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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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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6일 11시 55분 등록

여는 글_.



미안하다, 분노다

 


 

미안하다, 분노(憤怒)해서

 

1.

 

  지옥의 뱀에게 생식기를 물린 채 벌을 받고 있는 한 인간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가장 독선적이고 탐욕스러웠던 인물, 교황 바오로 3세의 추기경 비아지오 다 체세나. 그는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청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을 그릴 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역겹고 이교적인 음란함”으로 가득 찬 그림이라 힐난했다. 미켈란젤로는 벽화의 한쪽 켠 지옥의 판관 미노스를, 미다스의 귀를 결합한 체세나 추기경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체세나는 교황에게 제 얼굴을 벽화에서 지워달라고 빌며 간청했다 한다. 그 때 바오로 3세는 이렇게 말했다 전한다.

 

“내 아들아, 주님은 나에게 하늘과 땅을 다스릴 열쇠만 주었다. 지옥에서 나오고 싶다면 미켈란젤로에게 가서 말해라.”

 

2.

 

  걷고 있다. 걸음의 속도는 일정하다. 흐트러짐 없이 걸어야 한다는 일념, 오기 하나로 길을 버텨낸다. 그 길에서 분노와 절망을 집어 올린다. 결코 그것을 집어 들고 싶지 않았다. 허나, 길을 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사방은 모두 그것들의 세상이라 수많은 분노와 절망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하나를 걷어 내고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걷어내어 손끝에 걸린 절망과 분노를 빙빙 돌리다 패대기치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분노를 알아 달라 하지 않는다. 어느덧 쉽게 분노하고 쉽게 절망한다. 내 손 끝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끝에선 분노가 입가엔 절망이 머물지 않기에 나로부터 밖으로 몰아치는 그 어떤 욕설도 그 어떤 폭력도 없다. 분노와 절망은 모두 내 가슴 언저리를 붙들고 있다. 분노는, 내 속 안에서만 이뤄지는 절규이다.

 

3.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이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 시대를 오롯이 살아내는 이들 각자가 만들어가고 채워가야 할 몫이다. 각자가 삶을 살아가는 양식이고 삶을 지켜주는 실타래다. 특정한 이의 광폭한 우상화로 이루어져서도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서도 안된다. 미노스 왕이라는 자의 탐욕으로 애꿎은 젊은 청년들이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나라일 수는 없다. 미다스 왕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부질없는 황금만 가득한 나라여서는 안된다. 보편적이고 타당한 정의에 기반한 사회,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 잘못된 것들이 자정력과 복원력으로 수정이 되고 대안이 제시되어 발전되어 나아가야 하는 나라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다. 개인에 군림하는 개인과 국가화된 개인이 우선시되는 이 사회에서 개개인의 역량과 역할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따위의 인간’으로 전락되어 배제되어 버리고 있다. 우리가 잊어버린, 잃어버린 역할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빼앗긴 역할이 무엇이었는가. 내 역할을 결정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4.


  세상은 오래도록 말해왔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그 말을 특히 내세우며 ‘함께’를 강조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흩어져 간다. 우리는 분명 ‘서로’라는 단어를 꼭 붙들고 지금까지 견디어 왔다. 기대와 자조적 위안으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일체의 관계들에 믿을 것은 사람뿐, 믿지 못할 것은 사람뿐이라는 아이러니와 역설로 버텨오던 시간이었다. 시간은, 해결해주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도 알 수 없는 기대는 한줌 설 자리를 잃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에 기대어도 소용없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sse Oblige)는 없었다. ‘도덕’을 떠나 지위에 따른 역할의 ‘전문성’을 기대하기에도 덧없었다. 늘, 기대하고, 후회를 반복한다. 그러나, 당연함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이 재정의되어야 했기에 분노도 쌓여간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마냥 거슬러가는, 시대의 지배적인 생각들에 놀란다. 역시 세상을 터무니없이 낙관적으로 보았던가. 무엇에 기대었던가.

