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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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운명의 사슬을 끊고 싶어 하지만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는 참 소박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
그가 협회 사무국장이 된지 한 참이 되었다. 어느 날 그가 함께 저녁이나 하자고 해서 올림픽 공원 안의 설렁탕 집에 마주 앉게 되었다. 우리는 1984년 여름, 함께 88 꿈나무를 지도하였었다. 그는 협회 내에 자리잡고 있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졸업한 전통 있는 펜싱명문고등학교 출신이었다. 별로 말이 없고 가끔씩 조용조용 몇 마디 하는 그는 말을 할 때는 약간 더듬었다. 벌써 십 년 세월이 지나버렸다. 그와 함께 꿈나무 코치를 했던 나는 국가대표 코치로 세상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대표팀에 복귀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더러 생전 처음으로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말했다. 나는 선량한 그의 성격과 조용한 사람됨을 좋아했다. 언제나 나를 바라보면서도 한 번도 선배 노릇을 하려 들지 않는 선배와는 늘 마음 편하게 마주칠 수 있는 관계였다.
“00아! 나는 니가 부럽다.”
“ 예~에 ?!”
“나는 니가 부럽다고… “
“ 으메, 뭔 소리다요…^^ “
“나는 진짜로 네가 부럽다. 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잖니! 난 있잖아, 항상 쫄다구였다.00고 시절에도 그랬고 00체육전문학교에 같을 때도 그랬고, 해병대 갔을 때도 그랬고 협회에 들어와서도 그랬다. 나는 한 번도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선배들 뒤치닥거리만 하다가 세월만 가고 이모양 이 꼴이다. “
“에이, 형~ 나는 형이 부럽기만 하구만, 선배들이 챙겨 줘, 짤릴 걱정 없어, 항상 집에 들어가 형수랑 잘 지내는데, 형이 그런 말 하니까 좀 그러네.”
“아니야, 난 네가 부러워 너는 성질대로 하잖아, 00 형이 뭐라고 하던, 00형이 뭐라고 하던 넌 고집대로 하잖아. 난 그러는 네가 참 부러웠었다… 자 한 잔 해라.”
“예, 고맙습니다. 형! 근데, 형은 그거 알아? 형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있잖아, 그 동안 날마다 날마다 목숨 걸고 살았어., 그 동안 나는 언제 짤릴 지 모르는 삶을 살았어. 다행히 재수 좋게 안 죽고 살아서 이렇게 형이랑 마주 앉아서 소주를 마실 수 있지만…”
그렇게 우리는 그 날 저녁 얼큰한 찌개에 소주를 마셨다. 밤이 늦도록…
얼마 있지 않아 형은 협회를 그만 두었고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삶이라는 것이 그런가 보다, 어떤 사람은 안정된 삶의 무료함에 지치고, 어떤 사람은 거친 바다 위의 일엽편주 같은 삶에 지친다.
‘가늘고 길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그가 ‘굴고 짧게’ 살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삶을 부러워 했을 때, 비빌 언덕도 쉴만한 그늘도 없던 고단했던 나는 마음속으로 ‘젠장 누구 약 올리는 거야 뭐야.’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게 언제나 선배들이 챙겨주던 그가 배부른 소리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세상에는 ‘공짜없음’을 배웠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나를 부러 했던 이유를 생각했다. ‘음…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다…. 내가?’ 솔직하게 돌이켜보건대, 나는 결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기 위해서 그렇게 살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눈에 내가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았게…? 나는 그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코치 없이 자라고 고향 선배가 없는 나는 누군가 이끌어줄 사람이 없었다. 줄을 서도 뒷 전일 수 밖에 없고, 추종을 해도 배척과 의심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나의 선택은 죽기 아니믄 까무러치기다, 소신대로 해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던지 아니면 짤리는 것이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나의 삶의 조건들 속에서 나는 새장 속의 안전보다는 새 장밖의 모험을 선택했다. 나는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안전지대라는 이유 때문에 갇혀 살았던 그 선배 형과는 반대로 보호받을 수 있는 관계의 부재를 통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힘의 강화를 위한 다이하드를 선택 했다. 그래서 나는 경쟁에서 이겨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 우선하지만 나의 삶은 ‘이기는 것’이 우선이 되었다. 삶을 위해서 이기려고 하는 것이었지만 그 대가는 삶을 희생하는 것이었다. 삶의 나머지 모든 시간들을 ‘이기는데’에 썼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살아 남았지만 대가는 무척 비쌌다. 친구를 잃었고, 가족과 안전을 뒤로 하고 거친 경쟁의 무대 위에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챗바퀴 돌든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알기 위해서 소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상상할 필요는 없었다. 저승 문 앞에서의 심판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는 삶이었다. 왜냐면 심판은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비쌌지만 그 선택은 보람 있었다. 내가 배운 귀중한 교훈은 살기 좋은 세상은 찾는 것이 아니라 힘과 능력을 갖추어 어디든 살만한 세상이 되게 하는 것, 곧 ‘사랑하는 곳에 존재할 수 없다면 존재하는 곳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내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게 주어진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운명의 사슬을 끊고 싶어 하지만 한 번도 그것을 끊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운명의 사슬을 끊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그 삶에 충실함으로써 그것에 매이지 않는다. 왜냐면 그 안에 내 삶의 모든 것을 끌어다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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