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素田 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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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작년 여름 온 국민을 열광시켰던 불멸의 이순신의 드라마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이순신과의 차이가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난중일기 한 장 한 장속에 나타나는 인간 이순신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현충사에 가서 유물과 자료들을 보았다. 또한 대학의 강좌에서 리더십이라는 관점으로 이순신 장군을 만난적도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암기위주의 역사교육 때문이었을까. 화려한 업적 뒤에 숨어있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 주최할 수 없었다. 강하고 패배를 모르는 무관의 분위기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너무나 생생하게 들어왔다.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은 활쏘기 다음으로 아픈 얘기가 많이 나온다. 이불을 흠뻑 적실만큼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가끔 술에 취해 밤새 토하고도 늘 제정신이다. 감기를 걸려서 콜록콜록하면서 쉴 곳을 찾았던 내가 너무 하찮게 보인다. 그런 아픈 몸을 가지고 어떻게 전투를 하였을까? 요즘 배를 타도 멀미를 하는데, 하물며 조류에 그냥 싣고 격군들에 의하여 노에 의지하는 판옥선 위에서의 고통을 어떻게 참았을까?
장군의 추상같은 모습 속에 부하들에 대한 따스한 면도 새롭게 보인 부분이다. 죄인에 대한 단호한 처벌이 자주 나온다. 형벌을 내리고 효시하는 부분에 일체의 망설임이나 감정이 없다. 반대로 그 이면에는 자상한 면도 보인다.
“23일 - 경인_ 맑음, 바람이 찼다. 마음이 몹시 어지럽다.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또 여벌로 옷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했다. (311p)
두 번의 백의종군으로 피폐해질 때로 피폐해졌건만, 부하들을 사랑하는 모습은 여전하다.
개인의 일기에 일체 감정하나 남기지 않는 철저한 면도 있지만, 주체 못할 정도로 감정에 치우친 부분도 있었다. 아마 일기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아들 면의 죽음을 접한 순간이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편지를 전하는데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을 보니 통곡(慟哭) 두 글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고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
(469p,1597년 10월14일)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 못했다.
(470p)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 그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에 무너지지 않는다. 의연하게 다시 일어난다. 울음을 속으로 참고 다시 왜적과 싸울 계책을 마련한다.
난중일기를 덮고 나니 인간 이순신에 대한 새로운 면이 생겼다.
때로는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으로서
부모님을 모시는 아들로,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
부하를 이끄는 장군으로,
선조의 신하로...
남들보다 10년 늦게 무과에 합격하여 25년을 조선의 장군으로 변방을 돌며 나라를 지켰다. 마지막 7년은 조선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병들은 몸뚱아리와 질시와 탄핵을 받으면서도 가고자 했던 길을 굳건하게 갔다.
보여지는 것만 보다가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보게 되니 그동안 막혔던 부분이 터지면서 새로운 모습이 보였다. 내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보여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한 것이다. 남들이 말한 것을 의심도 없이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안일하게 그냥 지나쳤다. 역사는 공통된 감정이라고만 생각했다. 역사는 늘 슬프면서도 새로움을 준다. 앞으로 내가 볼 수 있는 힘을 기르겠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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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온 국민을 열광시켰던 불멸의 이순신의 드라마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이순신과의 차이가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난중일기 한 장 한 장속에 나타나는 인간 이순신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현충사에 가서 유물과 자료들을 보았다. 또한 대학의 강좌에서 리더십이라는 관점으로 이순신 장군을 만난적도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암기위주의 역사교육 때문이었을까. 화려한 업적 뒤에 숨어있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 주최할 수 없었다. 강하고 패배를 모르는 무관의 분위기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너무나 생생하게 들어왔다.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은 활쏘기 다음으로 아픈 얘기가 많이 나온다. 이불을 흠뻑 적실만큼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가끔 술에 취해 밤새 토하고도 늘 제정신이다. 감기를 걸려서 콜록콜록하면서 쉴 곳을 찾았던 내가 너무 하찮게 보인다. 그런 아픈 몸을 가지고 어떻게 전투를 하였을까? 요즘 배를 타도 멀미를 하는데, 하물며 조류에 그냥 싣고 격군들에 의하여 노에 의지하는 판옥선 위에서의 고통을 어떻게 참았을까?
장군의 추상같은 모습 속에 부하들에 대한 따스한 면도 새롭게 보인 부분이다. 죄인에 대한 단호한 처벌이 자주 나온다. 형벌을 내리고 효시하는 부분에 일체의 망설임이나 감정이 없다. 반대로 그 이면에는 자상한 면도 보인다.
“23일 - 경인_ 맑음, 바람이 찼다. 마음이 몹시 어지럽다.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또 여벌로 옷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했다. (311p)
두 번의 백의종군으로 피폐해질 때로 피폐해졌건만, 부하들을 사랑하는 모습은 여전하다.
개인의 일기에 일체 감정하나 남기지 않는 철저한 면도 있지만, 주체 못할 정도로 감정에 치우친 부분도 있었다. 아마 일기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아들 면의 죽음을 접한 순간이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편지를 전하는데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을 보니 통곡(慟哭) 두 글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고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
(469p,1597년 10월14일)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 못했다.
(470p)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 그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에 무너지지 않는다. 의연하게 다시 일어난다. 울음을 속으로 참고 다시 왜적과 싸울 계책을 마련한다.
난중일기를 덮고 나니 인간 이순신에 대한 새로운 면이 생겼다.
때로는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으로서
부모님을 모시는 아들로,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
부하를 이끄는 장군으로,
선조의 신하로...
남들보다 10년 늦게 무과에 합격하여 25년을 조선의 장군으로 변방을 돌며 나라를 지켰다. 마지막 7년은 조선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병들은 몸뚱아리와 질시와 탄핵을 받으면서도 가고자 했던 길을 굳건하게 갔다.
보여지는 것만 보다가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보게 되니 그동안 막혔던 부분이 터지면서 새로운 모습이 보였다. 내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보여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한 것이다. 남들이 말한 것을 의심도 없이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안일하게 그냥 지나쳤다. 역사는 공통된 감정이라고만 생각했다. 역사는 늘 슬프면서도 새로움을 준다. 앞으로 내가 볼 수 있는 힘을 기르겠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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