 

5.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정치란 말의 쓰임은 이상하다. 그 모든 사회적 활동의 산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로 치부된다. 감히 ‘우리’가 관심가질 만한 것이 못되는 것으로 보는 듯도 하다. 물론, 정치를 좁은 의미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라 한다. 그래서라고 보기엔 애매하지만 그 ‘다스리는’ 주체를 전적으로 ‘한 사람만의 역할’로 치부하는 것은 그의 강한 힘을 믿어서일까. 그 강한 힘에 눌려서일까. 어쨌든 그렇게 어느덧 ‘정치를 말하는 것’은 그 ‘한 사람’에 대한 ‘불충’이 되어 버린다. 나아가 정치이야기의 귀결은 싸움이다. 특히 ‘지역’이라는 특수성을 내세우게 되면 그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른다. 그 파도는 어디로 얼마만큼 덮쳐 갈지 모른다. 과장되어 말하지만 폼페이 화산 폭발만큼의 위력을 가지는 듯하다. 이만큼의 위력을 가졌음에도 우리의 정치이야기와 정치의식은 여전히 ‘하위’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정치’가 무엇을 위한 방향의 이야기가 아니라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구별짓기의 다른 이름인 까닭이다.

  처음부터 이러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다. 성숙하지 못한 정치인과 정치의식이 한국적인 토대에 스멀스멀 자리잡는 방식이 그러했고 그것을 이어가는 방식이 그러했다. 우리의 정치는 ‘우리가 말할 것’이 아닌 너무도 멀리, 높이 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6.

 

  2014년 한 해, 유독 강한 체세나를 만났다. 또한 그로 인해 파생된 수많은 체세나를 보았다. 그들이 많은 황금을 만들겠노라 선언했고 걷는 길엔 황금이 뒹굴었다. 그것은 그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짜낸 것이고 바꾸어 버린 것이다. 물이 필요한 자리에 황금이 놓여 졌고 약이 황금이 되었다. 집이 황금이 되었으나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걷는 길마다 늘어진 황금더미는 발에 채여 생채기를 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밥을 먹기 위해 약을 먹기 위해서는 황금을 건네야 했다. 황금으로 바뀌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황금의 주인은 그들이었고 그들의 집엔 황금이 이미 넘쳐났으나 거리의 황금은 늘어갔다. 심지어 의견이, 토론이, ‘말’이 황금이 되었다.

 

7.

 

  그렇기에 미켈란젤로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체세나’를 그릴 수 있는 길이라면, 나도 미켈란젤로가 되어 길에서 걷어 올려 내 가슴 속에 자리잡은 분노를 그려보고 싶었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에게 당연한 분노이고 모두가 미켈란젤로가 되고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노를 말하자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우선, 사람들은 분노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치에 대한 분노는 피하고픈 주제였고, 그러므로 분노를 말하면 ‘나’의 성격의 이상함을 말하는 것이었고 ‘비판적인’이거나 특정한 색깔을 가진 사람으로 낙인되었다. 이 사회에서 분노는 ‘이상하고 모난’ 성격을 가진 자이거나 ‘특정한 색깔’을 입은 사람의 몫이었다. 그렇기에 또한 ‘조심하라’는 경고가 잇달았다. 확성기에 대고 떠들어대지도 않았고 어떠한 욕도 하지 않았고 그저, ‘분노’라는 감정이 생긴다고 말했을 뿐인데도 그렇다. 이 사회는 그저 한 시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다르게’ 표출되면 그의 인생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다.

 

8.

 

- 전국 곳곳 박근혜 대통령 비난 전단 발견..처벌은? ,채널A, 2015.01.19

- 전국 곳곳에 '대통령 비난 전단'..처벌은? YTN, 2015.01.18

- 광주서도 대통령 비방 전단 발견..경찰 처벌 근거 고심, 연합뉴스, 2015.01.15

 

  ‘새해가 되었고, 어제보다 나아진 하루가 되었길 바랐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 대통령을 '비난‘한 전단을 배포했다면 ’처벌은?‘이 아니라 ’이유는?‘이 되어야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긴 처벌이 당연하다. ’비난‘이니 ’처벌‘이 나오는 것이겠다. 제목에서 벌써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이미 ’비난‘이라 판단된 그 수순은 처벌로 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비난이었을까. 또다른 신문은 같은 사건의 헤드라인을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비판’ 전단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한 글자의 차이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지를 단번에 알려주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은 어김없이 ‘강력계’로 배당되었다. 대통령이 하는 일에 관해 어떻게 해야 비난이 되지 않을까를 또 생각하게끔 만든다. 이 분노를 전할 방법이 없다.

 

 

미안하다, 분노(奮怒)하지 못해서

 

1.

 

무엇보다 나는, 미켈란젤로가 아니었다.

 

2.


