보다 업무를 줄여나갔고, 회사 사람들도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여유 시간이 생긴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앞으로 뭘 하며 어떻게 살아갈지 모색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물었다. 자신이 MBA에 한번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남편은 회사가 곧 구조조정에 돌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 할 상황이 올 것이라 했다. 직장을 옮길 것을 대비하여 자신의 이력서를 다시 한번 작성하다가 MBA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금융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에 MBA라는 최종 학력을 얹는다면 이력서가 한결 괜찮아 보일 것 같기도 했다.  회사가 술렁거려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미리 MBA 과정을 마친다면 더 좋을 것이라 남편은 판단한 것이었다. 남편은 그렇게 경영학 전공자인 나에게 조언을 구해왔다.

 

“MBA를 꼭 해야 할까요?”

마흔, 이직을 앞 둔 시점에서 꼭 MBA를 해야 할까? 남편은 경영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3년 이상 재무팀에서 회계와 재무 실무를 맡았고, 5년 이상 영업교육팀에서 영업과 교육으로 고객과 영업 실무를 담당하는 분들과의 접점에 있었으며, 이젠 회사 전체 부서의 중요 데이터들을 모두 끌어 모아 핸들링해야 하는 전략팀에서 보고서 쓰는 일을 맡고 있다. 그렇게 회사 전체의 업무를 볼 줄 아는 그가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학문으로 경영학을 공부해야 해야 하나 나는 그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실무를 하며 경영학 전공자나 MBA를 취득한 웬만한 사람들을 능가하는 지식을 습득한 셈이었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하리라던 내 다짐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맞벌이 부부에서 외벌이 부부로, 내가 퇴사한 것이 남편에겐 보다 능력 있는 가장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져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회사는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다. 이직을 위해 자신의 이력서에 한 줄이라고 더 채우고 싶은 남편의 마음을 내가 모를 리 없다. 난 사실 MBA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내가 오케이하는 것이 남편에게 위안이 된다면야 내가 지지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MBA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국내와 해외 유수의 대학의 MBA과정과 입학 전형 등을 리스트업했다.

 

- A씨를 기억하다

정리하다 보니 대학들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가령 일반 MBA가 아니라 금융에 특화된 금융MBA도 괜찮을 것 같았고,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퇴사를 한다면 퇴직금을 가지고 해외로 나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해외로 간다면 내가 익숙한 미국으로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이미 터득해 놓았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언어를 습득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미국에서 만난 ‘S사를 박차고 나와 MBA를 취득한 A를 떠올리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부부가 맞벌이하며 마련한 집을 정리하고, 아내와 아이와 함께 유학 길에 올랐던 마흔의 A씨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미국의 상위권 대학에서 MBA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그는 학위를 취득하고도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그는 2년 동안 전 재산을 등록금과 3인 생활비로 다 썼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턱없이 오른 한국의 전세가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는 생계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며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미국 시장도 불경기라 눈을 낮추어도 취업이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나는 미국 출장에서 A씨를 만났다. 출장기간이 다 되어 내가 했던 업무를 인수 인계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곳 미주법인은 새로운 인력으로 A씨를 채용했다. 그와 함께 일을 하면서 나는 그의 스펙이 아깝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맡았던 업무가 미국 상위권 대학의 MBA 학위가 필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게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자신에게 투자하지 마십시오. (저처럼) 재산만 탕진할 뿐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세요. 그 기쁨을 최대한 누리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S군을 만나다

MBA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수록 우리 부부의 미래 청사진은 오리무중 상태로 빠져들었다. A씨가 말한 삶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도대체 뭔가 싶었다. 우리는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시아의 금융 허브, 홍콩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보고 싶었다. 혼란의 시기, 롤 모델의 존재가 절실했다. 홍콩 센트럴의 금융가도 가보고, 홍콩의 주택가도 가보고, 치안이나 물가도 따져보았다. 무엇보다 우리의 두 아이들을 위해 교육 환경도 꼼꼼히 살펴 보았다. 먼저, 주택 비용이 서울보다 훨씬 비쌌고, 국제학교에 보내야 하는 외국인 자녀의 교육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마디로 주거 환경이 우리 형편에 맞지 않았다.

