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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4일 11시 50분 등록

일상으로의 복귀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사실 나에게는 달라진 일상이라곤 다만 장소가 변한 것 밖에는 없다. 내일 다시 출근해야 한다든지 뭘 해야 한다는 그런 종류의 압박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옛날 여름휴가를 마치고 직장으로 복귀해야 할 때는 그런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떤 때는 울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 고민과 스트레스로 뜬 눈으로 밤을 뒤척이다가 막상 출근을 해서 컴퓨터를 켜보면 수십 통의 메일과 결재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야근을 하면서 보내다 보면 과연 내가 누구 좋으라고 휴가를 갔지 하는 후회가 밀려오곤 했다. 그렇게 여름휴가 며칠을 보내기 위해서는 몇 곱절의 휴가 전후의 날들을 희생해야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게 달라졌다. 나에게도 이런 날들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어느새 현실이 되었다. 휴가를 보낼 때 하루계획이 흐트러지면 그렇게 하루가 아쉬울 수 없었다. 어떻게 온 휴가인데 이렇게 하루를 날려버리다니 하는 후회가 마음속에 밀려든다. 그런데 지금은 비록 의미 없는 하루일지라도 내일 잘 보내면 되지 하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내일의 걱정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가벼울 수 없다. 그리고 오랜만에 내 책상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제주도의 한 달 살기에서 1.5주의 가족 완전체가 제주도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낯설고 불편한 환경이었지만 24시간을 같은 시공간에서 보낸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직장으로 복귀한 이후의 시간은 그러지 못했다. 이빨 빠진 나사처럼 뭔가 허전하고 힘이 빠진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이들과 홀로 있는 나를 봤을 때 문득 내가 직장을 다닐 때(우린 그때 주말부부였다)와 똑같은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달라진건 나와 그녀의 위치였다. 그때의 나는 가족을 집에 두고 다른 지역에서 혼자 직장 생활을 했었다. 그때는 홀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내 자신의 처지만 생각했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그녀는 당연히 행복할 것으로 착각을 했었다. 혼자 있는 나만이 힘들고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가 아니라 아이들과 같이 있었던 나였지만 그것은 다른 종류의 외로움이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빨리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제주도 생활은 예정보다 빨리 종지부를 찍었다.

 

정민은 한시 미학 산책에서 시의 입상진의(立像盡意)를 얘기한다. “막상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놓고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몇 줄의 교훈이거나,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하고 추상적인 느낌의 단편뿐이다. 마치 멀리서 본 산이 아름답지만, 막상 올라서서 보면 바윗돌 몇 개, 나무 몇 그루뿐인 것과 같다.”라고 말이다.

내가 이번에 해 본 제주도 한 달 살기에서 느낀 건 마치 이와 같다. 시작하기 전 한 달 살기를 바라볼 때는 정말 행복하고 아름답고 하루하루가 행복에 충만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니 이것 또한 또 다른 일상이 되었다. 왜일까? 나만 그런 것일까? 어찌되었든 그것은 내가 이 여행을 생각할 때 지극히 내 입장에서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거기에서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고 모래놀이를 하고 파도를 타며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과 나, 그리고 파라솔 그늘아래 긴 의자에 누워 시원한 맥주한잔을 하며 읽고 싶은 책을 읽는 나를 상상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막상 해수욕장에서 가면 물놀이의 위험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깊은 바다에 뛰어들던 아이들이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했어야 했고 해수욕을 하고 난 뒤에 뒤처리 또한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현실과 생각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날씨도 더워도 너무 더웠다. 에어컨이 없고 물이 없는 곳에서는 뭘 할 수가 없는 그런 날씨였다. 여름이 더워야 하는 건 맞지만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는 너무 힘든 환경이었다. 덥다고 연신 짜증을 내는 아이들 앞에서 같이 짜증을 내기도 해보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번 한 달 살기는 정말 아무 계획 없이 아무런 준비 없이 보낸 한 달이었다. 그래서 좀 답답하기도 했고 사전에 머물 집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생활하는 것도 조금 힘들었다. 한 달 살기에서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자칫 생활이 흐트러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무의미한 시간도 의미가 있겠지만 일주일이면 일주일단위로 해야 할 무언가를 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해수욕장 투어를 한다든지 박물관 투어를 한다든지 뭐 이런 식으로 주제를 정해서 실행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의미는 일단 가족과 함께 집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내일의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그녀는 직장에서의 생활로 인해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제한적이었고 그 시간 또한 여유롭지 못했다. 이번 여행에서 그녀와의 진솔한 대화에서 깊은 고민도 들어볼 수 있었고 나또한 지난 상반기의 생활을 떠올리며 마냥 행복했었고 이런 행복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졌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 에머랄드 바다에서 아이들과 해가 지도록 물놀이 하면서 보낸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끊임없는 웃음에 그냥 아빠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조개와 게를 잡는 아이들 뒤로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보면 아무 걱정이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한라산 등반이 최고였다. 8시간의 등반 속에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정상에서 바라본 구름과 백록담은 몇 안되는 내 생애 최고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틈틈이 혼자가 되었을 때 아직까지 답을 알려주진 않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보았다. 답답하기도 하지만 고작 7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해 봐야겠다. 너무 오래가면 안되는데..... 이제 다시 일상이다. 누군가 여행은 다시 돌아올 곳이 있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 했다. 이렇게 돌아올 집이 있고 그녀가 있는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느끼면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해본다.

IP *.106.20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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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22:26:06 *.124.22.184

칼럼 읽으며 노을진 바다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기상씨가 보이네요~


담부터 글씨 크기 좀 키워서 올려줘요. 글씨가 너무 작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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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8 10:11:15 *.226.22.184

삶의 여백을 잘 가지고 왔음이 느껴지네. 그리고 나도 가고 싶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거 같어. 그렇지만 꼭 한번은 시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침을 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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