  묻는다. ‘네가 뭔데’라고.

  정치에 대해 말하는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었느냐를 말한다면 ‘아니요’다. 전문적인 지식과 식견을 갖추지 못했다. 그 어떤 ‘권위’ 또한 가진 자가 아니다. 심지어 나는 잉여이기까지 하다. 사회는 젊지만 쓸모없는 백수, 사회 변화와 발전에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로서의 잉여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잉여란,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일명 그것의 명명을 ‘백수’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역할과 정체성은 ‘경제적 활동’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비경제활동인구로서의 나는, 청춘과는 거리가 먼 나이이므로 오히려 ‘잉여’를 붙이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어른의 물음에 나를 가장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데 어쩌랴. 묻는 이들이 생텍쥐베리의 어른으로 물으니 나또한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왜 분노하는지, 왜 분노를 말하려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는 들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자격이 주어져야 한번쯤 이유를 들어보려 하지 않는가.

 

3.

 

  권위라는 자격 테스트에서 통과하지 못한 자에게 또 묻는다. “당해봤어?”

  정치적 억압과 폭력을 당해보지 않았다면,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라면 다른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며 ‘문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없음을 말할 자격으로 등가시키면 남들이 겪어 보지 못한 강도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피해자라 내세울 명확한 ‘사건’이 없다.

태양이 뜬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태양빛에 영향을 받지 않는가라고 한들 ‘직접적’인 경험을 강조하면 또한 말할 자격에서 밀려난다. 그 영향을 직격타로 맞고 싶지 않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몸부림이라고 말을 해도 동의를 하지 않는다면 꼭 이것만은 묻고 싶다. 경험한 이들만이 말해야 한다면 귀기울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렇게 상처를 다 겪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가. 그 상처들을 모두가 겪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4.

 

“그리고, 그래서, 넌 뭘 하는데?”

  학창시절 나는 분명 착한 아이였(을 거)다. 일단 나는 모범생이 아니었고 일진도 아니었다. 눈에 띄게 사고를 치지 못했고, ‘성적 좋은 애들’을 방해하는 수업시간에 집중 못하는 학생도 못 되었고, 학교를 지각한다거나 수업을 더러 빼먹거나 야자(야간자율학습)를 생까는 학생도 못 되었다. 출석부에 기록은 있고 교실 속에 의자를 차지하고는 있으나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다. 이런 아이들은 ‘착한’ 아이로 통한다. 학교는 그렇게 무수히 착한 아이들을 길러낸다. 어쩌다 한번 꾸지람을 들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줄곧 꾸지람 들을 일이 없다. 주변인으로 존재하고 들러리로 존재하는 까닭이다. 어쩌면 영원히 ‘착한’ 아이로 기억되고 남아있을 거다. 그리고 여전히 그때의 습성은 남아 내가 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나는 ‘착한’ 학생에서 나아간 ‘착한’ 시민으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여전히, 나는 ‘착한’ 속에 갇혀 있다.

그렇게 길들어져 ‘분노’를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방법을 알지 못한다. 자격만큼이나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분노’를 말하는데 주저하게 된다. 그냥 ‘분노’가 나왔으니 분노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 모두가 분노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분명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5.

 

  침묵했다. 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으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분노가 사그러들지도 않았다. 누군가 대신 분노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세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은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더 바랬다. 그러나 황금이 발에 채여 늘 아픈 발로 사회를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언제였는지 모르던 어느 시절까지, 강한 억압과 통제와 비상식이 난무하는 상황이 당연한 행동력과 굳은 신념을 강고히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강한 억압에 네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느냐를 자꾸 묻고 있다. 당연함을 명확한 당연함으로 만들어내기까지 많은 질문과 회의가 떠나질 않는다. 의지로 따질 일이 아니다 하면서도 의지가 삶을 이끌어 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자꾸 흔들리며 휘청하는 나의 뿌리는, 정말로 견고하긴 한 걸까. 결국은 뿌리가 뻗은 그 자리로 되돌아 올 흔들림이 될 것인가. 그 뿌리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에서 뻗어 내려 흔들림을 고정시켜 줄 것인가는 외면할 수는 없는 물음임을 인식하게 된다.

 

6.

 

 그런데. 당신은? 그렇다면, 당신은?