 

우리는 학생들의 삶은 어떤지 홍콩의 대학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홍콩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한 대학의 캠퍼스를 둘러보고, MBA 학사 일정도 문의해 보았다. 학생회관도 가보고, 학교 식당에서 밥을 사 먹기도 했다. 때 마침 우리 부부가 한국인임을 눈치 챈 한국인 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S군을 만났다. 그는 그 대학의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기숙사는 어떤지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S군의 지쳐 보이는 인상에서 이곳의 학업을 따라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홍콩의 금융권 진출을 목표로 유학 온 경영학과 학생이었다. 서울대와 홍콩의 대학을 두고 고민하다가 홍콩 대학을 선택했지만 그는 그 당시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했다. 가장 큰 이유가 언어 때문이라고 했다. 영어와 중국어에 어느 정도 능통해야 그 곳의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다. 또 대학 커리큘럼 자체가 과제나 시험에서 한국의 대학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그 곳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싼 대학 등록금 때문에 전 세계 각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어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사실 상 졸업은 요원한 일이라 했다. 한국에서도 대학 입시를 준비하느라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했을 텐데, 이 곳 대학에 와서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하니 나는 그가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남편이 그 곳 대학의 MBA에 대해 묻자, S군은 현실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홍콩은 대학 등록금은 저렴한 반면, 주거비와 외국인 자녀의 교육비가 굉장히 비싼 편이다. 그래서 가족을 두고 혼자 유학을 온다면 기숙사에서 지내며 공부하는데 비용상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과정을 마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 S군 자신도 중도 포기 하고 싶은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졸업하기 전에 중도 포기할 가능성도 미리 고려해 봐야 한다. 중간에 포기한다면 아예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할 것이다. 졸업이 어려운 만큼 졸업 후 취업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취업하더라도 주거비와 생활비를 쓰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S군의 선배들은 졸업 후 홍콩의 금융 회사에 취업해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무렵이 되면 오히려 한국으로 취업해서 들어가기를 원한다. 홍콩에서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는 맞벌이가 필수다. 맞벌이를 해도 자녀 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렵다. 여러 가지 비용을 고려해 볼 때, 홍콩에서 MBA를 한다면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S군의 조언은 그랬다.

 

과연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것이 있을까?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 나는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해답은 분명했다. 홍콩 진출은 우리 가족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S군은 우리 부부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해준 셈이었다. S군에게 남편이 명함을 내밀었다. 순간 S군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가 자신이 입사하기를 희망하는 회사라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물어보았다. 열심히 공부를 했으니 금융의 메카 홍콩에 남아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고 싶지 않냐고. S군의 대답은 이랬다. 외국 생활이 너무 외로워서 자신은 일찍 가정을 꾸리고 싶단다. 결혼을 일찍 하게 되면 아이도 일찍 갖게 될 텐데 그렇게 가정을 꾸리기엔 여러 가지 면에서 홍콩보다 한국이 훨씬 더 나은 조건이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외국계 금융 회사에 취업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홍콩 여행을 마치고서야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나의 퇴사와 남편 회사의 구조조정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MBA나 해외 진출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함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더 얹어서 나를 빛나게 만들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미 존재하는 빛나는 면을 내가 알아 봐야 한다. 난 철학자가 꿈이었던 남편이 철학을 전공했다는 것이 항상 부러웠다. 부모님은 철학 전공해서 뭐 해서 먹고 살 거냐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반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끝내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했고, 4년 내내 원 없이 철학 책을 읽고 또 책을 통해 철학자들을 만나며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지금 철학자가 되진 못했어도 부모님이 걱정하신 뭐 해서 먹고 살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할 말은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 된 것 아닌가.

 

다시 철학책을 펼쳐 보는 것 어때요?”

공부만 하며 살고 싶은가? 일만 하며 살고 싶은가? 타국에서 혼자 외롭게 살고 싶은가?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면 삶이 흔들릴 때 우린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난 문득 문학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난 세계문학전집을 갖는 게 소원이었던 문학소녀, 하지만 내내 갖지 못했던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미련은 성인이 된 내게 아직 남아 있다. 난 세계문학전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해진다. 남편에겐 그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철학이 있다. 그렇다면 힘든 시기를 보내는 그가 철학책을 다시 펼쳐본다면 어떨까. 그도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남편은 철학책을 읽으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는 듯 했다. 우린 ‘MBA?’ 했다가 철학책!’ 한 것이다.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란다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착취해야 할 것이다. 마흔의 위기, 우리 부부는 남들보다 낫기보다 남들과 다르게 살기로 했다. 우린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옆 길로 새기로 했다.

 

    

 

IP *.65.15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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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2 13:55:12 *.196.54.42

"우린 ‘MBA?’ 했다가 철학책!’ 한 것이다."

백번 잘 하셨어요, 엘리스.


"우리 부부는 남들보다 낫기보다 남들과 다르게 살기로 했다우린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옆 길로 새기로 했다."

결국 이런 멋진 결과를 도출해 낼 줄 알았지요, 현명한 엘리스!


부부 저술가의 탄생을 기다리며^^


프로필 이미지
2014.12.28 19:55:45 *.65.153.210

삶의 정도를 읽으면서 경영학과 철학이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남편에게 공부만 하지 말고, 일만 하지 말고, 같이 재밌게 살아보자 한 것을 현명하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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