 분노에 자격을 다는 당신 역시도 다르지 않다. 분노를 할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한 당신은 카멜레온이다. 사회를 정글이라 표현하면서 자신은 정글의 왕 사자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미안하다, 당신도 카멜레온이다. 하염없이 의문이 들고 삶을 위태롭게 하는 문제의 존재를 인지함에도 그에 맞춰 생각의 색깔을 바꾸어 버리는 한, 주어진 환경에 맞춰 쉽사리 적응하는 한, 분노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분노하려는 사람을 잡아챈 당신이야말로 나보다 더한 카멜레온이다. 우리는 정치가 만들어낸 상황에 대해 깊은 곳 생각과 감정들을 감추고, 위장한 색깔을 덧쓰며 살면서 정글사회를 잘 이겨내는, 사자라고 생각한다. 정글에선 사자가 되어야 한다며 살아가는 우리는, 위태로운 보호색을 입은 카멜레온이다.

 

 

미안하다, 분노(分怒)하자

 

1.

 

  뚜렷하게 정치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음각처럼 내려않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이라고 양각처럼 도드라진다.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야기다. 이 나이에 새삼 초등학교 교과서를 뒤적인다.

 

“정치는 정치가가 하는 일이고, 나랑은 관계없다는 생각은 옳지 않아. 정치에 대해 알고 나면 정치가 좋은 세상을 만들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래, 나의 정치에 대한 사고는 초등학생에 머물러 있다. 이렇듯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사회에서, 어른이 되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래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2.

 

  뭐래도 좋다. 나는 정치에 관해서는 초등학생처럼 사고하련다. 내친김에 초등학생에게 교육되는 말을 더 들어보겠다.

 

“나라의 주인은 우리 국민들이야!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참여는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지. 만약 주인인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인들이 제멋대로 정치를 하여 나라가 엉망이 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국가는 국민이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호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 분명 정치는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국 다양한 가치에 둘러싸이게 된다. 사람들의 욕구는 다양하니까. 그래서 정치란 이러한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일이라고 누누이 들어왔다.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한다. ‘권력적’으로가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 간의 의견차와 이해관계를 해결하는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정치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과정을 통해서 ‘정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3.

 

  “현대 사회는 대의민주주의라서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게 특징이라는데 왜 엄마와 이모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그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삶에 대한 관심이야! 우리 생활 하나 하나에 정치가 다 관여가 돼. 정치만큼 사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어”


  조카의 물음에 비로소 내가 무엇에, 왜 관심을 기울이는지 알았다. 그것은 ‘특정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그저 ‘삶’에 대한 귀기울임, 관심이었다.

  정치에 관여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는 ‘한 개인’의 것도 국회의원이라 불리는 그와 동류의 ‘정치인’들의 것이 아니라는 아주 기초적이고 선거 때만 되면 반복적으로 듣는 말은 잠시 접어두겠다. 정치가 ‘정책’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만을 잊지 않으면 된다. 정책이란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정책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피폐화된 삶들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또한, 그 폐해를 지금도 겪고 있는 우리이다. 좀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정책들을 통해 소외됨이 없이 행복한 삶을 꿈꾸는 우리이지만 정치를 통해 정책이 탄생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선택을 하고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4.

 

  선거 때면, 실업정책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실업자이든, 보육정책이 보다 확고하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이든, 교육정책이 획기적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학부모든, 취업과 육아가 효율적으로 양립하기를 바라는 여성이든, 구조조정을 당하지 않고 정규직으로 계속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직장인이든, 노인연금보험이 좀더 안정되기를 바라는 노인이든, 사회보장이 좀더 사회적 약자가 자립할 수 있는 정도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이든……. 자신이 바라는 정책을 지지하기보다 결국엔 ‘부자 만들어 줄게’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너도 나도 부자가 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다같이 꿈꾸는 행복한 세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는 부자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너만’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미다스의 손에 현혹되지 않고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 한다. 정치가 정책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학생들에게 체험학습을 인도하듯 초등학생의 정치에 대한 개념을 잊지 않고, ‘정치’에 대해 ‘정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5.


  여전히 자격을 운운하면 다시 말하겠다. 내가 백수이더라도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명확함으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또한, 경험의 자격을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나는 정치와 정책으로 인한 피해를 겪고 싶지 않노라고. 정치와 정책의 결과는 특정한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사실, 이 시대 실업자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가장 문제의 핵심 당사자이기도 하지 않겠느냐고.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말을 해야 알지” 혹은 “의견을 내야 개선하겠다.”라는 부모님의 말, 선생님의 말, 직장 상사의 말을 믿고 얘기를 했다가 오히려 말대꾸를 한다고, 불만이 많다고 외면당해 버린 경험들로 다시는 말하지 않으리라 오래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불만을 넌짓 넌짓 행동으로 표정으로 흘리며 ‘말’은 닫고 입을 닫고 무언가를 분출했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든 삶에 대한 의문과 어려움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풀기 위해, 속안의 것을 드러내고픈 욕구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정녕 현대사회의 특징대로 정치에는 ‘무관심’했어야 하는 것인가. 그 관심이라는 것이 취향과 취미의 문제가 아니라 생의 문제라면, 정의와 보편성의 문제라면, 그것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면, 자격을 갖춘 유명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말을 빌려 권위적으로다가 말하겠다.

  “경험이란 그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것에 관여하는 것이다.”

 

6.

 

  ‘무엇을, 어떻게’라고 말한다면 미안하지만, 우선은 ‘분노하자’다.

  ‘분노’를 무조건적으로 성질을 폭발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분노가 폭력으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분노’란 물론, 마음 속의 ‘화’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인식’이 될 것이다. 반복된 패배감과 무기력에서, 무관심에서, 내 몫의 밥그릇 챙기기에도 버겁다며 외면해 버리고 있는 현실에서 ‘분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그것이 ‘관심’의 출발이 되기 때문이다. ‘분노’를 나쁜 것으로 폭력과 동일시하는 이들은 ‘분노’를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그들의 분노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사회를 향해서가 아니라 개인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것은 자살로, 타인에 대한 분풀이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회는 분노의 방향이 엉뚱한 대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사회적인 문제 속에 삶의 긍정을 잃고 무기력해진 개인의 스스에게, 타인에게, 사람에게로 향하는 파괴적인 분노를 제도적인 문제로 인식하여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분노의 정의는 다시 필요하고, 분노의 힘에 대해 알아나가야 한다.

 

7.

 

  분노는 살아갈 수 있는 힘이자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분노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자 공감의 표시다. 이 ‘사회’에 대판 분노는 결국 사람살이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이 빼앗긴 지점에서 나는 개인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분노’를 말한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울분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서의 목소리자 의무이다. 그것은 잘못된 정책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다. 우리의 분노는 질척거리는 격분에 가득 찬 ‘분노’가 아니라 담백한 ‘분노’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높인 분노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보편적 정의에 대한 ‘분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분노를 나누어야 한다. 개인의 고통에 찬 ‘분노’를 나누고 제도적인 문제에 대해 인식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을 나누어야 한다. 분노하고, 공감하고, 저항하여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것은 인간다운 삶의 회복이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인간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최소한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분노한다가 아니라, 너도 분노하라고, 우리 모두 분노하자고 말한다. 개인의 분노의 경험 속에서 분노의 에너지가 파괴의 에너지가 아니라 창조의 에너지가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자고 말이다. 그것은 일단, 문제의 인식, 분노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8.

 

  체세나가 있는 사회이기도 하고 그렇게 판결해줄 교황이 없기도 하다. 딱히 흥이 나는 시대도 문명적인 시대도 아니다. 전단지를 배포하는 사람의 심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와도 같지 않을까.

사랑하는 가족에게, 연인에게, 친구에게, 직장 동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라디오라는 매체를 빌려야 하는 우리네의 표현력과 전달방식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싸움에 대한 화해의 말 한마디 전하기 쑥쓰러워 매체를 통해 전달하는 사연들은 그리고 결국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다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 파이팅!

  나 또한 사연을 보내는 이의 심정으로 글을 쓰는 것부터 시작했다. 정치와 정책에 대한 것을 특정한 한 인물로 몰아간다면, 굳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어쨌든 나랏일을 하는 분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하니까. 얼굴을 맞닥뜨려 얘기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매체와 수단을 통해서라도 한마디~~간절히 닿고 싶은 이 소심한 욕망을 어찌 모르시는가. 그리고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든 이 땅의 카멜레온에게 그리고, 나랏일 하시는 이들에게 전하는 최종의 메시지는, 다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 파이팅!이다. 그러니까, 그를 위한 분노도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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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갈등을 해결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 (초등사회 개념사전, 2010.7.12, (주)북이십일 아울북)

 **정치 과정 -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이야 (초등사회 개념사전, 2010.7.12, (주)북이십일 아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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